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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31, 2006

魯氷花 Dull, ice flower

루빙화"사람들은 이 꽃을 '루빙화'라 불러요 아주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인데 꽃이 시들면 그 걸 거름으로 쓴대요 차를 기르는 농부들이 차밭에 루빙화를 심고 금방 시들고 나면 그 꽃을 그대로 땅에 묻으면 차를 잘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된다고 해요 죽어서도 좋은 향기를 전해주는 것이죠"
영화의 처음에 나오는 말이다.죽은 시인의 사회와 같은 시기에 나왔으며그 이상의 감동을 준다는 평이 있길래 봤는데뭐 그렇지는 않았다.죽은 시인의 사회는 미스터 키팅(?)이 교육제도에 대한 대안적 방식과 학생과 선생님의 소통의 방식에 관한 영화라고기억하고 있는 정도이며 그것도 상세하지는 않다.
어느 산골마을에 도시에서 온 미술선생이 고아명이라는 학생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기존의 제도와 인식의 벽에 부딪혀서 실패를 하며 아명의 그림 한장을 가지고 떠나게 된다.아명은 엄마와 같은 선천적 병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게 되는데,그 이후 미술선생이 가지고 간 아명의 그림 한장이 세계대회 대상을 타게 되며,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지만 정작 가까운 사람과 그 천재성을 알고 있던 사람에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인정치 않던 타자들만이찬양을 한다는 내용이다.
대충의 줄거리만 보더라도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와 그 조력자. 그리고 이들과반대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 사회 여러가지 상황들이 있을 것임을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있을 것이다. 또 이러한 천재들의 이야기(굿윌헌팅 등등)에서는 도식화된 구성이라고도 할 수있을 것이다.
루빙화라는 말의 뜻 그대로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솔직히 난 이 영화에서 내가 들었던 짧은 평들 처럼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아명은 갑자기 죽어버리기엔 초반에 너무나 건강한 장난꾸러기 캐릭이어서 그 병이드러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천재성의 발현에 대한 표현이 좀 미약하지 않는가 생각이 많이 든다. 아명을 이해하는 누나와 미술선생의 캐릭터는 너무 정형화 되어 있고설득력이 약한 것도 사실이다. 미술선생은 단지 그의 그림 한장을 얻어가고 크레용을 주었을 뿐, 주인공과의 교감 또한 약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의깊게 살핀 부분은 아명보다는 미술선생이었다. 실력있는 미술선생이 시골학교로 오면서 학생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살려주려고 한다.하지만 기존 선생들의 몰이해에 따른 탄압(?)으로 그것이 불가능하자 그가 선택한 것은단지 떠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것은 세계대회 수상이라는 상장 하나 뿐이었다.마지막 대상수상을 축하하는 연설에서의 모습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이 바란 것은 개인의 천재성도, 예술도 아닌 단지 자그마한 사각형의 명예였을 뿐인 것이다.
획일화되고 창조성이 결여된 교육제도와 사회는 아주 느리게 진화할 수 밖에 없으며급격한 변화를 원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 과정을 무시한 성과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이장의 연설에서 보면 그는 많은 것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한다. 결국 그것은 많은 상장을 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이 영화가 감동적인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도속의 소외자에 대한 우리의 자화상과 사회에서 인정 받는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말이다.
아름다웠을 그 강과 차밭의 자연은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지 않으며 영화를 이끌어 갔어야 할 미술선생과 누나는 힘이 조금 딸리고 있다.오직 고아명만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괜찮은 소화를 해냈다고 느낀다. 아. 누나의 경우에도 연기는 괜찮았다고 여긴다. 캐릭터의 힘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영화를 보고는 가장 처음에 루빙화에 대해 묘사한 처음의 글만 적으려고 했었다.저 말을 적고나니. 루빙화는 이 영화를 다 표현한 말이 아니란 생각에 글을 계속 적어나가게 되었다.

Aug 3, 2006

Santa Sangre 성스러운 피 1989

i stretch out my hands to thee:
my soul thirsts for thee like a parched land...
teach me the way i should go for to thee i lift up my soul
psalms.143.6.8.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영혼이 피곤하나이다.(시편. 143.6.8.

위의 글은 이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지문이다.
성경 시편의 한 구절인데 영어와 번역된 성경의 구절은 뭔가 뉘앙스가 틀리다.
어느게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글성경의 의미로는 이 영화와 그리 부합해보이진 않는다.

그래서 내가 번역해본 말은 다음과 같다.
당신에게 손을 뻗치나이다.
메마른 대지처럼 내 영혼의 갈증은 당신을 갈구합니다.
내 영혼이 당신에게 닿을 수 있게 인도하소서.

당신을 신으로 해석하지 않고 스스로으 정체성으로 인식하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

Alejandro Jodorowsky의 1989년작.
fenix의 어린시절과 성장한 모습이 너무도 닮아 캐스팅을 보니 다 같은 집안이군.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전부 Jodorwsky집안이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컬트영화라고들 하는데 하여튼 기이한 영화.
공포영화도 아니고, 종교영화도 아닌 좀 묘한 영화이다.
우리의 손을 움직이는 것은 무었인가?
자신의 손을 찾기 위한 잔혹한 여정.
콘차가 섬기는 팔없는 강간당한 소녀 "리리나"
그 근거없는 사교의 생성은 과연 뭘까?

정신병원에서의 자신이 새인줄 알고 행동하는 "피닉스"
성스러운 피의 성전의 철거.
코끼리 장례식에서 보이는 사체의 투기에 따른 빈민들의 행동.
그리고 문신여인의 유혹에 의한 비극적 파탄.
콘차는 아르고에 의해 팔이 잘려죽고, 아르고 역시 죽고 만다.
어느날 정신병원에서의 외출에서 우연히 보게된 문신여인.
거기서 페닉스의 복수는 시작된다.
그 매개체는 팔없는 콘차의 환상.
자신은 콘차의 팔과 손으로 필요하다는 환상을 가지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콘차가 원하는 복수라고 정당화하며
스스로를 똑 같은, 아니 최대의 피해자로 만들어버리는 교묘함까지 동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수의 칼날들. 그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살인이 주는 중독성 쾌감에
빠져버린 페닉스.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콘차의 환상은 너무나 거대하다.
콘차의 망령은 이제 그를 오히려 파멸로 이끌지만 서로를 구원하기 위한 매개체라고 할수도
있는 알마와 피닉스는 자석이 붙듯이 서로를 끌어당긴다.
알마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가 생긴 것이다. 자신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콘차의 팔과 손이어서는 안될 이유이다.

결국 피닉스를 구원하는 "알마"
알마에게도 "피닉스"는 같은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니까. 뭐 그렇게 스토리는 흘러간다.

과연 그가 한 살인은 사실일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환상인지가 애매모호하다.

이것은 과연 교묘한 변명으로 치장된 복수의 살인극인가?
아니면 자신의 손을 찾기위한 잔혹하고 슬픈 정체성의 확립과정인가?
나는 후자로 읽고 싶다. 그것이 변명이라 하더라도 큰 줄기가 변하는 것은 아니기에.

세상을 살아가고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온전한 나만의 의지는 있는가?
우리의 의지로 구현되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왜 구원 받기를 원하는가? 만약 구원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진정 구원받은 것일까?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나의 의지인가? 아니면 누구의 의지인가?

굉장히 복잡하고, 영상자체도 기이함으로 가득찬 영화이다.

PS.
가상인물의 실체화. 파이트클럽, 최근 한국영화 모노폴리.를 얼핏 떠올리게도 한다.
모노폴리와는 비교불허, 파이트클럽과 비교해 보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다.

미국 드라마 중에 카니발이란 드라마가 있다.
서커스단이라 던가 그 기이함등에서 유사함을 느낀다.

Jul 27, 2006

Cinema Paradiso

시네마 천국이라는 극장을 배경으로 한 사람의 성장사를 그린 영화.

알프레도와 토토.
아마 꼬마 토토와 알프레도는 거의 최고의 투톱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사람의 우정, 사랑. 여기에 영화는 단지 매개일 뿐이다.
아버지가 없는 토토에게 있어서 알프레도는 아버지, 친구, 스승의 모든 역할을 다한다고 할 수 있다.
알프레도에게 있어 토토는 아들과 같은, 아니 자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원하는 자신의 아바타로서의 바램이고 희망일 것이다. 자신들의 약속을 우직하게 지켜나가는 두사람.

시네마 파라디소에서 어린시절, 첫사랑, 영화 등 모든 것을 다 겪은 토토와 시네마 파라디소에서만 살아온 알프레도, 그들에게 있어 영화라는 그 장르 자체보다는, 극장인 시네마 파라디소에서 상영하는 모든 영화들이 자신의 생활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감독에게 있어서나, 토토나 알프레도에에 있어서,

영화는 예술 작품도, 상품도, 생활도 아닌 그 자신을 투영하는 모습일 것이다.
극장의 흥망성쇠, 영화의 발전과 대중매체로서 가지는 역할의 변화등, 그 모든 것을 토토의 성장과 극장의 변천사를 통하여, 알프레도의 죽음을 통하여, 추억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감성적으로 묘사한 것같다.

알프레도, 토토 뿐 아니라, 시네마 파라디소에서 함께 울고 울었던 그 모든 사람들의 추억이 잘 버무려져 있다. 마지막의 키스신 모음은, 아마도 이 영화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주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대중매체로서의 영화던, 예술로서의 영화던 그 영화를 보고 느끼는 관객들은 정말 다양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상품이던, 예술이던 내게 있어 이런 추억을 줄 수 있다면, 토토가 느꼈을 감동을 나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 아닐까? 영화는 다양한 측면을 가진다. 주제를 가진다. 이야기를 가진다. 하지만 이런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무얼 더 바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ps.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말하듯 최고의 영화다. 영화사랑이라는 측면에서 최고이다. 하는 말에는 동의 하지 않는다. 이건 하나의 성장영화이며, 추억되살리기이다. 단지 그 과정에서 영화라는 매개체를 훌륭히 사용했으며, 또한 잘 만든 영화로 표현된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를 위한 영화는 아니라는 느낌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추억을 잘 되살린 작품이다. 두서 없이 이렇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