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My right to ravage myself 2003
전수일
정보석
추상미
수아
김영민
내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전수일이라는 이름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이름도 아니지만
몇번인가 친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화면의 구도와 질감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인 초반의 느낌때문인지
웬지 가라앉은 듯한 후반부는 지루하기 까지 하다.
아마 그 느낌은 삶과 죽음이란 경계를 건널것인지 아닌지의 혼란함을 주려고
한 의도라고 느끼고 있긴 하지만 영화를 볼 때는 고개가 갸웃해졌다.
거울을 통해서, 렌즈를 통해서, 창유리를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들과
그 상대방이 보여지는 많은 장면들은 S의 존재와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길 원하는 자아의 모습일 수도 있을 듯 하다.
도로, 길, 터널, 교각, 시골의 국도 등에서 끊임없이 질주해나가는 모습은
쉬기를 바라지만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또 선택에 의해서 쉴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도 하다.
마지막 도로의 질감의 변화는 초반부로 되돌아 간다.
혼돈과 어둠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일런지도.
위의 느낌은 영화를 얼핏 보고 느껴지는 것들만 러프하게 적어본 것이다.
S(정보석)이란 존재는 저승사자, 사탄, 메피스토텔레스 등 악마라는 존재의
다른 표현일 것이며, 또한 그 존재가 자신이라는 것을 의미한고 생각되어진다.
결국 이 영화는 현대판 저승사자의 이야기일것이다.
영화를 보면 몇개의 지문들이 나온다.
후반부의 것은 기억을 못하지만
초반에 나오던 인간이 신이되는 방법에 대한 지문은
이 영화의 함축일런지도
그 방법은 창작을 하는 것과 죽음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나온다.
내가 하는 일은 죽음을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주인공의 존재가 초현실적인 것이며 악마라고까지
느끼게 하는 것은 시간순서를 비틀어버림으로써
관객에게 착각을 유도하며 그런 느낌을 진짜로 믿어버리게끔 한다.
죽음을 이끌어주는 악마가 있다고 말이다.
S는 말한다.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지 지켜봤을 뿐이라고
나에겐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써,
인간이란 측면에서의 존재라면
그러한 권리는 있긴 하지만
제한적일 수 밖에 없으며
쉬운 것도 아닐 것이다.
스스로를 파괴한 다는 것은
관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기에 말이다.
일개인의 존재유무가 전체적 가치의 질량측면에선
어떤 차이를 일으킬 수가 없겠지만
거기에 관계라는 요인이 있다면
존재파괴의 권리 같은 것은 단순히 개인적이지만은
않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단순히 위의 말에 반대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위의 권리라는 말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이다.
하지만 자신을 파괴하게끔 한 요인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은
S일수도 자신일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묘사되듯이
개인이 느끼는 각자의 이유가
개인적이지만은 않음에서 유추해볼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영화는 의미를 담으려고 하지만
복잡해보이기만 하는 캐릭터들의 나열은
그것을 희석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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