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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11, 2006

라스트라이프 라스트러브Last life in the Universe 2003


Thailand

Pen Ekratanaruang
Asano Tadanobu


접하기 힘든 태국영화지만 아사노 타다노부라는 이름때문에 보게 되었다.
이 영화로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탔다는데, 그렇게 뛰어난지는 모르겠고,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살렸다는 느낌을 주는 연기다.
이중성을 가진 묘한 인물을 그의 평범하지 않은 마스크로 제대로 소화했다는 건 인정.
극중에서 잠깐 이치더 킬러의 포스터가 비칠때는 피식 웃었는데
나중에야 켄지가 일본에서 뭘했었나를 짐작케끔 하는 장치로도 보인다.

태국 여배우 참 이쁘게 나온다. 처음에는 별로 였는데 영화를 보면서 점점 이뻐보인다.

Last love in the universe
우주에서의 마지막 사랑인가?
(나중에서야 내가 제목을 잘 못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love가 아니라 life다.
Last life in the universe. 이 세상 마지막 생명, 존재 정도?)

결벽증과 정리된 것에 대한 어떤 강박관념을 가진 일본인 남자 켄지는 태국에 살고 있다.
지저분하고 정리라는 것은 전혀 모르지만 일본에 갈려고 공부를 하는 태국여인 노이.

두명의 대조적인 삶을 통해서 뭘 보여주려고 하는 걸까?
이 두명은 처음 볼 때부터 철저하게 대조적으로 비춰진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뭔가를 공통적으로 상실했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켄지는 미친 것 같지만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으로써
노이는 정상적이지만 평탄치는 않은 삶을 사는 사람으로써 나온다.

자살에의 희망을 가진 켄지는 늘 그렇듯이 다리를 지나가다
노이와 니드 자매가 다투다 교통사고로 니드가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연결이 된다. 사고 당시 켄지가 두고온 책가방을 노이가
되돌려 주러 오면서 둘은 함께 있게 된다.

물론 켄지는 그의 형의 죽음과 살인이 일어난 장소인
자신의 집으로 갈 생각은 별로 없다.
지저분한 집에서 기거하게 된 켄지는 청소를 하고
곧 일본으로 떠날 노이와 어떤 교감을 하게 되지만
그녀는 월요일이면 일본으로 떠난다.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켄지의 등에 있는 커다란 문신이 드러나면서
그 정체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노이가 일본으로 떠나는 날 켄지를 죽이러
오는 야쿠자 킬러들.

확실한 것은 없어 보인다.
켄지가 살아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가 피는 담배연기와 같이 모호하기만 하다.
증거물을 통해서 이후으 일이란 건 알려주지만
노이에게 온 켄지의 가방과 의 시간순서가
어떻게 배열되어있는지는 모호하기만 하다.
어쨌던 켄지는 유치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며
노이는 그를 찾아온 켄지를 웃으며 만나러 가는 듯하다.

대조적인 두 삶과 공통점. 그리고 그들의 사랑
그들은 사랑을 모르기에 상실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다.
사랑을 알면서 그들은 상실을 절감하면서
그것을 보상할 대상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아마 극중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지문에서 추측해 볼 수 밖에.

도마뱀 한마리가 잠에서 깨어
자신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한마리 도마뱀인걸 알았다
가족과 친구도 모두 죽어버렸다
싫은 사람...
학교에서 도마뱀을 괴롭히던 이들...
다른 도마뱀들까지 모두 가버렸다
마지막 도마뱀은 혼자라서
너무 외롭다
가족과 친구가 그립고...
심지어 적들까지도 그립다
혼자일 바엔 적에게
둘러싸인 것이 차라리 낫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도마뱀은
일몰을 가만히 바라 보았다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아무도 없다면...
삶의 의미가 뭘까...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이 마지막 도마뱀이 되었을 땐
이런 생각조차 의미가 없다.

상대가 없다면 교감이 없다면
너의 존재는 의미가 없을런지도.
상대와의 교감을 통하여
우리는 사랑을, 증오를,
그리고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 영화에서 느낀 거다.

Oct 23, 2006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My right to ravage myself 2003



전수일

정보석
추상미
수아
김영민

내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전수일이라는 이름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름도 아니지만
몇번인가 친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화면의 구도와 질감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인 초반의 느낌때문인지
웬지 가라앉은 듯한 후반부는 지루하기 까지 하다.
아마 그 느낌은 삶과 죽음이란 경계를 건널것인지 아닌지의 혼란함을 주려고
한 의도라고 느끼고 있긴 하지만 영화를 볼 때는 고개가 갸웃해졌다.

거울을 통해서, 렌즈를 통해서, 창유리를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들과
그 상대방이 보여지는 많은 장면들은 S의 존재와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길 원하는 자아의 모습일 수도 있을 듯 하다.

도로, 길, 터널, 교각, 시골의 국도 등에서 끊임없이 질주해나가는 모습은
쉬기를 바라지만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또 선택에 의해서 쉴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도 하다.

마지막 도로의 질감의 변화는 초반부로 되돌아 간다.
혼돈과 어둠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일런지도.

위의 느낌은 영화를 얼핏 보고 느껴지는 것들만 러프하게 적어본 것이다.

S(정보석)이란 존재는 저승사자, 사탄, 메피스토텔레스 등 악마라는 존재의
다른 표현일 것이며, 또한 그 존재가 자신이라는 것을 의미한고 생각되어진다.
결국 이 영화는 현대판 저승사자의 이야기일것이다.

영화를 보면 몇개의 지문들이 나온다.
후반부의 것은 기억을 못하지만
초반에 나오던 인간이 신이되는 방법에 대한 지문은
이 영화의 함축일런지도

그 방법은 창작을 하는 것과 죽음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나온다.
내가 하는 일은 죽음을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주인공의 존재가 초현실적인 것이며 악마라고까지
느끼게 하는 것은 시간순서를 비틀어버림으로써
관객에게 착각을 유도하며 그런 느낌을 진짜로 믿어버리게끔 한다.
죽음을 이끌어주는 악마가 있다고 말이다.
S는 말한다.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지 지켜봤을 뿐이라고

나에겐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써,
인간이란 측면에서의 존재라면
그러한 권리는 있긴 하지만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쉬운 것도 아닐 것이다.
스스로를 파괴한 다는 것은
관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기에 말이다.
일개인의 존재유무가 전체적 가치의 질량측면에선
어떤 차이를 일으킬 수가 없겠지만
거기에 관계라는 요인이 있다면
존재파괴의 권리 같은 것은 단순히 개인적이지만은
않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단순히 위의 말에 반대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위의 권리라는 말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이다.
하지만 자신을 파괴하게끔 한 요인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은
S일수도 자신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묘사되듯이
개인이 느끼는 각자의 이유가
개인적이지만은 않음에서 유추해볼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영화는 의미를 담으려고 하지만
복잡해보이기만 하는 캐릭터들의 나열은
그것을 희석시키고 있다.

Oct 17, 2006

13 steps 13 階段 2003


反町隆史 takashi Sorimachi
山崎努 yamasaki tsutomu

생각외로 괜찮았던 작품.
.
살인과 생명 그리고 삶에 대해서 추리스타일로 이끌어가고 있다.


먼저 위의 두명의 배우가 꽤 괜찮게 나온다.
다카시 같은 경우에는 주로 일 TV 드라마 GTO등의 선이 굵거나
약간은 과장스런 캐릭터의 마초코믹스타일의 배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딴판이기도 했고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었다.

야마자키는 처음 본게 GO!였었는데 극중 스가하라의 돌주먹아버지로 처음 접했고
그 이후 여러작품에서 봤지만 기억나는 건 천국과 지옥,Go, 담뽀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고 이 영화에서 담뽀뽀(민들레)를 떠올리는 장면은 그 영화를 떠올리며
재미있었던 것 같다.

영화보다는 배우에 대한 느낌을 먼저 적긴 했지만
시간을 들여서 봐도 충분히 아깝지 않을 영화라는 것을 먼저 말해둬야겠다.

처음 언급했듯이 생명이라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독특하게 접근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카미 쥰이치(소리마치 다카시)는 과실치사죄로 삼년간의 복무후 가석방으로
출소를 하게 된다. 3년전 사무라라는 사람과의 다툼으로 인한 것이며
그의 아버지는 보상금으로 거액의 돈을 물어야만 했다.

난도(야마사키 츠토무)는 교도소의 간수장으로써 그를 눈여겨 보다가
가석방 후에 미카미와 함께 10년전의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된다.

10년전 보호관찰관이었던 사람의 살인사건에 얽힌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씩 드러나는 의혹과 사실의 조작, 그리고 진실들.

결국 드러나는 것은 10년전 미카미가 살인사건의 장소 근처에 있었다는 것과
그들이 발견한 살해도구에서 나타난 미카미의 지문, 보호관찰관의 죽음에는
그가 보호관찰하는 사람을 협박, 갈취한 사실과 같은 것들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들은 다양하다.
미카미는 과실치사로 판결이 되었지만 살인의도는 가지고 있었다.
난도는 13년전 간수로써 사형을 집행한데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보호관찰관을 죽인 안도는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사무라의 아버지는 미카미를 용서하지 않고 그를 사형시킬 음모를 꾸민다.
10년전 미카미는 여자친구와 이곳을 방문하여 사무라에게 폭행강간을 당한다.

위와 같은 간략적인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영화는 짜임새를 갖추어 나간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좀 엉성한 것 같긴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것 같다.

영화는 적절한 흥미와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퍼즐을 풀듯 고백과 사실의 발견등으로
차분하게 진행이 되어간다. 결국 미카미와 10년전의 여자친구 유리는
감동적인 재회(?)를 하게 되고 난도는 가족의 재결합과 꿈을 이룰 것 같은 암시를
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제빵서적에 꽂힌 민들레(담뽀뽀)를 보여주면서.

줄거리는 적다보면 항상 길어지기만 한다. 젠장 요약을 하란 말이다.

과실치사, 살인의도, 합법적 살인, 협박에 의한 살인, 보복살인,
그리고 사형제도 등 다양한 살인경험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얽힌 관계를 통하여 생명의 존엄성과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자연스럽지 못한 강제된 죽음에 대해 인간들이 가지는
본성적인 죄책감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아마 누군가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대부분의 사람이
해봤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을 우리는
살인자라고 부른다. 그것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정당방위를 제외하고
그것은 일단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기도 하다. 그 부분에 대해
짚어가면서 개인의 경험과 고백을 통하여 진실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딱히 결론 내어진 것은 없다. 단지 잊혀졌던 사실과 사람들을
알게되고 무고한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처음엔 사형제도와 미카미의 범죄를 밝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일면 아쉽기도 다행이게도 그것은 아니었다.
재미있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조금 더 인간 본성과
원죄의식에 가까이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즉 조금은 더 어두웠으면 어땠을까^^

Oct 12, 2006

My life without me/ mi vida sin mi 2003


Isabelle Coxiet

페드로알마바드로의 영화인줄 알고 봤는데 아니었다. 나중에 크레딧 보면서야 알았다.
물론 영화보면서 이건 좀 이상한데 하긴 했지만, 일단 영어대사가 나오길래 더빙인가
생각을 하면서도 더빙 정말 잘했군 하는 생각을 하다니. 멍청하긴. 쩝.

그렇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았고, 캐릭터에 몰입하면서 생각도 해봤다.
전에 본 일본 영화 니라이카나이로부터 온 편지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물론 그건 딸들에게 전하는 18살까지의 생일메시지 테잎과 편지에서 직접적으로
떠올랐고 비교하면서 생각해보니. 니라이카나이에서 생각지 못했던 엄마의 입장에서
자신의 죽음과 남겨진 딸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다.

23세의 앤은 두딸, 남편과 함께 엄마의 집 뒷뜰에서 트레일러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녀는 여러개의 파트타임잡을 가지고 있다. 애들과 생활에 지쳐 단지 중국어 회화
테잎을 듣는 것만이 유일한 자신의 의지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쓰러지고 난소암 판정으로 2개월의 시한부인생을 선고 받는다.
그때부터 그녀는 생각을 시작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겪어왔고 힘들었던 모든 시간에서
자신은 생각이 없었는데 이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죽기전에 해야 할 일 열가지를 정한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

1. 딸들에게 사랑한다고 매일 여러 번씩 말해주기

2. 남편에게 조신한 신부감 구해주기

3. 애들이 열 여덟이 될 때까지의 매년 분의 생일축하 메시지 녹음하기

4. 가족 모두 웨일베이 해변으로 놀러가기

5. 담배와 술을 맘껏 즐겨보기

6. 내 생각을 말하기

7. 다른 남자와 사랑을 한 후 기분이 어떤가 알아보기

8. 날 몸바쳐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들기

9. 감옥에 계신 아빠 면회가기

10. 인조 손톱 끼워보기(머리 모양 바꾸기)

그녀는 이제 남은 시간 위의 것들을 하나하나 실천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보고, 가족에 대해 나름대로 배려를 하고,
이제 인생에서 내가 없는 내 삶을 준비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찾는다. 지금까지의 삶은 그녀가 없었지만 지금현재의 삶과
자신이 없을 미래에 그녀는 분명히 어떤 식으로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까?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현실에서 쉽지는 않지만 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부족한 것은 시간이었다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기 전에 말이다.

뭐 여러가지 딴지 걸고 싶은 부분도 있지만 죽음이라는 화두와
삶에서의 정체성 문제 앞에 그러한 것들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살아간다는 것, 죽어간다는 것. 긔 의미의 차이는 뭘까?

Sep 11, 2006

선택 2003 The Road Taken


보는 내내 울었던 영화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의 홍기선

나는 당신의 사상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 볼테르

영화의 시작은 위의 글로 시작해서

아래의 말로 끝난다.

1951년 10월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시작한 김선명은
1995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수감생활 43년 10개월 중 39년을 불취업으로
방안에만 갇혀 지냈고, 그 중 21년을 독방에서 지냈다.

석방된 뒤 선명을 본 90의 어머니는
2개월 뒤 돌아가셨고, 그 후에도 동생들은
선명을 만나주지 않았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고,
9월 2일, 치과기공일을 하던 선명은
다른 62명의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북송되었다.

일단 영화만 본다면 단순 나열이 주를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후반부 결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영화라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었다.

인간극장이나 다큐를 보는 듯 했다.

쉽지 않은 주제와 우리나라 근 현대사를 관통하는 40 여년 간을 다루는

소재의 무게감이 영화의 웬지모를 엉성함을 덮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후반부에 다가가면서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추어 간다는 느낌이 들긴 햇지만

물론 영화내에서 어떤 상징과 기호 같은 표현들을 일부러 자제한 것 같은데

은유적 표현이나 대사를 억제하고 직접적인 대사와 김선명의 시각에서만

즉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처음에 시작하면서 터널 장면을 보면서는 후샤오시엔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 영화의 구조나 형식 등 모든 것은 결국

이데올로기, 한국 근현대사, 인권, 삶, 가족을 조금씩 다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결국 이데올로기, 삶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물론 삶에 모든 것이 압축되는거 아니냐? 그렇게 물어본다면

표현을 달리 해야겠다. 양심의 가치라고 표현하면 정확할런지 모르겠지만

삶에서의 최우선 가치를 이들은 양심이라고 표현한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인정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러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가장 먼저 남북문제.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이데올로기 문제는 내가 논하기엔 힘겨운 주제이기도 하고

옳고 그름을 논하기 보다는 현 추세에 영합되어지는 부분이

더욱 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오태식의 말처럼 동구도 소련도 붕괴되었으니 하는 식의

단순한 의미는 아니다)

대림 되는 두 이데올로기에 개인적인 여러 관점들이 혼합되어 있지만

주 되는 두가지는 오태식과 김선명의 관점일 것이다.


통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으면서도

김선명의 입장이 더욱 강하다(그럴 수 밖에 없다. 시점 자체가)


둘은 기본적인 배경 자체가 극과 극이다.

경찰에게 자신이 빨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가족이 죽음을 당한 김선명

공산주의자에게 가족과 자신의 다리를 잃은 오태식.


오태식은 말한다. 당신들은 잊혀졌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삶을 낭비하고 있느냐?

김선명은 말한다. 내 삶에 가치있는 일을 하나는 하고 싶다. 이건 낭비가 아니다.


오태식은 묻는다. 그럼 김일성을 존경하는 것은 뭐냐?

통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북 주도하의 통일은 원하지 않는다.

그럼 남 주도의 통일이 된다면 당신은 관계없는가?

내가 정의가 힘이 있다면 너 같은 빨갱이는 벌써 없애버렸을 것이다.


김선명의 대답은 솔직히 괘변이었다. 내가 누구를 존경하던, 김구선생을 존경하던,

매국노 이완용을 존경하던 그것은 내 자유라고. 통일을 해서 모두가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고 싶을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괘변이라고 한 것은 매국노 이완용을

예로 들은 부적절함이었고 논리에 있어서 억지스러움을 말한 것이다.

매국노 이완용은 아무리 대비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들어서는 안되는 예이다.

이건 분명 잘 못 된 것인데(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그걸 자유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오히려 관철 하지 못할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오태식은 말한다.

진 싸움에 끼어들어서 감옥에 갇혀 있는 당신은 무었인가 하는 말이 계속 떠오른다고

그것은 자식의 성장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과거의 가치가 퇴색이 되었음 을 표현하는 것이다.


김선명은 말한다. 보통 감옥 밖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감옥내에 있는 것이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존중할 수 밖에 없다. 세월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말 중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불평등한 입장에서 이루어졌고 탄압이 가능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김선명이 출소하는 그 감옥 속에서

오태식은 오히려 갇혀 있는 듯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진정 갇혀 있었던 것은 누구일까?

하는 의문과 비난일 것이다.

그리고 오태식에게 했던 말은 출발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둘은 어떤 벽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메꿀 수 없는 상처가 그 벽을 이루고 있기에 말이다.

김선명은 당신도 용서하라고 말한다. 자신 때문에 죽은,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은 것을 자신은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그 간극을 메꾸지 못한다면 결국 증오의 악순환에 따른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계속될 수 밖에 없음을 알린다.

그렇지만 김선명이 출소하는 장면에서 입고 있는 죄수복은 그 또한 오태식 처럼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처음에 이건 뭐야? 그랬다. 감옥에서 죄수복 입고 출소하는 경우도 있냐? 라는 )

뭐 결국 실제화면에서 그들은 평상복을 입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것은 영화적 표현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데올로기 충돌에서 비롯되어진 잘못된 증오의 결과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으며 남은 것은 상처밖에 없다는 의미이리라.


난 이데올로기가 굉장히 중요한 어떤 것이란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것이 대량학살이라던지, 어떤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때는 의미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아닌가?

어떤 이데올로기가 옳다 그르다, 더 낫다 못하다의 판단은 개인이 하는 것이며

그 개인이 모인 사회가 약속을 하는 것이리라. 거기엔 자유와 평등은 기본적인 베이스이다.

기본적인 베이스가 없는 이데올로기의 충돌과 우리의 의지가 아닌 조작되어진 열강의 파워게임이

우리나라를 이렇게 반토막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말이 굉장히 길어졌는데 여기까지가 이데올로기와 그에 따른 대칭축의 두사람을 생각해본 것이다.

위에서 길게 서술한 것은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집학적 관념과 그에 따른 개인의 선택 문제이리라.



이제는 좀 더 개인적인 인간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위의 것과 완전히 떨어질 수는 없지만)

흔히들 양심수라고 표현되어지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개인적인 삶을 억지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처음에 표현했듯 보는 내내 울었다고 했는데 난 이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과 그 가족을 보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스스로의 양심과 사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일 수가 없기에 그들의 가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종다리라는 양심수의 딸이 면회를 처음으로 온다(물론 자발적으로가 아닌 정부부처의 강권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만 괴롭히라고 한다. 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우리가 힘들고 고생해야 하냐고?

이제 곧 결혼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에게 피해입히고 싶냐고?

종다리는 시간이 지나면 이유를 알게 될거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내가 빨갱이 딸이라고 다른 애들이 떠밀 때 당신은 어디있었냐면서?

그러고 일어나는 딸의 등은 곱추가 되어 있었다.

결국 자신의 양심이 딸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나도 울었다. 이렇게 만든 무서운 이데올로기들이 싫어졌었다.

그들은 늘 고문을 당했고, 배고픔을 겪었고 낙이라고는 통일의 소식과

북조선이 자신을 구할 것이라는 희망이 전부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그래서 그들은 갇혀 있는 것이다.

단지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말한다. 전쟁중 급조된 국방경비법 위반이라는 날조된 법으로

어떻게 자신들을 40여년이나 가두고 있을 수 있냐고?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서두의 볼테르의 말을 인용했듯이 사상이 다르다고 탄압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글을 계속 적으려면 여기서 노선을 정해야 한다고 한다(내 친구의 충고라고나 할까? 뭐 그렇다)

그렇지만 솔직히 힘들다. 한국전쟁이라는 우리나라 최대최악의 비극으로 파생되어진

문제,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악몽 속에, 나는 어느 쪽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정해야 한다면 여기서는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볼테르의 말을 인정하고 찬성한다.


이데올로기 간의 충돌과 찬반으로 인하여 인간의 죽음이 파생되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전에도 언급했지만 종교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요즘이야 이데올로기 충돌의 냉전시대라기 보다는

새로운 종교전쟁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되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민족 갈등을 포함한)


글이 굉장히 길어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마무리는 지어야 하겠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권문제와 연관되어진 볼테르의 말에서 모든 것이 나타나 있다.

김선명은 통일이 되면 결혼하고 싶어했던 순수한 신념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겪었었던 모든 것들은 그를 70이 넘은 노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잊혀진 인물이다. 하지만 잊혀져서는 안되는 한국사의 치부를 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의미가 있다.

남북 문제를 다루는 여러 영화를 보면서 고민이 없고 성찰이 없어 아쉽다고 말하곤 했었다.

이 영화는 제대로 그 맥락을 짚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갈등으로 시작해서 갈등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복제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고 아쉬워진다. 물론 결론을 내라는 말은 아니다.

한국현대사가 갈등과 증오로 점철되어진 역사인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단지 주제와 소재의 깊이감에 비해 영화는 왠지 주눅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잘 못 판단하는 건 아닐까?

내가 편견때문에 잘 못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쨌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계속 되어야 한다.

이제 제대로 다루어야만 할 때이다.


생각 나는 대사가 있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를 고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대사였다.

같은 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왠지 후자가 가슴에 와 닿는다.

둘중에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나머지 하나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를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 밖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이기에.

Sep 3, 2006

리턴 (The Return, Vozvrashcheniye, 2003)

(Andrei Zvyagintsev)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60th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베니스 영화제 신인감독상
뭐지? 영상은 정말 장면장면이 말 그대로 예술이다. 그런데 뭐지?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를 않는다. 가장 의문은 그들이 다락방에서 찾은 사진과 마지막 차에서 찾은 사진에서의 아버지의 존재유무이다.차라리 두번째 사진이 없었으면 스토리는 편하게 이해할 수가 있지만.사진 한장으로 인하여 굉장히 헛갈리게 한다. 스토리는 그렇다 치고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도대체 뭔가? 그냥 영상이미지와 형식미가 전부인 영화인가?
다이빙을 하지 못한 이반은 어머니에게 구함을 받지만친구들에게 겁쟁이라 놀림을 받는다. 12년만의 아버지의 귀향.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리 기뻐하는 듯 하지 않다.이반, 안드레이는 아버지와 여행을 떠나게 된다.이반은 아버지에게 매사 반항적이다.(심할 정도로 싸가지가 없다.)아버지는 권위적이며 폭력도 불사한다. 낚시 여행은 뭔가를 찾기 위한 여정이 되어간다.약속시간에 돌아가지 않은 두형제와 아버지의 충돌은 결국 아버지의 죽음.아버지가 찾던 것은 무었이며, 마지막에서야 아빠를 외치는 두 형제는?
여러가지 이해가 안가지만 가장 먼저 이반의 캐릭터이다.겁쟁이에 마마보이기질까지 있는 이반은 왜 아버지에겐 그렇게 용감하게 대어드는가?아니면 어머니를 빼앗겼다는 상실감에서 비롯되어진 것인가? 실제로는 누구보다 아버지를 기다려온 이반의 끝없는 반항과 싸가지 없음은 도대체 왜인가?그리고 마지막에 보여지는 사진들은 과연 아버지가 찾았던것일까?그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까?아니면 진정한 상실의 확인일까?
영상미를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별로다.

Aug 17, 2006

靑の炎 푸른 불꽃 (Ao no hono-o) 2003


Ninomiya Kazunari - Making of The Blue Light

니노미야 카즈나리가 주연하는 평범한 소년의 살인이야기.

어머니, 여동생 단란한 세가족에 끼어든 이방인,
10년전에 이혼한 엄마의 남편, 여동생의 친아버지.
자신은 기억 못하지만 그 남자의 폭력에 당한 것 같다.
원초적인 증오와 현재를 지키려는 발버둥.
드디어 살인, 그 범행을 덮기 위한 또 다른 범행.
그리고는 끝이 난다.

간단한 줄거리 이미지의 나열이다.
개는 상상력이 없다 - 보고
개는 상상력이 있을수도 있다. - 정정.
좋아하는 것들의 나열.

그가 좋아하는 것들은 엄마의 요리, 경기용자전거, 여동생의 화난 얼굴. 톰웨이츠의 목소리,
에밀쿠스트리차의 영화 등등 참으로 소박한 것들이다.
소박한 것을 지키기 위한 치밀한 범죄. 알게 모르게 작용할 과거의 숨어 있는 트라우마.
그는 범죄에 대한 죄의식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들키지 않자 안도하기도 한다.
결국 도망갈 곳 이 없는 현실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결국 그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물건들에 가장 큰 아픔을 주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마지막 노리카가 눈물젖은 원망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소소하지만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은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많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앗아버리게 된다.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켜주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바로 저 너머에 있다. 조금만 가면 되는데, 우리는 그 잠깐의 거리를 짐작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는 것 내에서만 판단하려고 하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안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가 참 좋다. Pink Floyd의 The post war dream.
가사는 아래와 같다. 음악파일은 이
블로그에서 무단 캡춰.&^^

음악이 들리시지 않으면 미디어 플레이어를 설치 하세요.

Tell me true tell me why was jesus crucified
Is it for this that daddy died?
Was it for you? was it me?
Did I watch too much t.v.?
Is that a hint of accusation in your eyes?
If it wasnt for the nips
Being so good at building ships
The yards would still be open on the clyde
And it cant be much fun for them
Beneath the rising sun
With all their kids committing suicide
What have we done maggie what have we done
What have we done to england
Should we shout should we scream
what happened to the post war dream?
Oh maggie maggie what have we done?

Aug 14, 2006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

김기덕

윤회? 카르마, 업, 삶

다른 것보다 김기덕의 영화치고는 제작기간이 장난아니었겠다는 생각.

최소한 호수가 얼고 풀리는 시간은 지나야 했을테니.

삶이란 것에 대한 끝없는 반복의 사슬을 환타지로 풀어낸 것 같다.

의문을 가지고, 고민을 하며 갈등을 하고 마무리 짓는다.

언제던지 열리고 닫히는 문과 훤히 뚫린 벽은 인간의 관념일까나?

김기덕이 연기하는 줄 몰랐다. 의외의 재미였다.

Aug 8, 2006

오구

이윤택

강부자, 이재은

인기있었던 연극을 그 연출자가 영화로 옮겼다고 들었다.

일단 과장된 연기들은 굉장히 눈에 거슬렸다. 아마 거의 모든 배우가 연극무대 출신인것 같은데 연극에서의 연기와 영화에서의 연기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차라리 모든 배우가 연극적인 연기를 하던지 했어야지. 그것이 섞여버리면서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준다.

영화는 저승사자가 황노모를 찾아오면서 굿판을 벌이게 되고,
무당 집안의 딸 중 한명인 미연은 동네에서 집단 강간으로 인하여 애를 배게 되고 마을을 떠난다.
이러한 사연과 더불어 마을에 뿌리 깊었던 갈등과 더불어 굿판은 이어지고,
갈등의 해소를 이끌어낸다. 굿판은 장례로 이어지고 탄생으로 이어진다.

대강의 내용은 위와 같다. 하지만 그냥 단순 나열 일뿐이다.
굿이라면 대강 무당이 칼을 탄다던지,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로 기억했는데
이런 굿 모습은 색달랐다는 정도이다.

감동도 갈등도 결말도 그 모든 전개가 평이하기만 한 영화
강부자의 연기만이 인상적이었다.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 (偶然にも最惡な少年) 2003

조센진이 아닌 거의 바보인 간고꾸진(한국인)인 이치하라 하야토,
뭔가 머리에 문제가 있는 냉소주의 유미(나카시마 미카)
여기에 휩쓸리는 양아치 타노.

제목이 매력적이라서 보게 되었는데 보는 내내 엉뚱한 미소를 떠올리게 한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은 타노가 칼레 찔린채 난 죽은게 아니라고 하면서 시작
똑 같은 장면으로 끝나 버린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본 영화는 Go를 비롯하여 몇작품을 본 것 같다.
Go에서는 정체성의 문제와 시선의 문제 속에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결국은 삶은 다르지 않다. 네가 뭐라고 부르던 그 본질이 주는 느낌은 같다는 것이다.
호칭이나 형식에의 관습으로 오도되어질 수는 있지만 가치의 변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반면 이 영화는 어찌보면 무의미한 행동의 반복에 알수 없는 주인공의 기분에 따라서 나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바보최저 한국인이라는 것이 아니고, 유미나 타노가 그의 하카다행에 동행하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에 별 의미도 없다. 단지 한국인이라서 이지메를 당한 정도.

부모의 이혼으로 누나와 헤어진 주인공은 우연히 길에서의 재회 후 부적절한 관계로 발전하는데 거기에 어떤 고민도 갈등도 없다. 그러다 누나의 자살이후 그 시체를 탈취해서 그만의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영화의 전부이다.
여기에 유미와 타노의 인연이 더해지고 한국행 밀항선을 타기까지의 과정이다.

결국 카네시로가 죽었는지? 누나는 한국으로 가게 되었는지? 타노는 왜 하라다에게 죽었는지?
하는 의문은 많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추리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그러려니 하련다.
왜냐구? 영화자체가 추리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관객이 무슨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이다. 카네시로가 누나와 함께 한국으로 갔떤, 타노의 배신으로 인하여 죽었던 그건 의미가 없다.
왜냐구. 카네시로는 우연히도 최악인 소년이 되어버린 것이니까.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고, 복수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 죽으면서도 죽은게 아니란 사람도 있다. 그의 삶은 최악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최악이라는 모순적인 멍에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치하라와 미카의 대조적인 연기는 과장과 절제, 수다와 침묵등의 대비를 통하여 상대방의 캐릭터를 더욱 재미있게 하고 있다.

Jul 31, 2006

칠석의 여름 チルソクの夏2003

부산과 시모노세키의 정기육상대회에 얽힌 소중한 추억

이쿠코,마리,레이코등 4명의 육상선수들은 1977년 육상대회 참가차 부산을 방문하게 되고, 이쿠코는 안대호라는 한국선수와 만남을 가지게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는 한-일의 상황과 둘의 교제는 1년이라는 시간의 간격과 한-일이라는 공간의 차이을 뛰어넘어 계속되어진다. 그리고 4년후의 만남을 약속하지만,

이쿠코는 버블경제의 붕괴이후 개최되지못한 교류전을 성사시키며 위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25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두 사람.

부산을 배경으로 잠깐 나오는 장소들이 즐거웠고, 일본인이 한국인을 보는 단편적인 시각. 그러나 공감이 가는 시각도 좀 보이고, 부산에서의 장면은 즐거웠다. 부산사람과 사투리의 억셈은 말을 못 알아들어도 느낌은 같은가 보다. 그리고 팔짱끼고 다니는 한국여자들을 보고 전부 레즈인가 의심하면서 자신들도 팔짱을 끼게 되는 등. 여러 상황이 재미있었다.

두 사람 간의 사랑이 주 테마가 아니라 아련한 옛 소중한 추억이 시공간을 넘어서도 너무나 생생해지고 소중해지는 것을 느낄수 도 있음을 보여준다. 추억은 현실보다 더 생생하며 더 소중하다고, 그 추억이 세월에 묻히고 잊혀지더라도, 그 소중함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이상 아름다운 것은 없다. 뭐 그런 것 같다. 아마도 현실의 흑백과 과거의 컬러 화면은 그런 의도 인 것 같다.

무난하게 즐겁게 볼 수 있다. 나에게도 잊혀졌지만 너무나 소중한 떠올리고 싶은 추억들이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다. 그걸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 즐겁고 기쁜게 아닐까?

4명 소녀들의 노래 장면은 여러번 나오지만 그 의미가 각각 다 다르며, 극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안대호의 두번의 노래 장면 또한 괜찮았다.

Jun 26, 2006

Cafe.Lumiere


솔직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봤다. 보고 나서도 아무 생각이 없다. ㅜㅜ

포스터는 너무 밝게 나온 듯하긴 하지만 맘에 든다.. 포스터의 분위기와 영화는 전혀 별개.

약간의 지루함, 오즈 야스지로(동경이야기만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유명한 감독이란 정도만 안다) 기념 영화.

일상이 풍경이 되는 그곳 카페 뤼미에르. 글쎄. 일상이 풍경이 되면 뭔가 느껴야 하는데. 쩝.

영화 같지 않은 그냥 일상을 보았다. 이제 일상에서는 더 이상 감동을 받지 못하는 내가 되어버렸음을 느낀다.

일상- 평범한 삶의 아름다움을 언젠가부터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

Apr 26, 2006

Save the Green Planet 지구를 지켜라


감독 장준환 Director ; Jang Jun Hwan
주연 신하균 Cast : Sin Ha Gyun
솔직히 이 작품을 볼까 말까 조금 고민을 하다. 친구넘이 볼만 하다는 말에 보게 되었는데 생각 외로 괜찮은 느낌이다. SF라기에도 조금 그렇고 코믹SF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조금 그렇긴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 아니 참신한 응용에 꽤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물론 약간의 어거지 설정과 개연성에 있어서는 헛점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독특한 작품은 한국영화에 있어서 분명히 드물다는 느낌이다. 개인적인 아쉬움과 약간의 바램을 말하자면 이 작품의 끝부분에 나오는 우주인 씬이 없었다면 하는 생각이다. 그냥 강사장이 약간의 여운을 주면서 끝냈으면 어땠을까, 심리 스릴러 쪽으로 조금 더 강화했었으면 어땠을 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모 이런 생각은 작품이 마음에 들었기에 드는 생각이지. 최근에 본 몇몇 영화들에서는 그런 기대조차 들지 않는게 더욱 문제라는 생각이, 돈 무지 아깝다 저 스탶들을 데리고 영화 저렇게 만들면 스스로는 또 같이 만든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하는. 어디까지나 나의 주절거림일 뿐.
만약 보지 않았다면 개연성과 설정의 어거지를 귀엽게 봐줄 수 있다면 즐겁게 볼 수 있는 훌륭한 영화이다.

Apr 7, 2006

Beautiful Boxer 2003 Thai

what is more difficult being a woman or being a man?
it's hard being a man and it's difficult being a woman.
but the most difficult thing is
trying not to forget whom you really want to be.
가장 어려운 것은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어설픈 한국영화들 보다 100배는 나은 태국의 2003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