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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5, 2006

바보선언 1983


이장호
이보희
김명곤

바보동칠이와 육덕이의 사회탐구이야기.
1980년대 초. 아마도 살기 참으로 힘들었을 시기였으리라.
문화예술활동은 더 말 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 속에 어떤 정치적 의미라던지, 메시지를 내재한다는 것은 투쟁이었을 것 같다.

한 때,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검열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의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
나 또한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난 한국에 왜 영화계의 거장이, 문화계의 거장이 드문가에 대한 의문을
잠시 가진 적도 있었었다. 물론 다른 나라라고 해서 우리나라보다 나았으리라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우리 나라 예술의 정체는 바로 검열이라는 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체가 아닌 급속퇴행을 초래한 그 검열은 정치권력의 수구의 한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바보선언을 보면서 영화보다는
그러한 상황을 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슬퍼서라고 해야겠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흐릿한 국회의사당 앞에 웃통을 벗은 두 바보가 아이의 국어교과서를 읽는 듯한
목소리를 통하여 고함치며 현실을 알리고 비판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바보나 아이들 빼고는 저항을
할 수가 없었었던 것이다. 오직 모자라고 어리석은 이들만이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슬픈 고백이었으리라.

이장호는 영화 초반부에 동칠에게 옷과 신발을 남기고 투신자살을 해버린다.
동칠은 이뻐보이는 여대생을 쫓아다닌다.
그리고 그녀를 가지기로 결심하고 택시운전사인 육덕과 모의를 한다.
그러나 거센 저항에 굴복하고 만다. 왜냐구? 그들은 바보이고 쪼다이기 때문이다.
짜증나는 애새끼의 목소리는 갑자기 여자의 힘이 세졌다고 한다.
그 당시 힘센 여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턱쭈가리 말이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스포츠밖에 없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그때는 우리나라 프로스포츠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힘든 현실을 피할 도피구가 필요햇고
정권은 프로야구를 이용한다. 사람들은 금방 거기에 열광해버린다.
이보희가 보여주는 창녀의 캐릭터는 참 다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기도 하다.
허영덩어리이기도 하고, 턱쭈가리의 아바타일 때도 있고, 상류층 퇴폐문화의 꽃으로서 희생되어지는
제물의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이영화의 모든 것은 처음 감독의 죽음 장면과 마지막 국회의사당에서 빡큐를 외치는 바보들의
소리없는 저항에서 다 표현된다고 여겨진다.

왜 바보선언일까? 바보라고 선언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세상인 것이다.
생각을 가지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보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당신이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솔직히 영화의 은유적 몇가지 표현의 외에 숨은 것들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시대 영화를 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아픔, 슬픔 그리고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시대는 창작의 과정이라기 보다는 의미와 표현의 은유와 은폐과정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영화자체로는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형식에서 감독의 비판의식 자체가 시작된다고 본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낙서와 유치한 그림들은 바로 영화 그 자체 표현의 외부적 제한에
따른 것임을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위의 생각들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할 여지가 전혀 없는 영화이다.
이런 직접적인 비판적 영화가 어떻게 당시 개봉되었는지가 의문이기도 하다.
이장호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가 계속 바보선언을 유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쉽다.

Aug 3, 2006

楢山節考, The Ballad of Narayama 1983

나라야마 부시코
이마무라 쇼헤이 - 1983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생존인가? 사회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대화를 한다고 해서 거기에 생존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짐승과 다른가?

일본중세의 생존이야기.
우리나라의 고려장과 비슷한 70세가 되면 아들이 부모를 나라야마의 신령에게 데려다 주는 의식.
생존이 가장 중요시되는 시대. 종족번식의 본능과 음식만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면서 생겨난 풍습이리라. 거기에 어떤 관습 또는 믿음으로서의 나라야마 가는 길은 일종의 인신공양이며 그들만의 결코 어길수 없는 최대의 가치일 것이다. 생존을 위한 살인이 정당화되는 시대에 그러한 수고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제사의식이며 단 하나 지켜야만 하는 유일 가치일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어떻게 보면 슬프지만 떠들석하기도 한 장례식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당시에 70세를 산다는 것은 꽤나 장수일 것이다.
제식으로서, 가치유지의 장치로써 그리고 잔치로써 나라야마 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버지도 살해한 타츠헤이가 어머니를 버리면서도 발길을 되돌리는 그 감정은 어떤 것일까?
결국은 나라야마를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단지 눈이 내린다는 것으로 그 의식에 어머니는 좋을꺼야, 운이 좋은거야 하고 위안할 수 밖에.

절벽에서 아버지를 버리는 친구의 모습과 나라야마에 버리고 내려가는 자신에게서 그는 어떤 차이점을 느꼈을까.

어떤 식으로던 사람은 살아간다.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편하기 위해서 종교, 믿음, 이데올로기, 관습, 법, 제도 등등을 만들고, 생성되는 것은 아닐까? 살아가는 방식의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인간이다. 그것을 내가 이해를 하던 못하던 말이다.

그렇다면 타츠헤이는 어떤 선택을 한건가?
제도에 순응한건가? 아니면 자신의 선택일까?

타츠헤이의 삶이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과 단 한치의 차이도 없다면 단순한 나의 과장일려나?
타츠헤이도 우리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젠장 인류는 석기시대 이후 문명만 발전해 나갈뿐, 진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멸종직전의 종인가 보다. 뭐 이것 저것 발전했고 지금 저러한 일은 없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럴까? 하고 되묻고 싶다. 생활이, 제도가, 인간존중이 점점 발전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맞아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과연 인간은 발전하고 있는가? 문화, 문명,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의 종 그 자체는 발전하고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이 아닌 정신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건가? 그것이 인간이 우월해지고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유일한 이유인데 그것이 정체 되어있다.

진화가 멈춘 종은 반드시 쇠퇴하고 멸종하게 되지 않는가?

말이 또 엉뚱한데로 흘러가는군. 쳇 이건 나의 병인가 보다.

인간은 진화를 게속 해야만 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생존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영화가 아닐까. 여겨진다.

글을 좀 다듬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냥 떠 오르는 데로 적다 보니. 영화감상이 아니라 허튼 소리가 잘 되어버린다. 이 블로그의 영화, 음악에 관한 것들은 결코 비평도 아니며, 분석하기 위한 글들도 아니다. 내가 봤던것, 들었던 것, 느꼈던 것들을 단순히 메모하는 것이다. 절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음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주지해야겠다. 이건 내 생각의 정리를 위한 낙서장일 뿐이다. 그래서 두서도 없고 개념도 왔다갔다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정리가 될까 하여,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