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ta Sangre 성스러운 피 1989
i stretch out my hands to thee:
my soul thirsts for thee like a parched land...
teach me the way i should go for to thee i lift up my soul
psalms.143.6.8.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영혼이 피곤하나이다.(시편. 143.6.8.
위의 글은 이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지문이다.
성경 시편의 한 구절인데 영어와 번역된 성경의 구절은 뭔가 뉘앙스가 틀리다.
어느게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글성경의 의미로는 이 영화와 그리 부합해보이진 않는다.
그래서 내가 번역해본 말은 다음과 같다.
당신에게 손을 뻗치나이다.
메마른 대지처럼 내 영혼의 갈증은 당신을 갈구합니다.
내 영혼이 당신에게 닿을 수 있게 인도하소서.
당신을 신으로 해석하지 않고 스스로으 정체성으로 인식하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
Alejandro Jodorowsky의 1989년작.
fenix의 어린시절과 성장한 모습이 너무도 닮아 캐스팅을 보니 다 같은 집안이군.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전부 Jodorwsky집안이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컬트영화라고들 하는데 하여튼 기이한 영화.
공포영화도 아니고, 종교영화도 아닌 좀 묘한 영화이다.
우리의 손을 움직이는 것은 무었인가?
자신의 손을 찾기 위한 잔혹한 여정.
콘차가 섬기는 팔없는 강간당한 소녀 "리리나"
그 근거없는 사교의 생성은 과연 뭘까?
정신병원에서의 자신이 새인줄 알고 행동하는 "피닉스"
성스러운 피의 성전의 철거.
코끼리 장례식에서 보이는 사체의 투기에 따른 빈민들의 행동.
그리고 문신여인의 유혹에 의한 비극적 파탄.
콘차는 아르고에 의해 팔이 잘려죽고, 아르고 역시 죽고 만다.
어느날 정신병원에서의 외출에서 우연히 보게된 문신여인.
거기서 페닉스의 복수는 시작된다.
그 매개체는 팔없는 콘차의 환상.
자신은 콘차의 팔과 손으로 필요하다는 환상을 가지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콘차가 원하는 복수라고 정당화하며
스스로를 똑 같은, 아니 최대의 피해자로 만들어버리는 교묘함까지 동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수의 칼날들. 그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살인이 주는 중독성 쾌감에
빠져버린 페닉스.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콘차의 환상은 너무나 거대하다.
콘차의 망령은 이제 그를 오히려 파멸로 이끌지만 서로를 구원하기 위한 매개체라고 할수도
있는 알마와 피닉스는 자석이 붙듯이 서로를 끌어당긴다.
알마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가 생긴 것이다. 자신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콘차의 팔과 손이어서는 안될 이유이다.
결국 피닉스를 구원하는 "알마"
알마에게도 "피닉스"는 같은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니까. 뭐 그렇게 스토리는 흘러간다.
과연 그가 한 살인은 사실일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환상인지가 애매모호하다.
이것은 과연 교묘한 변명으로 치장된 복수의 살인극인가?
아니면 자신의 손을 찾기위한 잔혹하고 슬픈 정체성의 확립과정인가?
나는 후자로 읽고 싶다. 그것이 변명이라 하더라도 큰 줄기가 변하는 것은 아니기에.
세상을 살아가고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온전한 나만의 의지는 있는가?
우리의 의지로 구현되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왜 구원 받기를 원하는가? 만약 구원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진정 구원받은 것일까?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나의 의지인가? 아니면 누구의 의지인가?
굉장히 복잡하고, 영상자체도 기이함으로 가득찬 영화이다.
PS.
가상인물의 실체화. 파이트클럽, 최근 한국영화 모노폴리.를 얼핏 떠올리게도 한다.
모노폴리와는 비교불허, 파이트클럽과 비교해 보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다.
미국 드라마 중에 카니발이란 드라마가 있다.
서커스단이라 던가 그 기이함등에서 유사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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