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31, 2006

魯氷花 Dull, ice flower

루빙화"사람들은 이 꽃을 '루빙화'라 불러요 아주 잠시 피었다가 지는 꽃인데 꽃이 시들면 그 걸 거름으로 쓴대요 차를 기르는 농부들이 차밭에 루빙화를 심고 금방 시들고 나면 그 꽃을 그대로 땅에 묻으면 차를 잘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된다고 해요 죽어서도 좋은 향기를 전해주는 것이죠"
영화의 처음에 나오는 말이다.죽은 시인의 사회와 같은 시기에 나왔으며그 이상의 감동을 준다는 평이 있길래 봤는데뭐 그렇지는 않았다.죽은 시인의 사회는 미스터 키팅(?)이 교육제도에 대한 대안적 방식과 학생과 선생님의 소통의 방식에 관한 영화라고기억하고 있는 정도이며 그것도 상세하지는 않다.
어느 산골마을에 도시에서 온 미술선생이 고아명이라는 학생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기존의 제도와 인식의 벽에 부딪혀서 실패를 하며 아명의 그림 한장을 가지고 떠나게 된다.아명은 엄마와 같은 선천적 병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게 되는데,그 이후 미술선생이 가지고 간 아명의 그림 한장이 세계대회 대상을 타게 되며,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지만 정작 가까운 사람과 그 천재성을 알고 있던 사람에게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인정치 않던 타자들만이찬양을 한다는 내용이다.
대충의 줄거리만 보더라도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와 그 조력자. 그리고 이들과반대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 사회 여러가지 상황들이 있을 것임을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있을 것이다. 또 이러한 천재들의 이야기(굿윌헌팅 등등)에서는 도식화된 구성이라고도 할 수있을 것이다.
루빙화라는 말의 뜻 그대로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솔직히 난 이 영화에서 내가 들었던 짧은 평들 처럼 큰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아명은 갑자기 죽어버리기엔 초반에 너무나 건강한 장난꾸러기 캐릭이어서 그 병이드러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천재성의 발현에 대한 표현이 좀 미약하지 않는가 생각이 많이 든다. 아명을 이해하는 누나와 미술선생의 캐릭터는 너무 정형화 되어 있고설득력이 약한 것도 사실이다. 미술선생은 단지 그의 그림 한장을 얻어가고 크레용을 주었을 뿐, 주인공과의 교감 또한 약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의깊게 살핀 부분은 아명보다는 미술선생이었다. 실력있는 미술선생이 시골학교로 오면서 학생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살려주려고 한다.하지만 기존 선생들의 몰이해에 따른 탄압(?)으로 그것이 불가능하자 그가 선택한 것은단지 떠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것은 세계대회 수상이라는 상장 하나 뿐이었다.마지막 대상수상을 축하하는 연설에서의 모습으로 알 수 있다. 그들이 바란 것은 개인의 천재성도, 예술도 아닌 단지 자그마한 사각형의 명예였을 뿐인 것이다.
획일화되고 창조성이 결여된 교육제도와 사회는 아주 느리게 진화할 수 밖에 없으며급격한 변화를 원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 과정을 무시한 성과만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이장의 연설에서 보면 그는 많은 것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한다. 결국 그것은 많은 상장을 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이 영화가 감동적인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도속의 소외자에 대한 우리의 자화상과 사회에서 인정 받는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말이다.
아름다웠을 그 강과 차밭의 자연은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지 않으며 영화를 이끌어 갔어야 할 미술선생과 누나는 힘이 조금 딸리고 있다.오직 고아명만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괜찮은 소화를 해냈다고 느낀다. 아. 누나의 경우에도 연기는 괜찮았다고 여긴다. 캐릭터의 힘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영화를 보고는 가장 처음에 루빙화에 대해 묘사한 처음의 글만 적으려고 했었다.저 말을 적고나니. 루빙화는 이 영화를 다 표현한 말이 아니란 생각에 글을 계속 적어나가게 되었다.

Aug 29, 2006

Silent Hill 2006

서바이벌 게임 Deliverance 1972


John Boorman
John BoightBurt Reynolds

deliverance 1 (…으로부터의) 구출, 구조; 해방, 석방. ∼ from sin 죄로부터의 해방.2 표명된 의견, 의견의 표명; 공식 견해; 진술; (배심의) 평결(評決).1. The act of delivering or the condition of being delivered.2. Rescue from bondage or danger.3. A publicly expressed opinion or judgment, such as the verdict of a jury.


영화제목의 뜻은 위와 같다. 한글제목은 서바이벌 게임이다. 나쁜 작명이라고 볼수는 없다. 댐 건설로 인하여 물에 잠기게 될 마을에 4명의 일행이 카누여행을 목적으로 온다.처음에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루(? 이름을 잘 못 들었다)와 마을 소년과의 기타 연주를 통한 소통을 들 수 있겠다. 곧 수몰 될 지역이긴 하지만 이 산골마을의 사람들은 뭔가 평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여하간 그들은 강의 상류를 찾아 카누트립을 시작한다. 이제 그들의 서바이벌 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다 길을 잃은 일행 중 두명은 이상한 사람 둘과 조우하고 그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생명이 위험할무렵 루이스(유일하게 잘 들린 이름)의 도움으로 구함을 받지만 한명의 생명을 빼았으면서 그들의 진정한 생존게임이 시작된다. 여기에서 정당방위일수도 있지만 생명을 빼앗은 것에 대해 죄책감과 남은생의 양심을 위하여 사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행이 있다. 루이스는 민주주의로 다수결을 주장하고결국 캐스팅 보트는 존보이트에게 넘어온다. 그는 갈등하지만 직접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당한 기억때문인지 사건을 은폐하기로 결정한다. 여기에서 영제의 모든 뜻이 다 동원될 수 있을 것이다. 위험으로 부터의 구출과 그 과정에 대한 의견과 자체적 평결을 민주적으로 자치적으로 해버린다. 그러나 일행의위기는 끝이 아니다. 그들은 난코스를 통과하면서 사건 은폐 이후 힘이 빠진 기타맨(?)이 물에 빠지며 일행은 물에 빠지게 된다. 한명은 중상을 당했고, 한명은 실종되었다. 어떻게던 탈출하려고 하지만 아까 죽인 사람의 일행이 근처에서 그들을 찾고 있다. 존 보이트는 사슴에 화살을 쏘지 못했듯이 사람에게도 화살을 재고는 쏘는 것을 망설인다. 반사적으로 활을 쏜 그는 살인을 하게 되고 이것 역시 은폐시키기로 한다. 이렇게 그들은 목적했던 마을로 내려오면서 실종된 일행의 시체를 찾고 그 역시 물 속에 빠트린다. 마을로 돌아온 그들은 실종된 3명에 대해 의심을 받기도 하지만 증거는 없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물속에 잠겨있는 진실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 뿐이다.
.. 저런 경우라면 정당방위가 성립되는 것 아닌가? 뭐 하여튼 성립이 안되는 모양이다.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이 영화는 인간의 본성과 어설픈 민주주의의 다수결을 비판한다. 민주주의가 인간 삶의 부분을 결정할 수는 있지만 그 본질적인 가치를 바꾸거나 이롭게 하는 담보가 아닌 것이다. 단지 살아가는 방식일뿐인데 이들은 그 작은 사회에서조차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의 여부와 잘잘못을 떠나서 다수결이라는이름의 또 다른 폭력은 소수자들에게 이 영화에서처럼 굴종과 복종을 강요하는 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가 효율적이긴 하지만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일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추악함은 결국 자연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지마 그들의 죄는 또 다른 인간의 죄악인 자연파괴를 통하여 은폐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주인공은 악몽만 꾸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댐의 건설로 인한 수몰이 은폐를 가능하게 할런지, 드러낼지는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한 두어번 더 봐야 할 듯. 비평가 정성일이 이 영화를 아는 사람만이 아는 그들만의 걸작이라고 평가한걸로 기억하고 있다. 솔직히 잘은 모르겠지만 어떤 미덕을 이 영화는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다. 무자막이라 세세한 내용의 파악을 위해서도 어차피 좀 더 봐야 한다.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예전에 재미있게 봤었는데. 스내치가 이 영화의 리메이커 버전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라고 말하곤 잊어버렸는데 다시 보게 되었다. 뭐 많은 캐릭터에 비슷한 전개긴 하지만 스내치가 이영화의 리메이커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가이 리치가 같은 내용을 배우만 바꿔서 했겠는가 하는 생각도 좀 있고. 뭐 이런건 중요한 건 아니고.
역시 재미있게 보았다. 그 때는 그냥 정신 없이 봤다면 이번에는 한가지 이야기에 다양한 캐릭터를 동원하여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는 굳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4명의 주 캐릭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단지 사건을 끌어가는 역할일뿐이다. 거의 모든 캐릭터가 그 4명 정도의 비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화가 전혀 난잡하지 않았다는게 정말 대단하다. 이에 비해 스내치는 확실히 중심축이 존재한다고 기억한다.
네 명의 양아치들은 돈을 모아서 간 크게도 독종 해리와 도박을 벌이지만 그의 속임수에 걸려 엄청난 돈을 갚아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참으로 우연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으며 그 흥망성쇠 조차 하나의 사건에서 확실히 보여준다. 사필귀정, 공수래 공수거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결국 모든 걸 챙긴 사람은 자기일만 열심히 한 사람이다. 영화가 끝나고 웃었다. ㅋㅋㅋㅋ영화중에 기억 나는 대사는 카탈로그를 던져 놓고 나오면서 하는 말 "it's been emotional"

Aug 28, 2006

United 93 2006

September 11, 2001

911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두 대의 민항기가 WTC에 부딪혀서 빌딩을 허물었으며 엄청난 사상자가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네대의 민항기가 납치되었으며, 나머지 두 대중 한대는 펜타곤에 충돌하였고, 나머지 하나는 원래의 목표에 도달치 못하고 추락한 것으로 알고 있다.(사실은 WTC 두대만 알고 있다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영화는 원래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United 93의 상황을 가상한 것이리라. 솔직히 실제인지 거짓인지는 모른다. loose change를 비롯하여 911의 진실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 되는 현실에서 말이다. 그러나 일단 그 모든 것을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United93의 상황에 대해 영화는 집중하고 있다. 왠지 어설퍼 보이는 아랍계 테러리스트들과 용감한 미국시민들의 모습과 죽음 앞에 친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ATC나 MCC같은 민,군 항공통제국의 허둥대는 모습과 정보부재의 모습은 얼핏 이해가 가면서도, 실제로 저럴까 하는 의문을 가진다. 이해가 간다는 것은 관제시스템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가지기에 저럴수가 있겠구나 하는 것이다. 또 의문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하고 시스템이나 공군요격시스템이 다를텐데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그건 미국이 워낙 크기 때문에 그 영공을 다 커버할수가 없을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여튼 극도의 공포상황에서 보여주는 자랑스런 미국시민의 모습은 미국의 아픈 상처에 대한 자위의 성격이 강할 것이다. 911은 미국에 아마도 엄청나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랑스런 미국으로,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의 자존심을 지켜야 할 것이다. 슈퍼맨이나, 스파이더 맨이 아닌 실제했을 영웅들을 만들어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비행기 속의 승무원이나 승객들은 자신들의 실낱같은 생존의 희망으로 인하여 저항을 했을 것이다. 물론 영화속의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다. 단지 실패한 테러를 그들의 공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억측이 아닐까?.

딴지라면, 어차피 그들은 실패와 성공에 관계 없이 생존하지 못했을 거라는 거다. 우리나라도 기본적으로 수도방위를 위한 요격시스템을 갖추고 있는데 미국이 그것이 없을까? 그런데 이 영화에선 무장요격기만 찾고 있으니 조금 이해가 안가기도 했다. 모 하여튼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일 영화다. 차라리 loose change를 보라.

이 영화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고 해서 911이 음모다라는 말이 아니다.솔직히 그에 대해서는 잘모르겠다. 다만 진실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그 배경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거다. 가끔 911이나 어떤 참사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모든 걸 떠나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의 생명이다. 모두가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이 현재의 시스템인것이다. 살아간다는 것 생명외에는 이데올로기, 체제, 명예, 재산 그 어느 것도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짧은 생각이다. 물론 목숨을 걸 수 있는 가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생명에 우선하지는 않는다.

Aug 27, 2006

공중정원 空中庭園 Kuchu.Teien.2005

海南鷄飯 Hainan Chicken Rice 2004

Kenneth Bi
Singapore

영화를 보던 중에 알았다. 예전에 본 영화라는 것을.
해남계반이라는 싱가폴의 대표요리 중 하나를 전문으로 하는 어머니와 세 아들의 이야기이다.
세 아들 중 장,차남은 게이이며 어머니는 그 때문에 걱정이 많다. 막내 레오 만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원하는 어머니. 그녀를 사랑하는 인근가게 아저씨의 도움으로 사빈이라는 프랑스 교환 학생을 집으로 들여서 막내의 관심을 여자쪽으로 돌리길 원한다. 그런데 이 사빈 역시 평범한 아이는 아니다. 하여튼 사빈과 레오는 친해지고 어머니는 안심을 하지만, 레오의 절친한 친구 "배트맨"이 싱가폴을 떠난 후 슬퍼하는 레오의 모습에서 두 형들의 전례를 아는 어머니는 절망하고, 남은 건 오직 해남계반 뿐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저씨는 오리볶음밥을 개발하여 승승장구하는 상황이라 더더욱 힘들다. 급기야 큰아들의 동성결혼 여파로 가족은 풍비박산이 나는데. 이제 남은 건 요리경연대회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 뿐이다. 자신과의 갈등으로 결혼식을 취소한 큰 아들이 기자들에게 곤경에 처한 것을 구하는 첸아줌마.
요리 경연대회에서 레오는 오리볶음밥을 요리하고 어머니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가족은 상대방을 인정함으로써 다시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뭐 줄거리가 부실하긴 하지만 대충 위와 같은 내용이다.
예전에 봤을 때는(자세히 보질 않았다) 일련의 홍콩요리 영화인줄 알았다.

이 영화에서는 동성애 당사자가 아니라, 그 가족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동성애나,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들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편견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산뜻하게 건드리고 있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동성애에 빠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 편견이나 기피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직 어머니만이 반대하고 힘들어한다. 아마도 그것은 해남계반이라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요리를 고수함으로 나타나는 전통적인 가치의 고수일 것이다. 게다 잠깐 언급되긴 하지만, 사람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꺼려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족번식의 본능에 위배되는 비생산적 행동이라고 느끼기 때문일지런지도 모르겠다. 동성애에 대해서 깊게 생각 해본 적이 없으니 이 부분은 넘어가야겠다. 단지 기본적으로 난 동성애에 대해서 약간은 꺼리는 입장이다. 그냥 편하지만은 않다는 말이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좀 꺼려진다. 하지만 나의 입장은 이런식이다. 동성애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지도 않으며, 특별하게 보지도 않는다.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일뿐이다. 그들이 자신의 사랑을 한다는데 다른 사람이 참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본다. 그들을 욕하거나, 이상하게 보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과 똑 같다. 그들이 성에 대한 정체성을 겪을 때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 또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본성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던 갈등하고 고민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결국 특별취급도, 혐오의 눈빛도 없다. 단지 약간 꺼려지는 감정은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이 영화에서는 솔직히 동성애 보다는 어머니가 겪어가는 여러가지 고민과 선택의 상황에서의 심리가 참으로 흥미로왔다. 지극한 모성애를 가지고 있으며, 전통을 고수하는 고집불통의 자기본위적 어머니가 겪어가는 자식들과, 변해가는 사회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이 영화에서 보았다.

당신의 자식이 게이일때 어떤 행동을 할것인가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를, 그건 겪어봐야 아는 거 아닌가? 어쨋던 나라면 아마 더 치열하게 싸우고 갈등하고 고민할 것 같다. 그것이 해피엔딩이던 아니던 관계없이 말이다.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정과 긍정은 어차피 해결책도 아니며 시간이 흐르면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는 것 아닌가? 뭐 그렇다.

적고 보니 영화내용에 대한 내 생각만 늘어놓은 것 같다. 영화는 솔직히 그냥 재미있게 볼만하다.

Aug 26, 2006

Zombie - Cranberries

Aug 25, 2006

12 Angry Men, 1957


시드니 루멧 감독의 데뷔작품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헨리 폰다....

존속살인사건의 평결을 맡게 된 12명의 배심원단의 평결과정을 그린 영화
누구나 유죄임을 인정하고 있는 사건에 대해 "데이비스(헨리폰다)"는 이의를
제기하며 이야기는 시작되고, 그들은 마치 법정의 검사와 변호사가 된 것 처럼
서로의 논리와 생각을 토론하고 다투는 과정 속에 11:1의 유죄 우세 입장에서
만장일치 무죄 평결을 이끌어내는 과정이다.

우리나라 법정은 어떤지 솔직히 잘은 모르지만 미국의 법체계는 판사, 검사, 변호사외에 배심원단이라는 유무죄를 평결하는 기구가 존재하고 있다. 미국 법정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검사와 변호사는 유무죄의 사실증명보다 배심원단의 생각을 움직이는데 집중함으로써 본질을 흐리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서 과연 저 시스템하에의 법집행이 제대로 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때가 있는데 이 영화는 그 부분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법체계나 미국외의 타 국가의 법체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거기에 대해서 논할만한 지식도 없다.

영화에서는 이미 모두가 단정지은 유죄를 한명의 배심원이 변호사처럼 증거를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자신의 편을 늘려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 자발적인 참여와 의심할 만한 증거들이 나오게 된다. 결국 점점 역전이 되어가는데 결국 처음 11;1은 1:11 이 되어 버린다. 여기서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결국 데이비스는 유일한 한표에서 열한표의 대표가 되지만 마찬가지로 1명의 의견을 설명치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전부의 논리와 맞지 않다는 점을 들어 그의 결정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유무죄만 바꼈을 뿐, 달라진 것은 무었인가? 일단 일급살인혐의 피고의 생명을 논외로 친다면(솔직히 논외로 할 수는 없다) 그들의 주장 역시 그들이 그렇게 생각할 뿐인 추측이 대부분인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결론일 뿐인 것이다.
어떻게 무슨 근거로 판단하고 평결하는가?

사법체계와 제도의 맹점을 비판하는 것외도,
12명이라는 소집단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과 면면 또한 재미있게 보았다.

NaNa

일본의 베스트셀러 순정(?)만화 "나나"를 영화화 했다. 야자와 아이라는 만화가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작가 이름은 잘 모르겟다. 만화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기에 전부터 보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잘 손이 안갔다. 아마도 그건 음악을 소재로 한 만화를 영상으로 얼마나 표현해낼까 하는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Beck"이라는 음악소재의 만화가 있는데 그 애니메이션도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를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beck이란 만화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 중의 하나다. 실제로 들리지 않는 만화속의 음악이 실체화 되었을 때의 실망감이 클것 같아서라고 말할 수 있겟다. 하여튼 나나는 보게 되었는데 캐릭터는 그런대로 잘 살아있는 것 같다. 만화가 완결된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의 부분까지만 극화했는데 나름대로 만화의 내용을 잘 따라 간것 같긴 하지만, 만화를 모르는 사람 같은 경우에는 내용이 좀 쌩뚱 맞을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음악은 별로 맘에 안들지만 배우로서 하치와 나나는 꽤 괜찮았던 것 같다.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정도로 말하고 싶다.

생각외로 좋았다는 말은 아닌것을 명백히 해야겠다. (솔직히 좋지는 않았으니)

두명의 나나가 사는 곳은 707호 (일어발음으로 nana maru nana로 하면 될런지는 모르겟지만)에 산다는 설정은 재미있었다.
도쿄에 살아가는 젊음들의 사랑과 방황의 이야기이다. 만화는 뒤에 가면서 접입가경으로 변해가서 손을 놓긴 했지만 여기의 내용까지는 충분히 재미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만화를 접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소무 (小武: Xiao Wu, 1997)

중국 105 분 개봉 1999.10.02
지아 장케

처음 볼 때 부터 엄청 어글리 한 배우들에 비디오로 찍은 듯한 화면,
솔직히 영화 같지도 안았다.

소무라는 나이들어가는 소매치기의 일상사이다.

소무가 있는 마을은 중국를 축소해 놓은 듯한 곳이다.
빠르게 성장해가는 신흥 부호가 있고,
철거되는 옛건물이 있으며,
이제 자본주의화가 일정 진행이 되면서 생기는 유흥문화들.
변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욕밖에 할 수 없는 주인공.
어쩌다 돈 좀 벌어서 삐삐로 기분내는데 덕분에 잡혀가는 신세.
마을에서 구경거리가 되고 마을 방송에도 나와서 오명을 자랑한다.

끝에 나오는 말로 봐서는 전문배우들이 아니라고 한다.
그냥 tv의 재현드라마를 보는 듯한 상황에 어색한 연기들.

뭔가 어색하게 돌아가고 겉도는 듯한 느낌은
아마 자본화가 진행이 되는 과정에서의 소외받은 중국인을 표현한 것 같다.

다 의도가 있는 영화찍기 이겠지만, 내가 좋아하지도 않고 좋아하고 싶지도 않은
스타일의 영화이다.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는 뭐냐고?
나도 잘 모른다. 그걸 찾고 있는 중이다.

하여튼 겉으로는 발전해가고 개방화의 길을 가고 있는 중국이지만,
그 폐해와 후유증도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 그정도만 느꼈다
.

아랑

송윤아 때문에 봤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그러나 추리하거나 생각하면 재미는 반감한다. 왜? 전혀 그럴 필요가 업기 때문이다.흥미 있을 뻔한 전개와 컨셉이긴 하지만나름대로 재미있게 보았다.위에 적어 놓은 말하고 틀리잖냐고? 맞다 틀리다!왜냐면.나는 이 스토리에서 귀신만 빠진 구성을 가진 작품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노하로 료코 주연의 일본 드라마 "unfair"이다.
처음에 귀신의 등장으로 인하여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후반부에 가서의 구성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심지어 어떤 건 장면 조차도 말이다.
이것이 표절인지 각색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알기론 언페어가 먼저 나온 걸로 알고 있다.
송윤아의 캐릭터는 시노하라 료코의 캐릭터에 비해서 생동감이 없으며 너무 밋밋하기만 하다. 송윤아라면 시노하라 료코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현기의 역할 역시 좀 뜬금 없다는 느낌에 뻔하게 느껴졌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런지는 모르겟지만, 시나리오가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겟지만,
구성의 탄탄함이 떨어진다.
어설픈 공포 추리 물을 본 느낌이다. 기대했던 송윤아도 여기서 너무 맥빠지게 나온다. ㅜㅜ
거기에다 언페어가 내 머리에서 오버랩되는 바람에 비교가 되기도 하고 엄청난 절하를 불러오게 하고 말았다.

靑少年 那咤 Teenage Norcha; Rebel of the neon god

1992 106분

차이밍량 감독의 데뷔작
감독이 누군지도 모르고 본 영화.(처음에 그랬단 말이다. 한자로 된 크레딧이 잘 안 보이더라)
별 기대 없이 보다 보니까 끝나버렸다.
norcha(나타)가 뭔지도 몰랐고, 얼떨떨하게 보다 보니 끝나 버렸다.
역류하는 하수관이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샤오강은 자신을 금쪽같이 여기는 엄마와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으며 뭔가 정신에 문제가 있는 놈이다. 결코 정상은 아닌 넘이다. 아체는 친구와 공중전화를 털고, 좀도둑질을 하며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양아치이다. 아퀘는 전화데이트를 통하여 원조교제를 하며, 이 년 역시 크게 생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의 접합점은 아무 것도 없다. 우연히 아체가 샤오강 아버지의 택시를 스치듯 지나가면 부순 사이드미러가 전부이다.
샤오강은 소심하고 덩치도 작고 내세울게 전혀 없다. 그저 아버지를 꺼려하고 엄마를 귀찮아 하며 이상한 짓을 가끔하는 그에게 사이드미러 이벤트는 어떤 결심을 하게 한다. 더 이상 아버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위대한 착각을 하고 마는 것 같다. 이제 그는 샤오강이 아니라, 스스로 나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전히 샤오강은 뻘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며, 아퀘와 실랑이를 하며 아핑과 좀 도둑질을 한다.
샤오강은 그들을 발견하고 응징을 결심한다. 나타는 서유기에서 손오공을 응징하려하다 실패하고 오히려 갇히는 신이며, 그의 아버지인 이정(탁탑천왕)을 가장 미워하며 대체적으로 여성성으로서 발현한다고 한다. 그의 사소하지만 신으로서의 권능을 보이려고 하는데 , 하는 짓거리가 너무 유치해서 말이 안나왔다. 그렇게 아체의 개같은 날의 하루는 시작된다. 오토바이는 만신창이에, 도둑질한 장물을 팔려고 왔는데 그 주인에게 찾아가질 않나. 태어나고 이런 뭐 같은 날은 모두에게 처음이다. 아체와 아퀘는 떠나고 싶지만 떠날 곳을 모른다, 단지 울며 서로 끌어안을 뿐, 샤오강 역시 갈 곳이 없다. 전화방에 칸칸이 틀어박혀서 들려오는 전화벨소리.....

솔직히 말하면 아직 호남호녀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본 것이라 그런지 굉장히 낯설고 어색했다. 애정만세를 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이런 스타일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 차이밍량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은 모르겠다. 에휴 어차피 자막확인차 한번 더 봐야 하니
보고 내용은 덧 붙일랜다. 위의 건 그냥 두고.

굳이 덧붙이고 할 건 없을 것 같다. 그냥 위의 느낌에 첨가하게 된건. 역시 몇몇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역류하는 하수도의 이미지는 영화가 주는 느낌 바로 그대로이다. 역류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 물속에 흐르는 빈 깡통처럼 같이 부유할 수 있을 뿐,

처음에 내리는 비와 영화 마지막에서 내리는 비는 뭔가 느낌이 많이 틀리다. 처음에 내렸던 비가 왠지 긴장감을 준다면 마지막에 내리는 비는, 같은 음악이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체념과 불안의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흘러가는 구름. 아마 역류하는 하수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볼수도 있다.

위의 것은 뭐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을 것 같고,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 나는 건, 여기에서 열리고 닫히는 문들에 대해서이다.

샤오강이 깨뜨려 버린 창문.
아체와 아퀘의 첫 만남인 화장실 잠금장치가 고장나 억지로 잡고 있는 문.
엘리베이터의 4층에서 저절로 열리는 문,
아체와 아핑이 좀도둑질을 하면서 억지로 따는 문.
샤오강이 부모의 대화를 엿듣는 살짝 열린 화장실의 문.
샤오강이 집에서 쫓겨나며 닫히는 문.
아체가 아퀘에게 닫아달라고 하는 자신의 방문.(아핑이 다쳐서 누워있다)
샤오강의 아버지가 살짝 열어두는 현관 문.
아체와 아퀘가 키스하며 떠나고 싶어하지만 어디로 갈지 몰라 할때의 덧문만 닫혀 있는 상태의 현관문.
샤오강이 들어간 전화방의 칸막이 문
샤오강이 나올 때 열려진 채 있는 전화방의 문.

영화를 보고 나서 가만 생각 해보니 위의 문이라는 이미지가 머리 속에 들어와 버렸다.
솔직히 물과 비가 주는 이미지에 비해서 약하게 보일런지도 모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문이라는 출입구란 것이 주는 이미지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

깨뜨려 버린 창문 같은 경우-샤오강의 어떤 소심하지만 잔인하고 결벽증이 있어보이는 성격의 표출이 아닌가 느껴진다.
화장실의 문은 그냥 둘의 만남 정도라, 크게 의미를 줄 필요 없겠지만, 잠금 장치가 고장난 문을 잡고 있는 상황과 더불어
역류하는 하수구의 이미지가 중복 강화 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뭐하나 제대로 된게 없다는)
엘리베이터의 문 역시 위의 이미지와 별반 다를 건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계속 나오는 문을 통하여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그 상황의 강조 또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진다.
문이란 건, 정확히 출입구를 말하는 거다, 들어오고 나올수 있고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위에 장황한 설명을 했지만 내가 주목한 건 결국은 거의 마지막에서 나오는 문들이다.
아버지가 살짝 열어둔 현관문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버지 만의 마음이다.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아체 집의 덧문은 밖은 보이지만 어디로 떠나야 할 지 모르는 그들의 갇혀 있다는 불안감을 나타내는 창살문이다.
전화방 칸막이 문들은 전화벨 소리와 더불어 샤오강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더욱 강조한다.
그리고 나올때 열려진 채 있는 전화방의 문을 보면서 아버지가 열어둔 그 문이 떠오른다.

위의 문에 관한 건 솔직히 좀 억지스럽긴 하다. 하지만 모든 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문, 샤오강의 문 을 비롯하여 이들 모두에게
문이 존재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 각자의 문을 생각 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차이밍량의 작품 또한 이것이 거의 처음 보는 것이다(애정만세는 기억 안남).
한 작품만 보고 그를 판단할 수도 없겠지만 아직은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회가 닿아 몇 작품 더 보게 되면 조금은 알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짧게 적을 마음이었는데 또 길기만 한 허접감상문이 된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이건 내 메모로그의 성격이 더 강한데 말이다.

나타-서유기나 봉신연의에 나오는 신들 중의 하나로써 서유기에는 탁탑천왕 이정의 셋째 아들로 나온다고 한다. 나타는 대체적으로 여성성으로써 발현하는 신인이라고도 한다.

최근 본 영화 몇 편

Silent Hill

참고 보기 어려워서 보다 때려치운 영화.
재미도 없고 말도 안되는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다.내러티브가 부족해도 좋다. 최소한 말도 안되는 행동들은 안 했으면 한다.

Wowchoten Hotel 有頂天ホテル

야쿠쇼 코지마츠 다카코카토리 신고시노하라 료코
위의 이름외에도 낯익은 일본배우들이 총출동한 영화연말,신년축하 파티를 계획하고 있는 고급호텔에. 비리 정치가, 저명한 수상자, 유명가수 등 각각의 사정을 가진 손님들과 그들을 맞는 호텔리어들의 하루를 재미있게 보여준다.영화의 내용이야 뭐 별다를 건 없을 것 같고,단지 다카코의 모습을 보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그 외의 배우들 얼굴을 보는 것이 즐거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의 여자가 부르는 노래는 은근히 끌린다.
아무 생각없이 다카코와 료코 보는 재미로 본 영화이다.

Stick It

킬링 타임으로 봤음.
레오타드 입은 체조선수들만 실컷 봤다.
스토리는 뭐 원래 이런 류가 별거 있나.
애들도 안 이쁘고
볼건 주인공 체조복 입고 돌아댕기는 거.
아 있다 초반에 자전거묘기가 제일 볼만 했다.

비단 구두

얼마전에 본 감우성 김수로 주연의 "간 큰 가족 " 과 기본적 컨셉은 비슷한 듯 "간 큰 가족" 도 재미있게 보지는 못했지만 비단구두는 솔직히 중심이 없다.어색한 캐릭터에 중구난방 이야기.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다보면 , 각각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또 중심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지?이북실향민으 고향찾기에 대한 이야기인지?아니면 깡패와 감독의 좌충우돌기인지? 어느것 하나 느끼지를 못했다.그리고 상황에 맞지 않는 그 어설픈 패러디란.
단지 감독역할을 맡은 사람은 봉준호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뿐.
여균동 감독 , 차라리 미인이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 관련이라던지? 남북관계에 대한 영화를 다룰 때는 조금 더 고민하고 진지하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떠한 시도도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그 실향민의 입장에서, 당사자의 입장에서 한번 쯤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고 들어갔다면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지 치매노인의 향수와 추억으로만 치부되어지는 과거사와 서바이벌로 퇴색되어버리는 625의 기억이 씁쓸하기만 하다. 쳇 이런 느낌은 또 다른 나의 편견이련가? 그래도 좀 더 진지한 접근을 바라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코미디적 영화가 못 건드릴 영역이란 말이 아니다. 제대로 파악하고 한국과 조선이란 교류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성찰이 있었으면 한다는 생각이다. 젠장.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 Combien.tu.m.aimes.2005.

How much do you love me?
스킵신공을 극도로 발휘한 영화모니카 벨루치의 가슴은 정말 예술이다.뭐 그정도.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정서? 전부가 이렇지는 않겠지만.우리와는 많이 틀린 듯여기서 나오는게 사랑인가 하는 의문?욕정아냐? 사랑과 욕정은 하나가 될 때 아름다운거다. 물론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다. 인간이니까? 하지만 흥정하지는 말았으면 한다.욕정은 흥정이 될 수도 있겠지.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묻는 표현이겠지만사랑도 흥정이 되는지 안되는 지 모르겠다. 내가 본건 모니카의 가슴 뿐이었다는게 문제다.

Aug 23, 2006

好男好女 Good men, good women 1995


아칭이라는 여자배우의 삶과 그녀의 극중 배역인 챵비유의 일생을 교차하면서 대만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후샤오시엔의 영화는 호흡이 너무 길다. 인내심 약한 내가 보기엔 조금 힘듦을 느꼈었다. 그러나 세번쯤 보고나서야 호흡이 길다고 느끼진 않는다. 이제 조금 이해가 간다고나 할까. 물론 허접하나마 영문자막을 한글로 바꾸면서 그 의미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게 정확하리라.

이 영화는 아칭의 죽은 애인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재와
흑백으로 묘사되어지는 치앙비유, 청하오뚱 부부의 일대기의 과거가 절묘하게 교차되고 있다.

영화 속 영화의 제목인 "호남호녀"는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차별적이고 구분될 수도 있는 영화 구조이긴 한데 두개의 호남호녀는 마치 한 인물의 현재와 과거를 보는 듯 했다. 치양비유는 실존인물이긴 하지만 아칭이 연기하는 배역으로서, 또 다른 주인공으로 나타나지만 그 두 개의 캐릭터는 결국 하나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두개의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현재와 과거의 대만을 묘사하면서 대만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칭의 삶과 교차되어지는 영화속 치앙비유는 몇가지 유사성과 나레이션으로 묘사되어지는 아칭의 또 다른 일기를 통하여 아칭이 보는 챵비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른 캐릭터임을 몇번이고 알려주지만, 여전히 아칭과 치앙비유를 같은 인물로서 인식하게끔 혼란을 주는 것 같다. 바로 그것이 감독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은 두개의 다른 모습으로 전체의 하나를 묘사하는 것 같이 느꼈다(하나 그리고 둘에서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칭은 아웨이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는 죽고 추억과 혼란 속에 자신이 부르는 노래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것이 바로 감독이 느끼는 대만의 현재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거기에 교차되어지는 챵비유의 삶은 과거의 슬픔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챵비유는 사회주의자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본토에 따라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반군활동을 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을 한 것이라 느껴진다.

대만도 우리나라 못지 않게 복잡한 곳인 것 같다.. 일찌기는 일본 식민지, 미 군정, 본토와의 이데올로기 갈등에 따른 중국과의 반목 그리고 반공투쟁의 최전선으로 어쩔 수 없이 기능하게 되어버리는 모든 복합적이고 누적된 상황들은 대만의 정체성 확립을 더욱 힘들게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나오는 228사건이 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어떤 저항운동으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보면 본토인과 대만인의 충돌로 보여지는 상황에 진실은 다른 것이다라고 나온다.
그것을 둘러싼 대만의 국민당정권에의 반대세력인 사회주의 세력은 너무 미약하기만 하다
한국전의 발발로 야기되는 동서냉전의 격화의 한 중심이 되어버린 대만의 상황은
그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대만은 영원히 바껴버린 운명 속에 지금도 표류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가?
영화에서 묘사되었듯이 뭔가를 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반공의 최전선에 서게 되는 역사적 흐름 속에 그들의 선택없이 모든 것이 영원히 바껴버린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여튼 중구난방으로 느낀 것들을 나열해보았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호남호녀에서 보여주는 두개의 면, 하나의 모습은 후샤오시엔이 보는 중국이 아닐까 생각 해본다. 본토와 섬으로 분리 되어 있는 그들의 상황에서 결국은 하나이고 둘 다 그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역사와 어떤 사건들로 인하여 인식치 못하는 현재를 과거에서 찾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뭐 그렇다는 거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이 떠올랐다. 위에 약간 수정을 하였는데, 순간 하나 그리고 둘의 감독도 후샤오시엔이라고 생각해버리는 멍청함이 발휘 되었었다. ㅜㅜ. 왜 이런 착각을 했을까? ^^)

아래는 영화를 보면서 맘에 들었던 몇 장면과 눈에 띈 장면들이다.

처음에 TV에 나오는 영화를 한참 보여주는데 낯이 익길래 생각해보니 오즈의 "맥추"인 것 같다. 역시 오즈는 그의 지향점인가 보다.

아칭이 아통을 따라 간 곳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갑자기 아웨이와 춤을 추는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아웨이는 총을 맞고 목숨을 잃게 된다. 여전히 아칭이 부르는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말이다. 이러한 점프컷(?)은 사소하게 넘어갈수도 있겟지만, 술에 취한 아칭의 노래가 계속 흐르는 가운데 아웨이와 춤을 추고 그가 죽는 것을 본다는 것은 아칭의 혼란된 심리를 제대로 묘사한 것이고 그것이 타이완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혼란을 비추는 것이 아닐까는 것을 그 컷에서 느꼈다. 물론 여기에 위에 잠깐 언급한 정치적, 지정학적, 역사적인 사건들과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인한 혼란이 기반한 것들이 녹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맘에 드는 장면이다.

아칭이 팩스로 온 자신의 일기와 말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퍼붓는 넋두리의 장면 또한 참 좋았다. 전화를 통해서 어느덧 정체불명의 상대방은 아웨이가 되어버린다. 제발 돌아와 달라고 사정을 하게 되는 장면에서의 묘사는 정말 대단하다. 일기와 전화에 대해 따져 묻던 아칭이 상대방을 아웨이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어이 할 수 없는 자신의 현재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오탕의 시신 앞에 지전을 불태우면서 읽혀지는 그의 편지는 담담하게 죽음을 맞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자신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면서. 그리고 소소한 가족들의 걱정과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왠지 모를 뭉클 함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과 끝의 시골의 길을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치앙비유 일행의 흑백화면은 너무도 잔잔하지만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힘을 느끼게 해 준다.

쳇 또 두서없이 글이 길어지기만 했는데 표현력이 딸리는 관계로 내가 느낀 것을 다 적지는 못한 것 같다.
하나그리고둘을 볼 때는 잘 몰랐는데, 후샤오시엔이 이제서야 대단하구나 하고 느껴버렸다.
솔직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너무 지루해서 중간에 보다 말았고, 다음 날 그 장면 부터 해서 다시 보았다.
그러다 자막확인 차 한 번 더 보게 되었는데,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번째 보고 나서야 이제 조금 이해를 하게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솔직히 보기 힘들었지만 세번 보고서야 재미를 느끼게 된 영화이다

Aug 22, 2006

Pay it Forward 2000

케빈스페이시 헬렌 헌트 할리 조엘 오스먼트



when someone does you a big favor, don't pay back PAY IT FORWARD.

단순히 보면 '도움주기(pay it forward를 자막에서 이렇게 번역해놓았다)'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세상.
세상은 이렇게 작은 것으로 변해나가는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수도 있겠다.

위의 영문장을 보면 "누군가 큰 호의를 베풀면 은헤를 갚으려 하지 말고, 은혜를 베풀어라"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겠다. 도움주기라는 왠지 딱딱한 말 보다는 은혜를 베풀어라라는 말이 내 맘에는 더 든다. 도움이란 건 그냥 줄수도 있는 것이며 갚아줄수도 있는 것이지만 은혜는 우리가 부모님의 은혜, 스승의 은혜, 신의 은혜 등을 표현할때 처럼 갚을 수 없는 가치의 것이며 오직 베풀수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중학교 1학년 첫날 사회수업에서 트레버는 유진(케빈스페이쉬)의 연례과정인 과제 하나를 받게 되며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에 관한 과제를 받게 된 그는 귀가길에 노숙자의 삶을 보고 그를 도우는 것을 시작으로 Pay it forward 라는 자신의 생각을 실처하려고 한다.
트레버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작은 생각은 라스베가스에서 LA로까지 번져 있었지만 스스로는 작은 그 무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작은 호의는 여기저기서 결실을 맺으며 그 스스로도 만족하는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그로 인해 매체인터뷰까지 하게되지만 친구를 괴롭히는 일단의 아이들을 말리다가 칼에 찔려 목숨을 잃고 만다. 마지막은 촛불 추도회로 마무리하며 찡함을 주기도 한다.

Sometimes the simplest idea makes the biggest difference.
가끔은 단순한 생각이 거대한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은혜를 갚지 말고 베풀어라는 카피와 함께 위의 내용 또한 결국은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하는 바였던 것 같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더불어 그런대로 볼만하다.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해 무숴워하고 피하려고만 한다. 조금만 용기를 내면 세상은 바뀔 것 같다는 생각.

그 단순한 것에 대한 어려움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극의 감동을 위해선지는 모르겠지만 이지메를 구하기 위한 행동에서 희생시키는 것은 결국 이게 쉬운 일도 아니며, 보상같은 건 전혀 없다. 그렇지만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에 실제 이러한 운동이 실현된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구? 그런 세상이 없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거부감. 현실에 대한 어려움등에서 인간은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PAY it Forward가 실현이 되는 세상이 되기를 모두 바라고는 있으리라 생각한다. 안된다고 미리 단정짓지 말고,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한번 시도해보는 용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영화를 보고 위와 같은 생각도 하게 되었지만, 결코 쉽지가 않다.

don't think of it, just pay it forward

시노비 (忍: Shinobi, 2005)

오다기리 죠
나카마 유키에

전국시대의 일본전란시기에 막부의 은밀한 칼로써 활동하던 시노비의 두 일족은 그 막강한 술법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계략에 의한 버림을 받게 되는데.

겐토스케와 오부로는 각 마을의 후계자로서 사랑을 하게 되지만, 막부의 시노비 척살의 계에 의해서 서로 목숨을 건 싸움을 하게 된다. 이 싸움을 막으려고 겐노스케는 노력을 하지만 뿌리깊은 시노비의 전통에 묶여 있는 일족들과 막부의 칼로서만 존재하던 그들의 타성은 스스로 오부로의 칼에 목숨을 끊고, 오부로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오부로는 스스로 능력의 근원인 눈을 포기함으로써 막부에게서 평화를 얻게 된다는, 조금은 어이없는 결말을 가진 영화이다.

영상도 볼만했고, 배우들도 괜찮았고 소재도 좋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영화가 평이하기만 하다.
그냥 정해진 줄거리에서 강조되는 것 하나 없이 갈등도 위기도 고민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나름대로 주목해 본 것은

시노비라 불리우는 일종의 특수집단에 묶여 있는 두 가문의 후계자 사이의 사랑이야기다.
당연 로미오와 줄리엣의 상황의 차용임에 분명하고, 괜찮은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애절하지도 않고 밋밋하게만 표현되어서, 극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공감이 가지 않는다.

술법을 가진 시노비들이 과거의 전통이나 관습에 너무나 얽매여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고 자랑스럽게 느끼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오부로의 마을을 구하기 위한 희생은 끝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스스로 지키고 발전시키는 형태가 아닌 주어진 것 속에서 스스로 단지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외에 그들은 무었을 원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차피 평화의 시대에 그들은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면 차라리 도피하거나 맞서 싸우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들의 문제는 스스로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다. 흐르는 시간의 굴레에 묶여 있고,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이 없기에 그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결국 구걸밖에 못하는 것이다. 켄노스케 역시 목숨을 포기함으로써 의미없는 싸움의 종식을 원하는 것이 전부이다.

사랑도 생존가치도 이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린다. 그들이 가진 시간과 관념의 굴레속에서는 단지 지나간 사랑의 추억과 망자들의 죽음을 슬퍼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이 슬프긴 하다.

초반부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들과 캐릭터의 독특함 그리고 이야기의 모든 흐름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이란 것에 대해 진정한 고민이 결여되면서 모든 걸 잃어버리는 느낌이다.

차라리 아예 액션 판타지로 갈려고 했으면 그쪽에 치중을 하던지, 사랑에 촛점을 두던지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오다기리 죠는 이 영화에서는 좀 많이 실망스러운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나카마 유키에는 그녀가 표현해야 할 사랑과 마을 사이의 갈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느낌이다.

뭐 그래도 비주얼 적인 부분에서는 재미있게 보았다.
쉬운주제가 전혀 아닌, 그것도 세가지 정도의 주제를 다 표현하려다 하나도 잡지 못했다.
사랑,
관념,(시노비로서의 삶, 막부와의 관계, 양 가문의 갈등 등에서 비롯되어지는)
그리고 생존이라는 부분을 슬쩍 여기저기 찔러본 듯한 느낌만 가진다.

복수는 나의 것 (復讐するは我にあり , 1979) Fukusho Suruwa Ware Ni Ari

Imamura Shohei
금기시 되는 거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영화.

에노키즈의 살인행각을 따라가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의 어린 시절 부터 유골이 뿌려지기까지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영화를 계속 보면서 에노키즈는 왜 이런 살인을 저지르고 일말의 반성도 없는 이유에 대해서 찾아보려고 했지만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드는 생각은 그것이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많은 캐릭터와 이야기가 전개되어 산만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내가 눈여겨 본 인물상은 그 중에 당연히 에노키즈를 포함한 그의 가족들과 하츠마츠의 모녀이다.
에노키즈의 살인은 어떤 동기도 없으며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죄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유없는 것이다.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으며 당당하기만 하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카톨릭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지만 핍박받는 종교인으로서 그들이 애정을 가지는 대상은 허울뿐인 하느님과 아버지는 며느리를,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이다. 며느리 카즈코가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원래의 사랑에 대한 실망과 반발에 기인한 대체적인 느낌을 가진다. 어머니는 더우기 카즈코와 남편을 보면서 소외감과 동시에 애정의 대상인 아들조차 이미 악마일 뿐이다. 이 부분은 아마 노인 문제에 대한 잠시의 언급일 수도 있겠다.

하츠마츠 모녀는 어찌 보면 더욱 복잡할 수도 있겠다. 구석진 작은 여관의 포주인 딸과 살인죄로 1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정사를 훔쳐보는 관음증과 경정의 도박만이 낙인 엄마. 더우기 딸은 어떤 난봉꾼의 첩으로서 살아가고 있으며, 엄마는 그 난봉꾼과의 화합만을 바라는 묘한 캐릭터이다. 그들은 그가 살인자인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나름대로 그를 끌어안는다. 에노키츠는 그들에게서 자신의 가족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정을 느끼게 되면서 혼란스러워 지고 이유없이 그들을 살인하고 그들의 재산을 처분한다. 하츠마츠 모녀는 사랑을 전혀 받지도 못하고 해본 적도 없는 듯이 보인다. 단지 그들은 남성우월적인 사회의 희생자처럼도 보인다. 거기에 전혀 반항하지 못하는 엄마, 그리고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까지 당하는 딸.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캐릭터들이다. 이 모녀에게서 한가지 더 말하고 싶은것은 할머니의 살인이다. 그녕의 살인은 자신의 표현으로는 죽이고 싶어서 죽였고 후련했다고 말을 한다. 그러면서 에노키츠에게 물어본다. 후련했냐고? 속이 풀렸냐고?

에노키츠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보여지는 것은 아버지의 배가 캐톨릭의 종교탄압을 통하여 군수물자로 징발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이다. 그는 몽둥이를 들고 그 군국주의의 상징처럼 보이는 하얀제복의 일본군 장교를 덮치지만 아버지는 보기에 비굴하기만 하다. 이 때부터 그의 이유없는 뻔뻔한 당당함은 시작되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반항은 끊임없이 계속되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경멸 그리고 느껴지지 않는 알 수 없는 애정인 것 같다. 그는 도피 생활전에는 그의 소년원 감옥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 처럼도 보여진다.

에노키츠는 아버지와 아내의 그 묘한 감정을 이미 눈치채고 있으며 오히려 그것을 조장까지 한다. 그에게 있어 아내와 자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지 그에게 존재하는 것은 어머니도 아니며 아버지에 대한 기대와 실망, 증오와 애정의 복합체인 이해하기 힘든 느낌뿐이다. 그는 그것을 다른 곳에 풀어버리려고 하지만 하츠마츠 할매의 대답에 전혀 후련하지 않고 속도 풀리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하츠마츠에서 2명을 죽인 이야기는 여러번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으며 도저히 알수가 없다고 말하는 형사의 대답에 자신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솔직히 난 대화가 가장 이해가 안 갔다. 내 보기에 다른 모든 살인은 그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는 무차별 살인일뿐이었다. 하지만 하츠마츠 모녀는 그에게 진정한 가족애를 느끼게 해준 사람이다. 할매는 그에게 쓴소리를 막 하지만 아마도 그것에서 자신의 어머니의 가 없는 애정에 불만을 느낀 그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모성으로서 느껴지지 않았을까? 아기를 가지고 싶어하는 딸은 그에게 아내에게서 느끼지 못한 사랑을 느끼고 뱃속에 있을 것 같은 아기에 대한 부정조차도 그에게 주었을 것 같다. 그렇다 이것은 그에게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애정넘치는 조합에는 아버지가 없다. 바로 그에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다. 뒤에 표현되긴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살의는 그가 유일하게 가진 진짜 살의이다. 그래서 하츠마츠에서 그는 3인을 죽였다고 표현한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줄거리에 대한 짐작과 유추는 대충 이정도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많은 부분이 빠졌고 내가 놓친 부분도 있겠지만.

위에서 내러티브와 관계된 나의 의문과 생각, 추측등을 주절거렸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다는 아니다.
내가 가장 먼저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금기의 총집합이다.(물론 일본이라는 나라라 강조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먼저 근친상간의 표현, 그것도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어찌보면 전혀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가장 금기시 되어질 그 관계에 대한 파괴이다. 물론 직접적인 것은 나오지 않지만 그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서로를 여하튼 사랑하고 있다.

에노키츠의 트라우마일 제복장교의 천황폐하를 위하여 배를 바치겠다는 식의 표현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가장 강도 깊은 비난이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천황을 그러한 상황에서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은 일본에서 있기 어려운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물론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몇번씩 강조 되어지는 폐하를 위하여라는 그 반복의 표현은 결코 찬양이 아닌 비꼼임을 알수 있지 않을까?)

일본 관부의 허술한 제도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기본이다. 연쇄 살인범이 이렇게 활개를 치고 계속 된 범행에 그들은 단지 수동적이고 그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 수 밖에 없는 그 멍청함은 영화 전체에 깔려 있어 언급조차 필요없다.

하츠마츠 모녀와 난봉꾼을 통한 여성에 대한 착취와 남성위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에노키츠는 죄의식 없는 살인광에 섹스홀릭이다. 그의 아내는 남편과 시아버지에 대한 애증을 통하여 성에 무너져버린다. 모녀 역시 관음증을 통한 성의 만족과 종족번식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에노키츠의 어머니는 성을 상실한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성적인 문제와 살인으로 표현되어지는 폭령성이 전체적으로 도배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하여서도 에노키츠의 동기와 죄의식의 상실은 얼핏 짐작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인간본성에 대한 의심과 혼란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각해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친구가 이마무라 쇼헤이는 천재인가? 라는 말을 한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군국주의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제도에 대한 일관적인 비판을 언급한 적 또한 있다. 먼저 천재인가? 물어본다면 잘 모르겠다. 그에게서 천재성을 느낀 적은 없다. 이제 몇작품을 본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 수십년의 간극 속에서 지켜지는 큰 줄기들이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 작품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 작품에서 조금씩 느껴진다. 시내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듯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여드러나는 것에서 친구가 말한 제도적인 비판을 이제는 느낀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일본에 대한 이마무라의 지극한 사랑에 의한 애증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 진정한 일본의 애국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그렇다고 나를 일본 빠돌이로 착각하지는 말도록). 말이 조금 옆으로 흘렀지만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그만의 일관성은 그를 천재로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천재라기 보다는 인류학 입문에서 인형의 음모를 하나하나 심어가는 그 완벽추구와 철저함이 그에게서 느낀 것이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아마 이마무라 쇼헤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이해하라.

이 영화의 마지막 몇 분은 나로 하여금 영상의 재생을 여러번 확인하게 만들었다. 그의 유골을 하나 하나 그리고 몽땅 던지는 화면에서의 프리즈 프레임(? 맞는지는 모르겠다)에서 나는 앞서 언급한 인류학입문의 수상가옥의 부유를 떠올렸다. 그 배는 어디로 갈지를 알수가 없고, 던져진 유골은 멈쳐버린다.
난 솔직히 이 연상에서 친구가 말한 천재인가 하는 말에 순간 긍정해버렸다. 위의 두장면에서 나는 정처없이 부유하는 일본과 우리 인간의 본성을 떠 올려버렸고 슬퍼졌고 반성했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번뜩이는 재기의 천재가 아니라 꾸준하지만 엉뚱하고 본질을 추구하는 천재인 것 같기도 하다. 뭐 그가 천재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그의 영화는 나를 즐겁게 하고 사고를 넓히면서 이런 허접한 감상이라도 길게 적게끔 하는 진정한 예술가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변명, 혹시나 이글을 우연히라도 읽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꼭 알았으면 한다. 내가 여기 블로그에 적는 글은 퇴고 거의 없음, 수정 거의 없음(틀린 사실은 고친다)임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러니까 글이 거칠고 논리가 떨어지며 논지가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대한 서글픈 내 부족함에 대한 변명을 이렇게 해본다.

ps 인류학 입문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어느 작품이 더 좋으냐? 아니 맘에 드느냐 묻는다면?
인류학 입문임을 밝힌다. 내가 본 모든 이마무라 쇼헤이의 작품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Aug 17, 2006

靑の炎 푸른 불꽃 (Ao no hono-o) 2003


Ninomiya Kazunari - Making of The Blue Light

니노미야 카즈나리가 주연하는 평범한 소년의 살인이야기.

어머니, 여동생 단란한 세가족에 끼어든 이방인,
10년전에 이혼한 엄마의 남편, 여동생의 친아버지.
자신은 기억 못하지만 그 남자의 폭력에 당한 것 같다.
원초적인 증오와 현재를 지키려는 발버둥.
드디어 살인, 그 범행을 덮기 위한 또 다른 범행.
그리고는 끝이 난다.

간단한 줄거리 이미지의 나열이다.
개는 상상력이 없다 - 보고
개는 상상력이 있을수도 있다. - 정정.
좋아하는 것들의 나열.

그가 좋아하는 것들은 엄마의 요리, 경기용자전거, 여동생의 화난 얼굴. 톰웨이츠의 목소리,
에밀쿠스트리차의 영화 등등 참으로 소박한 것들이다.
소박한 것을 지키기 위한 치밀한 범죄. 알게 모르게 작용할 과거의 숨어 있는 트라우마.
그는 범죄에 대한 죄의식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들키지 않자 안도하기도 한다.
결국 도망갈 곳 이 없는 현실에서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은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결국 그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물건들에 가장 큰 아픔을 주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마지막 노리카가 눈물젖은 원망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소소하지만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은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많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앗아버리게 된다.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지켜주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바로 저 너머에 있다. 조금만 가면 되는데, 우리는 그 잠깐의 거리를 짐작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는 것 내에서만 판단하려고 하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안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가 참 좋다. Pink Floyd의 The post war dream.
가사는 아래와 같다. 음악파일은 이
블로그에서 무단 캡춰.&^^

음악이 들리시지 않으면 미디어 플레이어를 설치 하세요.

Tell me true tell me why was jesus crucified
Is it for this that daddy died?
Was it for you? was it me?
Did I watch too much t.v.?
Is that a hint of accusation in your eyes?
If it wasnt for the nips
Being so good at building ships
The yards would still be open on the clyde
And it cant be much fun for them
Beneath the rising sun
With all their kids committing suicide
What have we done maggie what have we done
What have we done to england
Should we shout should we scream
what happened to the post war dream?
Oh maggie maggie what have we done?

Aug 16, 2006

[Book] 좀머씨 이야기

Patrick Suskind 파트릭 쥐스킨트

좀머씨 이야기를 4년만에야 읽게 되었다.
읽는데 걸린 시간이 4년이란게 아니라, 읽게 되기까지가 4년이 넘게 걸렸다는 말이다.

2002년 초에 누군가에게서 선물을 받고 읽어야지 하면서 좀처럼 못 읽었었다.
그 이후에는 좀 기피하는 책이 된 사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책을 안 읽을 수도 없는 것.
내가 궁금한 건 왜 이 책을 나에게 선물했을까이다.
나에게 책을 주면서 꼭 읽어봤으면 좋을것 같다라고 말했었다.

좀머씨는 하루 종일 걷는다.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사람들과 교류도 하지 않으며 계속 걷기만 한다.
주인공은 좀머씨가 아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어린꼬마가 청소년이 되어가는 그 와중의 추억의 한 부분이자 자신만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침묵의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제발 좀 내버려두시오"라는 말을 나라는 화자는 그 아픔과 슬픔에 동화된 적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좀머씨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나만이 알고 있다. 일단은 이렇게 이해를 했다.

글의 역자가 적은 말을 보면 이 소설은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표현했고, 좀머씨의 아픔을 2차대전의 피해자로써, 아니면 깊은 아픔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이 가능하다라고도 했다.

아름다운 추억이라, 좀머씨에 관한 이야기는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 아닌 것 같다.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한 순간 좀머씨의 이유모를 아픔을 이해하고 그 죽음을 방조한 것이 아름다운 건가? 솔직히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 아닌가? 좀머씨와 관련 없는 주인공의 일상은 누구나 겪을 수 있고 겪어왔던 미소를 머금게 하는 추억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미스퐁켈의 피아노 레슨, 텔러비젼에 얽힌 이야기들, 아버지의 경마에 관한 이야기, 어린 시절의 어렴푸한 이성에의 끌림과 그 기다림의 설레임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아름다우며 되새기고 싶은 추억들이다. 그런데 좀머씨를 떠올리는 주인공은 그 기억들이 아름다울까? 그렇지는 않으리라. 이해를 하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했지 않느냐? 그래서 아름답지 않느냐? 라고 생각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그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좀머씨의 불안하고 쫓기는 듯한 모습을 30미터 위 나뭇가지서 내려다 봄으로써 저건 고통이자 슬픔이며 한 없는 공포임을 알게 된 것일 뿐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주인공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아름다왔던 추억들과 더불어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은 걸어다니는 좀머씨가 아니라 좀머씨가 걸어다니게 되는 이유와 그 죽음이다. 고통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나라는 주인공은 앞으로 한발짝 나아가게 된 것이다.

아름답기만 한 어린 시절 추억의 이야기는 아니다. 아름답고도 슬픈 "나"만의 성장통을 추억처럼 풀어내는 고백이라고 느끼고 싶은 건 나의 억지일런지도 모르겠다. 좀머씨의 아픔을 상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더 슬퍼진다.

소설외적으로 궁금한 것에 다시 돌아가 보자. 왜 이 책을 나에게 선물했을까?
나에게 뭘 말하고 싶었을까? 물어볼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도 다행이기도 하다.
내가 좀머씨의 고통의 실체를 몰랐듯이, 내가 몰랐을 그 슬픔을 나는 보듬어주지 못한 것 같아 더 슬프다.

잘은 모르지만 뭔가 번역이 좀 미흡한 느낌을 받았다. 쳇 원서로 읽었어야 하는데. 독일어라 원서로 읽긴 힘들것 같아 포기.

kiss of the spider woman 1985



Hector Babenco

willam hurt
raul julia
sphia braga

게이인 몰리나는 감방동기인 발렌티노와의 생활중에 점점 그에게 빠져드는데.
발렌티노는 반체제 운동가로써 체포되었다. 그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몰리나를 이용하는 정부.
그들은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몰리나는 출감하여 그의 부탁을 틀어주려고 하지만
총에 맞아 죽고 만다.

간단한 내용이다. 물론 몰리나의 영화이야기, 거미여인이야기, 과거이야기, 발렌티노의 과거 등
여러가지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처음엔 성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라고 여겨졌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럼 정치적 이슈를 다룬 것인가? 솔직히 이건 그렇다 해도 잘 모르겠다. 브라질에 대해서 모르니.
그럼 남은 건? 한정된 공간에서 현실, 환상, 바램을 통한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내가 성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 다룬게 아니라고 생각한 건, 그것이 메인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20여년 전의 지금보다 덜 개방적인 사회에서는 충분히 이슈가 될 것이고 거기에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가 본건 2006년이다. 이미 이런 정도의 스토리에는 충분히 익숙하다는 것도 있을 것이고,
몰리나가 느끼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라기 보다는 사랑에 대한 혼란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는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스스로를 여자라고 여긴다. 그것은 남이 인정하던 하지 않던 문제가 아니며
오직 상대 남자에 달려 있는 것이고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퀴어라고 볼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랑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본다.

정치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솔직히 인지하지를 못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간단한 이유외에도 발렌티노가 정부의 반체제 운동가로써 누군가를 탈출시키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있다는 정도와 그를 이용해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정부세력이 있다는 정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자료를 찾아봐야 뭔가 생각을 할 수 있을 듯.

위 두가지 이야기를 버무려서 이루어 나가는 발렌티노와 몰리나의 사랑이야기이다
거미여인은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등장한다.
몰리나로써는 거미여인은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대상이며 자신을 투영하는 대리인이다.
발렌티노에게 거미여인은 처음엔 몰리나의 영화속 인물이었고, 몰리나이기도 하고 자신의 현실 속 사랑을 상징한다.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미여인은 그들의 사랑의 대상이며 동반자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거미줄이기도 하다.
결국 몰리나도 발렌티노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결국 거미여인이다. 거미여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었일까?

거미여인은 걸려들면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 속의 절대자이다. 벗어나는 길은 걸려들지 않는 방법외에는 없을 것이다.
뭔가 빠진 듯 하고 애매한데 아마 그것은 위의 정치적 이슈부분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검색을 해본후 보강하겠다.
무자막에 1채널만 나오는 오디오 덕분에 이해가 부족한 이유도 있으니 이것 역시 한번 더 봐야할. 젠장.

El Topo 1970


(Múm and El Topo) The ghost you draw on my back

Alexandro Jodorowsky

구세주 전설과 구도등의 상징과 기이한 텍스트들이 혼합되어 있는 이상한 영화.

솔직히 처음엔 재미있게 보고 있다가 끝에가서는 자고 있는 나를 보았다.

성스러운 피의 감독이라길래 보았는데 원래 기이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인가 보다.

사막을 돌아다니면서 4명의 상징적인 총잡이를 죽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컬트영화의 걸작이란 말도 있더라.

주연감독각본 1인 3역의 원맨쇼.

감상을 적기에는 벅찬 이미지와 기호의 범람으로 인하여 포기

Dead Man 1995

Dead Man in Imdb

Jim Jarmusch

Johny Depp

엔딩을 보고 든 생각- 이렇게 해서 카리브해로 간 윌리엄 브레이크는 캡틴 잭스패로우가 된 것이다.

담배에 관한 생각 - 금연 영화? --- 농담이다. 설마.

죽음에 관한 관조의 여정

Machine town으로 가는 기차의 차창밖 풍경은 끊임 없이 바뀐다.
- 잠깐 씩 보이는 풍경들과 승객들은 뭔가 현실과 상상이 혼재된 혼란을 보여준다.

살인과 Nobody와 함께 하는 도주
- 인간의 삶을 엿봄과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자각.

카누를 타고 떠나는 마지막 여행
- 남아있는 자들에 연민과 스스로에 대한 마감.

시인이자 화가였던 윌리엄블레이크와 동명이인인 빌.
다양한 경험을 가진 혼혈인디언 nobody.
그를 쫓는 킬러계의 살아있는 전설 콜.

블레이크에 죽음의 안식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서 인간의 가치추구는 무었을 위한 것일까? 를 생각케 해준다. 그들이 항상 찾는 담배는 무었을 위한 것일까? 여기에서 담배피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디킨슨의 재떨이에서 타고 있는 담배만 있을 뿐. 그것을 구하는 자에게만 가치있는 것.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이련가? 결국 모두가 죽고마는 이야기는 이런게 아닐까? 별 지랄을 하면 살아봐야 결국은 이렇다. 담배하나 챙겨가지 못한다. 결국 담배를 챙겨가는 것은 담배를 피지 않는 빌 뿐이었다. 그냥 줄거리만 나열해 보았다.

Theo Angelopoluous 'Taxidi sta Kithira,1984'

테오 앙겔로플로스 '시테라섬으로의 여행

잊혀진 자의 귀환.
잊혀진 갈등의 재현.
그는 잊혀지고 소속조차 없으며 모든 사람이 원하지 않는자이다.
그러나 그는 그만의 길을 고집한다.
그를 기다리고 끝까지 같이 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

하지만 그들이 있을 수 있는 곳은 공해상의 작은 부유물위일 뿐이다.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동유럽의 내전시 반군출신의 국외도피자의 귀환 정도 되는 것 같다.
(32년만에 소련에서 그리스에 돌아온 공산주의자라고 한다)
당연히 그로 인해서 그의 가족, 주위사람들을 많은 피해를 입었고 과거의 그를 이해는 하지만 현재에서까지 그를 용납할 수는 없다.
정부, 가족, 이웃 누구를 막론하고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여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와 이런 모든 상황과의 갭은 더욱 그만의 세계로 몰아넣을 수 밖에 없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망자는 자신의 의사를 새소리로 표현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과의 화해를 이룬다.
그들이 갈곳은 어디인가? 그들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생각을 해본다.

처음의 어떤 오디션 장면의 "나다"라는 대사의 반복과 감독인듯한 아들은 라벤더를 파는 묘한 느낌을 주는 노인을 무작정 쫓아간다.
쫓아간 곳은 어느 선착장, 뜬금 없이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린다. 배에서 내리면서 노인이 하는 말 "나다"
자신임을 알리는 그 말은 그가 할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말일 것이다. 그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밖에 없는 허탈함?
그들의 순례는 고향으로의 순례는 시작되며 점점 더 자신에게의 침잠과 주위와의 갈등은 그를 공해상의 작은 부유물로 몰아낼 수 밖에 없다.
할머니는 왜 같이 할 수 밖에 없을까? 아마도 그것 역시 할머니의 존재가치를 완성시키는, 그들의 존재를 하나로 완성시키는 의식이 아닐까?
뭐 이정도의 생각만 하기로 한다. 쉽지 않다.

처음에는 이산가족도 떠오르고, 미송환 국군포로를 떠올리기도 했고, 아마 있을지도 모를 미귀국 민주 투사들의 삶도 떠올려지기도하고 뭐 그렇다.
그들이 떠날 때 그대로의 고집과 성정을 가지고 돌아와서 똑 같이 행동하려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더구나 그사람이 아버지라면말이다.
이러한 단순상황에서 조금씩 조금씩 사고를 확장시키려고 해보았지만 그렇게 쉽지가 않고 이해가 어렵다. 아마 과거의 그들을 이해를 못하는 것이리라.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는 최근에 본 몇 작품들이 배를 타고 어딘가로 흘러가는 작품 둘이 떠오른다. 그 의미와 상황은 다 다르긴 하지만.
맥추에서의 마지막 혼례식신부의 작은 배가 가는 장면을 보는 두 노부부와 인류학 입문의 수상가옥이 정처없이 막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 보는 관객들이 하는 말, 그리고 이 영화에서 나오지는 않지만 그 부유물을 보고 있을 아들과 딸 그리고 노부부의 심정을 알고 싶어지는 내가 있다.

Aug 14, 2006

Psycho

Alfred Hitchcock - Psycho (re-release trailers)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지루하다
사건 발생이후 볼만했고
사건의 해결과정은 설명 잘 들었다.

보던 도중 샤워씬이 유명하단 말이 생각났다.(맞는지는 모르겠다)
브라이언 드팔마의 Dressed to kill이란 영화를 보면 여기에 대한 오마쥬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도 걸작이란 말을 많이 들어서 기대를 하고 봤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난 아직도 많이 부족한 가보다. 아마 연출이나 테크닉쪽인가?

이중인격, 인격간의 질투와 애정,
Psycho 제목 그대로다.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

김기덕

윤회? 카르마, 업, 삶

다른 것보다 김기덕의 영화치고는 제작기간이 장난아니었겠다는 생각.

최소한 호수가 얼고 풀리는 시간은 지나야 했을테니.

삶이란 것에 대한 끝없는 반복의 사슬을 환타지로 풀어낸 것 같다.

의문을 가지고, 고민을 하며 갈등을 하고 마무리 짓는다.

언제던지 열리고 닫히는 문과 훤히 뚫린 벽은 인간의 관념일까나?

김기덕이 연기하는 줄 몰랐다. 의외의 재미였다.

Clean

올리비에 아싸에스

장만옥
닉놀테
베아트리체 달.

아는 배우들 이름이 몇 있어서 쭈욱 적어봤다.
장만옥은 별로 안 늙었군.
닉놀테 절라 늙었다.
베아트리체 달. 베티블루는 이제 없다.

마약중독자의 어머니로서, 예술가로서의 갱생기 정도로 표현하면 될려나.

성격 더럽고, 뽕쟁이에 처세까지 엉망인 여자 진상이라고 표현하면 될려나.
그런 장만옥이 남편을 죽음으로 이끌고도 반성없이 약쟁이로서의 삶을 살다가.
모성애 때문에 약을 끊게 되며, 또한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이야기.

스토리로 봐서는 감동적일 수도 있는 이야긴데 영화에선 담담하게 표현한 것 같다.
좋게 보면 감정을 굉장히 절제해서 몰입을 원치 않고 관객의 입장으로서만 보게 하는 것일 거고,
다르게 보면 무미건조에 인물에 대한 몰입력이 떨어지며 스토리에 절정이 없다는 식으로 볼수도 있을 것 같다.

장만옥이 이 영화로 칸느여우주연상을 탓다던데, 엄청나게 연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 거 보면 이상하기도 하다. 실제인지는 모르겠지만 3개국어를 편하게 구사하는 건 부러웠다. ^^

장만옥의 나이도 꽤 될터인데 열혈남아에서의 장만옥과 조금의 차이밖에 못 느꼈다. 화장술의 승리인가? 영화보다는 장만옥을 보는 재미로 봤다. 처음의 찌질하고 어글리한 캐릭터에서 점차로 변해가는 모습, 그리고 뭔가를 성취한 후의 모습을 잘표혀낸 것 같다. 솔직히 외국애들은 표정으로 하는 연기가 강조되지 않을때에는 언어적인 차이로 인해 진짜 연기를 잘하는지를 느끼지 못하는게 사실이라. 많이 아쉽다. 그렇다고 그거 알고 싶다고 외국어를 전부 마스터하기엔 너무 힘들다...^^

Superman Returns

왜 돌아왔냐?

미국애들 돈이 많긴 많은 가보다? 여기에 2억불이나 쏟아 부었다니.

내가 할 말은 별로 없고 이 영화에 대한 말들 몇가지만 적어보련다.

손오공도 돌아왔다. 손오반도 태어났고 베지터는 어디에?

구세주 전설의 유치한 변형등등 꽤 많은 말들이 있었던 것 같다.

-맨류는 보통 어떤 오락적 볼거리위주의 재미를 추구하는데 그 기본에서

참 잘도 벗어난 것 같으며, 내용은 위의 말처럼 신의 귀환, 고난 그리고 부활이다.

수퍼맨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사회에 돌아 온 수퍼맨은? 셔터맨?

그러게 떠나긴 왜 떠났냐?

브라이언 싱어 x-men 3 찍는게 나았을 듯하다는 생각도 들고,

이제 -맨은 그만 찍었음 하는 생각이다.

미국의 이런 수퍼아저씨들은 왜 얼굴을 가리거나 숨기거나 그로 인해서 갈등
겪고 힘들면서까지 인류를 구하려고 열심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답답한지
하는 생각이 든다. 거의 비슷한 설정이 아닌가? 물론 전부 다 그렇진 않다.
하지만 기본적인 틀은 이런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상상력의 빈곤은 인류의 적이며, 문화의 적인 것 같다.
또 어김없이 돌아올 xmen batman spiderman 그리고 기타 맨들 너무 많다.
고독한 기타맨이나 올것이지. 젠장.

影武者Kagemusha 1980


影武者그림자 무사로 번역될 수 있는 아키라의 칸느 그랑프리 수상작
엄청난 규모를 보여주는 것 같다. 제작이 코폴라와 루카스이기도 하니까 뭐.

일본의 전국시대의 군주들은 각각의 그림자 무사를 가지고 있다.
신겐, 노부나가, 이에야스로 삼분되어 있는 듯한 양상의 전국시대에 신겐은 더욱 카리스마 있는 위치에 있는 듯 하다.
신겐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닮은 도둑을 그림자무사로서 훈련을 시키게 되고,
신겐의 죽음이후 그 유언과 제장들의 의도로 도둑은 그림자 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위와 같다.

그림자무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의 정체성의 혼란, 신겐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그를 위해 피흘리는 여러사람의 모습에서
조금씩 변해가게된다. 하지만 그 역할은 3년의 기한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개인으로서 자신의 존재 말살과 타 존재로서의 위장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스스로의 존재가치가 없게 됨으로서 그에게 남은 것은 만들어진 자아로써만 기능하게 되고, 그 존재의 완벽한 연기에 더욱 몰두하게 만들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위치에서 쫓겨나고서도 계속되어진 집착은 영화의 끝까지 계속된다.

그림자 무사의 존재가치는 군주가 존재할때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림자 무사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영화에서의 그림자 무사는 개인적인 혼란과 갈등은 무시되어지고 철저한 전쟁터 및 전국시대의 균형을 맞추는 추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그것은 원군주의 존재감의 비중도 있겠지만, 그에 더하여 숭배 및 정신적 지주로서의 상징적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
마치 종교의 교주나, 신의 위치에 있는 것 처럼, 그의 죽음이 알려지기 전과 후의 전쟁은 피아에 미치는 작용이 백팔십도 틀리게 전개된다.

신겐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치를 더해주는 지주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한 진실은 위정자들이 더욱 잘 파악하고 있으며, 그것을 이용한 것이 신겐과 그의 장수들이다.

낙마로 인한 어이없는 진실의 발각은 그림자 무사에게는 스스로의 존재 말살이며, 그의 군단에 있어서는 엄청난 박탈감과 근본제도의 붕괴이다.
아마도 어떠한 제도나 체제 내에서 아주 기본적이고 절대적으로 지켜져야할 원칙이 흔들린다면 그 시스템의 붕괴는 필연적이다.

카게무샤와 같은 눈속임으로는 진실을 끝까지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절대적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었일까?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는 가치들은 무었일까?
거기에 대해 고민해 본다. 그림자로써 결코 대치될 수 없는 원칙과 제도들이 우리에게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림자 무사는 현실에도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그것이 진짜인양 우리를 착각케 하고, 그 자신도 진짜인 줄 아는 것들.
한 번 생각 해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being John Malkovich


1999년 말 또는 2000년 초 쯤으로 기억하는데 IRC에서 캠스크리너판으로 받아서 봤었다..
이번에 Torrent로 다시 받아서 보게 되었는데 그 때는 단순히 흥미롭게 본 기억이라면 지금은 몇가지 생각할 점이 있어서 좋았다. 비평을 하는 것도 아니니 그 때 느꼈던 희미한 기억들과 지금 느꼈던 것들을 같이 생각해보기로 한다. 어차피 자막없이 본 건 똑 같은 상황이니 순전히 이건 기억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말코비치의 목소리와 용모는 정말 독특하고 개성이 넘친다.

꼭둑각시 인형술사인 크레익(존 쿠색)은 별 직업없이 길거리에서 꼭둑각시 공연을 하면서 로티(카메론 디아즈)에게 얹혀사는 입장이다. 직업을 구하던 중 빠른 손재주가 있는 사람을 구하는 곳에 지원하게 된다. 그 곳은 독특한 사연을 가진 7 1/2층 의 천장이 아주 낮은 회사이다.

회사에서 맥신(캐서린 키너)이라는 매력적인 여성을 만나게 되고 흠뻑 빠져버리게 되고 서류창고에서 기이하고 작은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는 영화이다.
말코비치의 눈으로 느껴지는 15분을 체험하게 된 크랙과 로티. 로티는 그 체험을 통하여 자신이 남자인 걸 자각하게 되고, 맥신과 서로 사랑에 빠져버린다. 맥신과 크렉은 그 포털을 사업화하고 로티와 맥신은 자신들의 밀회의 창구로 사용한다. 급기야 질투에 미친 크랙은 인형술사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여 말코비치의 몸을 지배하게 된다. 이에 절망한 로티는 이와 관련이 있는 박사를 찾아가게 되고 그 통로의 비밀과 진실을 알게 된다. 결국 크랙은 맥신때문에 말코비치의 몸을 포기하게 되고 불사를 꿈꾸는 비밀집단은 말코비치의 몸을 차지한다. 물론 맥신과 로티는 행복하게 잘 산다. 다음 세대의 불사의 그릇이 될 그들의 딸과 함께 말이다.

줄거리는 대충 위와 같다.
오래전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위의 내용을 잘못 알아들었다.
맥신과 로티의 사랑과 그 수수께끼 집단의 정체에 대해서 추측만 했었다
마지막의 그녀들의 아이에 대한 것도 전혀 이해를 못했었다.
그래서 영화가 좀 어렵군 그랬었다.(대사를 못 알아들었으니 뭐)

그런데 내용을 알게되니 젠장할 더 어렵군.

구구절절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위의 이해부분은 또 친구넘한테 한 소리 들을 것 같다.
^^ 이유는 그넘이 안다.

흥미로웠던 부분을 나열만 해 보면,

맥신과 로티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로티로 인해서 시작이 되는데 그녀는 말코비치의 눈으로 상황을 겪으면서 스스로가 남자인 것 같은 기분을 진진하게 느꼈고, 맥신을 보게 되자 사랑에 빠져버린다.
맥신을 사랑하게 먼저인지 남자임을 자각하는게 먼저인지 약간 헛갈리는데 자각이 먼저로 생각된다
그들의 사랑은 말코비치 러브달이라는 채널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맥신의 배신으로 로티의 복수가 시작된다. 결국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들만의 해피엔딩이긴 한데.
이 두캐릭터가 참 재미있는 것 같다. 맥신 참 속물적이고 계산이 빠른 이기녀이며, 로티 약간 멍해보이고 자신의 사랑에 목숨을 거는 타입이며 스스로를 남자로서 자각하는 역할이다.

크레그는 꼭둑각시 인형술사로서의 재주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그 자신이 술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은 마리오네트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 면을 보는 것 같다.

말코비치는 이 영화의 채널,, 그릇 세계를 상징하는 배경이다.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인 동시에 질시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는 우연한 만남을 통한 관계에서 자신의 이상상태을 발견하지만 결국은 뭔가를 담아내는 그릇의 역할을 수행하며 다음 용기를 선택하고 관리하는 불사집단의 전승자이기도 하다.

용기를 바꿔가며 영원한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불사집단은 인간의 진실로 추악한 면과 꿈을 상징하는 거 같기도 하다.

말코비치가 들어간 말코비치의 세계는 모든 것이 말코비치로 이루어져 있다.

맥신과 로티의 추격전의 무대는 말코비치의 성장사이다.

크랙이 지배한 말코비치의 세계는 크랙의 꿈이다. 여기에 말코비치는 과거로만 존재한다.

이것 저것 대충 나열을 해봤지만 그럼 말코비치는 이 영화에서 거의 모든 것이다.

말코비치는 무었을 상징하는 걸까?

처음에는 관음증의 도구로써, 가상러브체험도구, 욕망의 실현도구를 거쳐 불사의 전승용기로써 발전해나간다. 아마도 인간의 본능적인 탐욕의 추구와 꿈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삶은 반복되어지고 그들이 기록하는 특정용기의 삶은 인간의 역사와 진화의 과정인 것이다. 여기에 약간의 의문이 있다면 그 용기로써의 삶은 그들이 원하고 지켜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어디에 있는 가 하는 것이 또 머리를 아프게 한다. 왜 그들의 삶은 기록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 걸까? 왜 말코비치의 삶만을 기록하고 옮겨간 후에는 또 다른 용기의 삶만 기록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영원히 남의 삶을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전부인가? 아마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는게 아닐까? 마지막의 여자애가 물속을 헤엄치는 걸 오랫동안 보게 되었는데 왠지 섬뜩하고 무섭고 슬펐다.
맥신을 보는 아이의 시선은 순간 크랙의 시선이 되어버렸다.

횡설수설 적은 것 같다. 다음에 내 사고가 좀 더 성숙하게 된다면 다시 봐야 할 영화이다.
위의 생각은 version 0.01 beta이다.

The Seven Samurai 七人の侍 Shichinin no samurai, 1954

아키라의 작품 중 아마도 외국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원작을 보지 못했던 나도 말은 참 많이 들었으니 말이다.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민중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강구한다.
배고픈 사무라이 즉 로닌(낭인-주인이 없는 사무라이를 낭인이라고 한다더라)을 고용하여 산적들에게서 스스로를 구하려고 한다.

사무라이란 전혀 생산성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도 계급상만 높은 묘한 위치의 인간들이다.
쓸데없는 자부심만 강하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양반이란 위치와 비슷하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벌레도 못한 농민들에게 고용된다는 것은 계급과 계층의 역전 및 소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렵게 구한 칠인의 사무라이는 당연히 특이한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이다.
여기서 키쿠치요(미후네 토시로)의 경우에는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그는 농부의 아들이며, 사무라이를 꿈꾼다). 마을 사람들과 사무라이의 중간에 걸쳐 있다.

사무라이들은 이들을 훈련시키고 마을을 요새화하여 산적들의 습격에 대비한다.
각각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이들은 싸움을 겪으면서 농민과 사무라이는 일체감을 느낀다.
농민들이 숨겨놓은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이때이다.
그러나 많은 희생 후 남은 것은 메워질 수 없는 농민과 사무라이의 간극이다.

산적들을 물리친 후 남은 것은 결국 새로운 씨를 뿌리고 모를 내는 농민들 만의 축제이다.
그 축제 속에 사무라이는 절대 끼어들수 없다. 농민도 알고 사무라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남은 것은 네개의 큰 무덤 뿐.
결국 가장 잔인한 것은 민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들이 숨겨둔 무기를 꺼낼 때 추측할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은 사무라이를 이미 죽인적이 있다.
사람이 잔인해지고 거칠어질때는 보통 혼자일때 보다는 단체일 때 그러한 성격이 강해지는 것 같다.
혼자서는 할수 없는 일을 여럿이는 쉽게 해버리기도 하고 저질러버린다.
물론 좋은 경우일 때도 있지만 잘못 된 방향으로 발산될때는 그만큼 무서운 것도 없으리라.

인간의 이중성이란 것은 어디에서도 드러난다.
한가지 모습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 영화는 인간의 복잡한 이중성, 계급의 역전 등 살아남은 것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 그리고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Aug 12, 2006

2001 Space odyssey

오프닝의 3분여의 암흑은?

할 말이 없다 그냥 봤다.
Trailer


2001 A Space Odyssey Ending


Kubrick at 2001 opening

Kubrick at 2001 opening

우나기 うなぎ Unagi (1997)

Imaura Shohei
장어라는 제목을 가진 이마무라 쇼헤이의 두번째 칸느 그랑프리 작품.

본작품이 몇 안되어서 그런지 인류학입문에서의 마지막 장면의 떠내려가는 수상가옥과
이 영화에서의 어딘가를 향해 저어가는 배(아마도 혼례식)의 엔딩은 뭔가 의미심장하다.

1988년 여름 야마시타는 퇴근하는 전철안에서 부인의 불륜에 관한 편지를 받는다.
낚시 도중에 돌아온 야마시타는 부인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1996년 야마시타는 장어 한마리와 함께 가석방출소를 하게 된다.
보호관찰사인 스님을 통하여 이발소를 열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스님하고만 대화하고 있고 통제된 교도소와 지금의 생활에서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정많은 옆집 목수, UFO를 기다리는 엉뚱한 넘, 참견하기 좋아하는 날라리 등이 주위에 있다.
어느날 자살시도한 여자를 구하게 되고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다.
그를 위협하는 감옥동기, 여자를 위협하는 그녀의 애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자의 엄마.

이런 다양한 인물들 속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삶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흥미를 가지고 재미있게 보기도 했지만
이마무라 쇼헤이의 원숙함과 노련함이 드러난 영화라고 생각한다..
조금 따뜻해졌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엉뚱함은 여전하긴 하지만.

어항속의 장어,
결국은 풀어주는 주인공,

설명을 참 친절하게도 해준다는 점에서 약간의 의아함도 느꼈다.

영화를 볼 때는 참 생각이 많았는데 막상 보고나니 적을 말이 없다. 쩝.

Aug 11, 2006

라쇼몬 Rashomon 羅生門 1950

위키피디아의 라쇼몬
Kurosawa Akira


아키라의 작품은 이걸 두번째로 본다.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일본의 내가 아는 거장들은 참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아키라, 쇼헤이, 야스지로 몇작품 접해보지도 않은 채 이런 말 하는게 조금 우습긴 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천국과 지옥에서 처음 접한 아키라는 그 명성에 비해 많은 것을 느끼진 못했었다. 물론 재미있었고 좋은 작품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거장이라 이름 붙을 수 있는 감독들은 한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한작품 씩 이렇게 접할때마다 느끼는 것 같다. 쇼헤이가 그랬고, 아키라가 그렇다.

라쇼몬, 사무라이 영화인 것 같다는 느낌만 받고 보게 되었다. 구로자와 작품을 보지도 않은 채 그냥 사무라이 전문, 사극 전문의 대규모 영화전문일꺼란 잘 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언급한 위 감독들 중 아마 가장 대중과 호흡하기 편한 스타일일것 같기도 하다.

이것은 사무라이 영화라기 보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임과 동시에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역사왜곡에 대한 의문을 강력히 표현하는 영화라고 생각되어진다.

인간본성에 대한 것을 생각해보자.

하나의 살인사건이 있으며, 그 살인 사건을 이야기 하는 세사람이 있고, 당사자 세명이 있다.
비겁하지만 일반적인 소시민, 인간에 대한 불신과 믿음속의 갈등, 원초적 이기심의 당위성.
복잡하긴 하지만 위와 같은 입장을 가진 세사람의 대화를 통하여 다 무너져가는 라생문(羅生門) 밑에서
비를 피하며 사건의 실체가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강도, 아내, 남편 이 세명의 진술을 통하여 살인사건의 의혹은 풀어지기도 하고 증폭되기도 한다.
각자의 입장과 생각에 따른 자기 변명은 생사를 불문하고 자신에 유리한 쪽으로 이야기들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가? 단 한가지의 진실은 "남편"이 죽었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죽음에 대해 자신이 왜곡 각색한 이야기들은 그들의 입을 통하여 사실로 포장되어진다. 결국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왜 관청에서 관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증인과 피고들의 모습만 보여지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것일까?
일단은 관리가 나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관리는 바로 우리 관객이며 그들의 죄와 벌을 이끌어 낼수 있는것도 관객이기에, 판관의 모습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건 관객에게 구로자와가 묻고 있는 방식으로 보인다. 한가지 진실 세가지 왜곡 그리고 객관적 사실 하나로 나타나는 이 사건은 인간의 추함과 비겁함에 대한 고백이며 자아비판이다. 인간은 그렇게 이기적이며, 정직하지 않고 모두들 각자의 변명을 항상 가지고 있는 추악함이라고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기대도 어떤 절대적 사실 앞에서는 흔들릴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기의 옷과 장신구 마저 강탈해가는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어떤 절망을 암시한다. 물론 그 아기는 회개와 반성 그리고 믿음의 회복등이 가능한 기호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라생문이란 상징적인 제목에서의 아기의 울음 소리는 아키라의 절망속에서도 피어날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이런 희망이 있으니 살만하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란 것이 있어야 희망도 생긴다는 것이다. 어떻게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기의 울음소리를 통하여 강조하고 있다. 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 살려주세요, 같이 살아갑시다. 우리 살아있다니까? 그런 말로 믿고 싶다.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 역시 위에 언급한, 사실 하나 변명 셋 입장 셋 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사실로 믿는 것들은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닌 이상 간접적이고 가공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가공이 아닌 주관적 가공을 거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모여서 우리에게 전승되는 것들이 역사이며 전통이다. 이 영화에서와 같다. 과연 어떤 말을 믿을 것인가? 나중에 나뭇꾼이 말한 진실은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고 있으며,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국 우리가 판관의 입장에 있다면 나뭇꾼의 이기적인 생각의 진술 밖에 들을 수 없으며 세개의 변명들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사실에 대한 가공(왜곡)과 어떤 선택들의 만남이며 집합인 것이다. 즉 우리에게 유리한 것들만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1950년이면 일본은 2차 대전 패전 이후의 힘든 시기이며, 한국전의 특수를 누리기 전후일것이다. 또 패전이라는 굴레에서 그들의 삶에 대한 당위성을 정립해야 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 시기에 이러한 살인사건에 기초한 인간 본성의 변명들을 기술한 것은 일본의 당시 상황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의 전후 처리 절차나 입장에 대한 엄정한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영화기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강도가 나무를 헤쳐가면서 뛰어가는 장면들은 마치 왕가위를 보는 것 같았으며, 남펴이 죽는 같은 장소에서의 상황만 조금씩 가공되어진 같은 장면들은 변명에 의한 상황의 비틀림을 인물의 배치, 보는 위치등이 적절하게 바뀌면서 그 긴장감, 궁금함을 계속 유지 심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이다.

라쇼몬에서의 강상황과 대사들은 정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볼때는 이거 뭔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영화가 결말으로 가면서 그 모든 것들이 정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 의문이 다 풀려버리는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국과 지옥에서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 연기, 상황, 배경, 대사 그 모든 것들이 끝으로 가면서 완벽해져 버린다고나 할까 뭐 그렇다는 말이다.
잘 모르는 말은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이제 결말을 이야기하자면, 난 이런 결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바랬떤 결말은 나뭇꾼 또한 아기에게서 뭔가를 취하고 도망가버리는 것이었다.
사람이 너무 삭막한거 아냐? 라고 물으면 - 나 삭막해 라고 대답하련다.
이왕 희망을 주려고 했으면
스님이 아기를 데려가면서 그래도 살아야지.
이제 너에게 희망을 어쩌는 식으로를 바랫다는 말이다.^^

아키라는 정말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도 믿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천국과 지옥에서도 그 애정을 얼핏 느꼈지만, 아키라는 내가 본 두개의 영화에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가치를, 인간이라는 존재를 삶속에서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믿는다는 느낌을 가졌다. 쳇 두편 보고 많이도 아는 척 하는 것 같아 좀 쪽 팔린다. 그런거야 앞으로 좀 더 보고 생각하면 될일이고. 이만 마무리 지을랜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내가 본 두 작품은 일단 재미있다. 결코 지루하지 않으며 보여주지 않는 것들에 대한 명백한 의도를 통해서 관객을 몰입시키기도 하고, 그 간격을 벌리기도 하는 등 정말 연출에 있어서는 완벽하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련가??

아파트 2006

안병기

공포영화는 일단 무서워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럼 문제가 어딘가 있다는 말이겠지.

인간들의 호의는 언제던 변이되어 이유없는 악의가 된다.
그 악의는 증오를 잉태케하고 그 핏빛은 끊임없이 전승되어
윤회되는 것이다. 그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다.
비록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뭐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고소영의 캐릭터 자체의 문제와 더불어 여전히 발전없는 그 연기는
공포를 아예 없어버린다.

주민들의 악의가 잉태되는 과정에서 설명이 조금 부족한듯.
그 상황이 상세하게 설명되긴 하지만 그걸론 부족한 듯.
고소영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그냥 당해야만 하는 건가?

그냥 방관자 적인 관찰자적인 입장에서는 공포를 느끼기 힘들다.
아마도 그것이 무섭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결국 고소영의 캐릭터는 영화를 관통하며 헛짓거리를 한 것 아닌가?
아무도 구하지 못하며 자신조차도 구하지 못한다.

차라리 식상한 전개이긴 하지만 고소영이 귀신이라던지?
휠체어 소녀의 죽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던지?
학대과정조차도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만 했다면?
뭐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강적 2006

박중훈, 천정명.

이 영화에서처럼 주조연을 막론하고 연기가 한결같이 못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이다
박중훈은 예전에는 잘한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오랜만에 본 그의 연기는 그동안의 연륜이 전혀 없다.
천정명 나름대로 선방했다. 그게 전부라서 문제이다.
나머지는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다.

누가 경찰이고 깡패인지 모호한 캐릭터의 설정은 뭔가를 노린 것 같기도 하다.
살인, 체포, 탈주, 아픈아들, 고아원. 자선가의 탈을 쓰고 있는 깡패.
너무 다양한 인물을 그리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깡패들에 대한 시각과 경찰에 대한 시각에 아무런 논점이 없다.
단지 차이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한건가?
그렇다면 왜 일방적으로 경찰만 그것도 하부경찰만 까대는가?
멍청하고 무식하게 표현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사건의 전개와 개연성을 무시하고서라도 캐릭터를 강조하거나 약화시킬려고 할때는
뭔가 의도가 있어야 한다. 여기 있는 어떤 캐릭터에도 고민은 없다. 아니 상황적 고민은 있다.
하지만 몰개성화 된 캐릭터의 상황적인 위기나 갈등은 혼란만 가져올 뿐이다.
설령 그게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어야 한다.
결국 살아남는 건 그렇게 열심히 까대던 짭새들 뿐이다.
그리고 그 슈퍼맨급 대머리는 도대체 뭔가? 황당할 뿐이다.

근래 가족의 탄생, 구타유발자들로 우리나라 영화에 대한 관심이 좀 높아지고 있었는데
제대로 찬물을 끼얹는다. 아니 현실을 알게 해준 점은 참 고맙게 생각한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도 꽤 있는 걸로 안다. 재미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뭔가 생각이 부족하다. 캐릭터, 스토리, 화면 그 어떤 구석에서도
어설픈 치기만 보일 뿐 상상력이 없다.

Aug 8, 2006

psicotaxi : Juan Carlos Fresnadillo

천국과 지옥 天國と地獄 / Heaven and Hell (1963)

이 영화가 걸작이라고 불리우는 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뭐 연출력을 보여준 거라고 한다)
굉장히 짜증나는 진행 구조를 가지고 있다.
냉정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곤도가 그런 바보 같은 결정을 하는 이유를 일단 이해못하겠다.
전반부의 유괴와 관련하여 아이를 구하기까지의 스토리와 후반부 범인을 잡기 위한 경찰의 노력이라는 두부분으로 영화는 극명하게 나누어진다. 혼자 이렇게 상상도 했었다. 이건 곤도의 자작극일거야. 스토리도 그렇게 흘러가잖아. 곤도와 다케우치가 만나는 장면에서는 확신까지 했었는데 아니었다. 다케우치가 곤도의 집을 바라보면서 생기게 된 이유없는 증오가 원인이었으며 곤도는 끝까지 착한 역으로만 나온다. 젠장. 이건 아니잖아. 너무 뻔해서 추리하는 재미가 없잖아. 뭐 곤도가 범인이었다고 해도 아마 똑 같은 말은 했겠지만.

다케우치 역을 맡은 배우의 젊은 시절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담포포와 Go 그리고 일련의 일본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나이가 어느 정도 들거나 노인의 역할이었는데 젊은 그의 모습도 재미있었다.

아키라의 연출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훌륭한 영화일런지도 모르겟다.
하지만 이건 하나의 영화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연결될 뿐 전혀 다른 영화이다.
전반부가 곤도가 겪는 자신의 이익과 양심이라는 부분에 갈등을 맞춘 데 비해서
후반부는 그 심리적인 갈등 보다는 오히려 현대적 수사물인 요즘의 CSI에 가깝게 보인다.
중반부에 이미 범인을 노출시킨 것은 오히려 진짜 범인일까? 하는 의문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반부의 그 탁월했던 심리 연출에 비해 후반부는 심리보다는 사회적인 여론과 개인의 이익 또는 증오의 대결구도로 이끌어지고 있다고 여겨진다. 결국 승리한 건 증오, 여론, 이익, 양심 그 어떤 것도 승리하지 못하는결과를 보이고 있다.
천국과 지옥 high and low로 상징되어지는 빈부격차에서의 박탈감은 증오로 이어지고 그것의 실행과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곤도와 다케우치의 면회장면에서의 대화는 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케우치가 사형을 당한 진정한 이유는 그의 죄때문일까? 그의 가난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사회의 결정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지옥에 있다고 여기고 있으며, 곤도도 초반부 부인에게 하는 말로 봐서는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부의 중요성을 알면 상실이 될때는 지옥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다케우치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천국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음으로써 결국은 좋은신을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바램을 성취해나간다. 그의 선택이 그를 진짜 천국으로 이끈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다케우치는 그런 천국을 파괴하고 행복한 사람의 파국을 보기를 원한다. 그는 선택을 잘 못 함으로써 자신만의 지옥이 아니라 진정한 지옥으로 가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콘도가 행복한지는 모르겠다.다케우치가 불행한지도 모르겠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선택에 있어서 만족을 얼마나 하는 것, 힘들다면 스스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서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편을 보면 두개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도 둘다 재미있게 볼수 있다는 점에서는 참 매력적이지만, 완전 중심축이 바뀌는 탓으로 두번째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를 거의 처음 본 셈인데 근래 본 세명의 일본의 거장들은 각각 너무나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다음엔 미조구치 겐지를 한번 접해봐야겟다.

착하게 살자. 그런 말 하고 싶지는 않다. 착하게 살면 힘들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 너무 착할뿐이다.
이 영화의 캐릭터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은 곤도의 비서격이었던 사람의 처세이다..

Series 7 : the contender

contender는 리얼리티 쇼의 형식을 지닌 살인쇼이다.
내가 느낀 것은 항없는 추악함과 구역질 뿐이었다.
이 영화에 대해서 느낀 것이라기 보다는 그 상황자체에 대해서 겠지.
이 추악한 쇼에 대한 고민은 영화에는 없다. 관객이 그걸 판단해야 한다.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 느낄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그 쇼내의 캐릭터에 집중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게 만드는 영화이다. 그냥 추악한 쇼를 봤다는 느낌.

트루만 쇼, 배틀로얄, 러닝맨 등의 게임이나 쇼를 소재로 한 관음증이나 개인이 그 상황에 대해 가지는 생각은 그냥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약자의 슬픔 뿐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제프가 깨어나면서 또 다시 게임을 해야 한다는 상황에 Shit이라는 표현 그게 전부이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도 shit이다.

내가 공감하는 건 이러한 상황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겠는가?
살려고 발버둥치던지, 죽음을 받아들이던지 하는 것 밖에 없다. 그 외의 선택은 있을 수 없는 쇼이니까.

리얼리티 쇼라는 이제는 너무나 대중화된 인기 장르를 빌어 인간의 추악함을 고발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이걸 그냥 쇼로서 즐기는 시청자로서 밖에 기능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구 Series 8의 예고편이 있으니까 말이다.

오구

이윤택

강부자, 이재은

인기있었던 연극을 그 연출자가 영화로 옮겼다고 들었다.

일단 과장된 연기들은 굉장히 눈에 거슬렸다. 아마 거의 모든 배우가 연극무대 출신인것 같은데 연극에서의 연기와 영화에서의 연기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차라리 모든 배우가 연극적인 연기를 하던지 했어야지. 그것이 섞여버리면서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준다.

영화는 저승사자가 황노모를 찾아오면서 굿판을 벌이게 되고,
무당 집안의 딸 중 한명인 미연은 동네에서 집단 강간으로 인하여 애를 배게 되고 마을을 떠난다.
이러한 사연과 더불어 마을에 뿌리 깊었던 갈등과 더불어 굿판은 이어지고,
갈등의 해소를 이끌어낸다. 굿판은 장례로 이어지고 탄생으로 이어진다.

대강의 내용은 위와 같다. 하지만 그냥 단순 나열 일뿐이다.
굿이라면 대강 무당이 칼을 탄다던지,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로 기억했는데
이런 굿 모습은 색달랐다는 정도이다.

감동도 갈등도 결말도 그 모든 전개가 평이하기만 한 영화
강부자의 연기만이 인상적이었다.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 (偶然にも最惡な少年) 2003

조센진이 아닌 거의 바보인 간고꾸진(한국인)인 이치하라 하야토,
뭔가 머리에 문제가 있는 냉소주의 유미(나카시마 미카)
여기에 휩쓸리는 양아치 타노.

제목이 매력적이라서 보게 되었는데 보는 내내 엉뚱한 미소를 떠올리게 한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은 타노가 칼레 찔린채 난 죽은게 아니라고 하면서 시작
똑 같은 장면으로 끝나 버린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본 영화는 Go를 비롯하여 몇작품을 본 것 같다.
Go에서는 정체성의 문제와 시선의 문제 속에서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결국은 삶은 다르지 않다. 네가 뭐라고 부르던 그 본질이 주는 느낌은 같다는 것이다.
호칭이나 형식에의 관습으로 오도되어질 수는 있지만 가치의 변환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반면 이 영화는 어찌보면 무의미한 행동의 반복에 알수 없는 주인공의 기분에 따라서 나아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바보최저 한국인이라는 것이 아니고, 유미나 타노가 그의 하카다행에 동행하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에 별 의미도 없다. 단지 한국인이라서 이지메를 당한 정도.

부모의 이혼으로 누나와 헤어진 주인공은 우연히 길에서의 재회 후 부적절한 관계로 발전하는데 거기에 어떤 고민도 갈등도 없다. 그러다 누나의 자살이후 그 시체를 탈취해서 그만의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영화의 전부이다.
여기에 유미와 타노의 인연이 더해지고 한국행 밀항선을 타기까지의 과정이다.

결국 카네시로가 죽었는지? 누나는 한국으로 가게 되었는지? 타노는 왜 하라다에게 죽었는지?
하는 의문은 많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추리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그러려니 하련다.
왜냐구? 영화자체가 추리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관객이 무슨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이다. 카네시로가 누나와 함께 한국으로 갔떤, 타노의 배신으로 인하여 죽었던 그건 의미가 없다.
왜냐구. 카네시로는 우연히도 최악인 소년이 되어버린 것이니까. 그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고, 복수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 죽으면서도 죽은게 아니란 사람도 있다. 그의 삶은 최악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최악이라는 모순적인 멍에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치하라와 미카의 대조적인 연기는 과장과 절제, 수다와 침묵등의 대비를 통하여 상대방의 캐릭터를 더욱 재미있게 하고 있다.

구타유발자들 A Blood Aria 2006

의외의 영화, 당혹스러운 영화. 그러니까 의외로 놀라운 영화

일단 배우들부터 살펴보자. 내가 이 영화를 본 이유가 배우들 때문이니
한석규, 이문식, 오달수.

이전까지 난 한석규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의 연기를 그저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한석규는 아마 그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최고일거라고 생각한다.
일상에 찌어들고 일에 치어 살고 가정에 골머리를 앓는 권태스러운 교통단속 경찰에서 폭력의 광기에 완벽히 몰입해가는 역할연기는 훌륭했다. 그의 정체는 권태로움에서 여러가지 상황을 통하여 조금씩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추리적인 진행방식이 아마도 그의 광기의 점증을 잘 표현했다. 조금 더 치밀했다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의 연기 문제는 아니지만, 마지막 결말에서의 흐지부지함은 그의 임팩트를 약화시켜버리고 말았다.

이문식 역시 한석규와 마찬가지로 평가했었는데 구타유발자에서의 그의 삼색조의 연기는 솔직히 눈이 부시다. 그는 친절한 구조자의 역할에서, 폭력의 가해자로서의 정점의 역할, 피해자로서의 역할, 그렇다. 이영화에서 나타나는 모든 구타, 폭력의 중심에 있는 모든 캐릭터의 총합으로서의 역할을 그는 제대로 해내고 있다. 한석규도 최고의 연기를 했지만 이문식은 그것마저 뛰어 넘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큰 폭력의 피해자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폭력의 광기에 가장 노출이 심하고 벗어나지도 못하며 그럴 의지도 전혀 없는 캐릭터이다.

오달수, 솔직히 내가 이영화를 본 이유중에서도 주된 것이다. 음란 서생에서의 그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해학적인 얼굴표정은 영화자체에 있어서 완벽한 감미료로서의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에 비해 그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인지 그렇게 눈에 뜨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초반에 지루할 수 있는 영화에 그나마 긴장감을 부여했으며, 이문식, 한석규로 집중되어지는 광기에서 잠시나마 쉬어 갈 여유를 준다. 그의 역할은 피해자로서의 비중이 더 커보이지만 공인되어진 군대폭력의 희생자로서 하나의 본능에만 충실한 순수한 폭력이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것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단지 업신여김 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그에겐 사람이나 돼지나 똑 같이 보인다. 단지 자신보다 강하게 느끼는 것에는 본능적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로 보여진다.

현재의 폭력장면에서 볼 때 무술액션이 아닌 너무나 리얼한 실제 싸움을 재현시켰다고 생각한다. 현재 역을 맡은 배우의 그나마 훌륭했던 연기는 폭력에 눈을 떠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주먹을 보고 스스로 놀라는 듯한 그 표정이다. 그외, 교수나 현재,양아치1,.2 도 무난했다.

반면 인정은 역할상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많이 짜증이 나는 수준이다

이제 영화 자체를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이 영화가 어떻게 전개 될지 알수가 없었다.
비도덕적이고 호색한 성악교수는 여제자 하나와 교외로 놀러와 무언가 기회를 노리고 있다.
여제자의 경우에도 끈적거리는 교수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라고? 놀러온게 아니고 어떤 학술회에 참석한 것으로 볼수도 있다. 그 명찰을 보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인정의 교수와의 동행은 그렇게 순수하게 보이지만도 않는다.
더우기 교수의 명백히 드러나는 의도와 대비한다고 해도 말이다.

신호위반에 따른 실랑이, 기회주의적인 교수의 비겁한 면모.
교수와 인정의 실랑이, 이건 성폭력이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폭력이어야 하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탐욕에 불과한 저질의 폭력을 상징한다. 지위와 이익등 상황에 의한 폭력과 남녀로 대비되는 강자의 약자에 대한 가장 저열한 폭력이다. 그리고 인정의 자기방어에 따른 도피는 여전히 억지스럽다. 교수의 허접한 시도와 왕따에 따른 구타의 목격과 봉현의 오토바이를 얻어탄 인정은 다시 개울로 돌아오게 되는데 인정의 캐릭터는 짜증스럽다 못해 바보여성의 절정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느낄런지 모르지만 굉장히 억지스럽고 말이 안되는 전개라고 느꼈다.

결국 모두는 한자리에 모이게 되고 - 모이기가 참 힘들었다.
조금씩 드러나는 광기는 폭력의 형태를 조금씩 관객에게 선사하기 시작한다.
구타, 폭력은 강간시도, 맞짱, 게임의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현재와 문재의 관계도 얼핏 암시를 한다.
여기에서 인정과 교수의 역할은 일방적인 피해자로서만 기능하는데 대해서 일차적으로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현재의 반란에 따른 역구타와 그에 따른 과정은 복수와 가학의 쾌락을 탄생시킨다.

그런데 여자여, 너의 역할은 왜 그 따위인가?

왜 여린척, 자비로운 척 하며 폭력과 복수의 완성을 막아버리는가? 이건 솔직히 조금 어거지란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나중에 더 큰 반전을 위한 계기일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영화에서 철저히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인정의 역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성은 폭력적이지 않단 말인가? 그냥 길 가는 교수 졸라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구타유발자로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방관자의 역할만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이 넘치는 폭력의 광기가 난 그녀 또한 침식하기를 바랫었다. 왜 영화 속에서 모든 사람이 변하고 있는데 벤츠안의 두남녀는 바뀌지 않는단 말인가? 인정은 총한방은 쏜다. 그건 교수머리를 때리던 핸드폰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일뿐이다.
'
인정의 어거지스런 맹활약으로 현재의 상태는 다시 역전, 오군의 야구방망이 한방을 부른다.
죽은 것으로 착각한 양아치 일행은 벤츠와 함께 인정과 현재를 없애버릴 계획을 실천하려 한다.

권총을 가지고 있었던 현재는 왜 그렇게 당하고 있었을까 하는 것은 큰 의문 중 하나이다.
이 영화에서 권총은 인정 못지 않은 나에게 미움 받는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폭력에도 쉽게 꺼지지 않는 인간의 생명력은 마왕의 강림을 부를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밝혀지는 가운데, 골뱅이(봉현)와 야만인(운재)의 관계, 그에 따른 씻을 수 없는 봉현의 상처
폭력은 이제 더 이상 어떤 제동장치도 있을 수 없는 것 처럼 보인다.

한 석규는 불합리한 폭력의 광기에서 이제 벗어난 것 처럼 보일 뻔도 했지만
점증되는 폭력의 전염성은 다시 야만인을 불러내고 있다.
폭력은 어떠한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으며, 그 규모와 정도의 차이는 점점 커지기만 하고 있다.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한 석규의 말은 누군가 하는 말 같지 않은가?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남은 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없애 버리는 것이다.

봉현은 계속 중얼거린다. 더 때리라고 말이다.
그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며 아직도 여전히 끝낼 생각이 없다.
끝까지 착한 일면을 얼핏 비추는 것은(인정에게 터미날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는 것)
그가 영화의 결말을 안다 하더라도 그에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게 이 영화의 메시지겠지.

구타와 폭력으로 반복되어지는 관계의 설정과 이야기의 구성, 연기만을 놓고 본다면 솔직히 내가 봐온 어떤 한국 영화보다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다.

초반 교수와 인정에서 비롯되어지는 사건의 전개와 캐릭터의 집합의 억지스러움과
결말의 처리 장면에서 나타나는 무책임함은 영화의 해석을 애매하게 함으로써
영화의 평가 역시 애매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솔직히 나의 취향으로는 아니, 나의 바램이라고 하겠다.
여자와 교수 또한 그 구타의 과정에 동참을 했었어야 했다.
어차피 정상을 추구하고 있지 않는 약간은 무리한 전개의 영화에서
그 둘은 정상적으로 보이게끔 놔두었을까 하는 부분이 그 첫번째 이유다.
두번째 이유는 두 형제의 죽음만이 추측될 뿐. 나머지는 너무 무사하다는 것이다.

모든 폭력의 시작이었던 문재는 폭력이 아닌 쥐약때문에 죽는다.
폭력과 구타의 정점과 최하부만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너무나 훌륭한 절정부분인 운재와 봉현의 광기의 충돌에 비해
마무리의 처리는 너무 엉성했다는 느낌이
이 영화의 평가를 절하시키고 있다.

쥐약에 죽어버리는 야만인은 그냥 약자로서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우리 약자의 바램일뿐이다.
구타를 하는 자와 구타를 받는 자 둘을 동시에 죽여버림으로써(둘이 형제란 사실도 있다)
내용상으로는 모든 폭력과의 단절, 그 폐혜의 결과를 보이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그래서 아쉽다. 다시 생각해보면 영화의 모든 인물은 다 죽거나 폭력의 광기에 더 물들어 있어야 했다.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광기가 조금 더 진했다면 걸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조금 부족했다.

이 영화를 보면 폭력의 역사란 영화가 떠오른다. 그 영화는 폭력이라기 보다는 살인자의 삶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짚고 넘어간 몇가지 조차도 포함하여 참 즐겁게 보았다.
개울에 모이기까지의 부분 과정만 참을 수 있다면
구타씬은 너무 리얼해서 보는 내내 아픔을 느낄정도로 사실적이며
이 영화는 당신을 무차별 구타하고 그 광기에 휩쓸리게 할 것이다.


폭력이란 것은 인간의 가장 공격적인 표현수단임과 동시에 삶의 수단으로 기능했었다. 하지만 지금에 있어 폭력은 구타란 형태를 통해서 가장 많이 드러나고 있다. 폭력의 본질이 변이되었고 더 이상 일반적인 삶의 수단으로서의 물리적 폭력은 드물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육체적 접촉이 없을 뿐 더욱 교묘해지고 영리해진 폭력은 여전히 왕성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도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채로 말이다.

우리는 정치폭력을 겪고 있으며, 미국이라는 초강대한 폭력에 무방비로 맞을 수 밖에 없으며 약하기만 한 우리는 미약한 저항조차 힘겨운 입장이다. 즉 강자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약자 괴롭히기는 개인이 아닌 국가단위 사회 단위에서 더욱 활발하고 오히려 용인되고 있으며 끊임없이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아니라 지금은 착취와 기만을 위한 대규모 폭력의 시대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당신은 구타유발자인가?
구타를 하는 사람인가?
구타를 당하는 사람인가?

아마도 오군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짐작해본다.
그 폭력이라는 광기에 미쳐버린 우리는 오군처럼 인식하지 못한 채
돼지를 단순한 이유로 두들겨 패 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

당신이 단순히 피해자고 약자라고 착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 ps. 쥐약 먹은 문재는 죽었다. 쥐약먹고 죽은쥐를 먹으면 안 죽나?

Aug 6, 2006

花樣年華 & 2046 왕가위

그냥 봤다는 기록 메모. 감상이 정리 안되고 있음. 단지 아래의 말만 기억.
그리고 왕가위에 대한 혼란.


..what people did in the old days...
...when they had secrets they didnt want to share?

they'd climb the mountain....
Find a tree...
Carve a hole in it...
Whisper the secret in the hole...
and cover it up with mud.
that way...nobody else would ever discover it.

I'll be your tree

옛날에 사람들은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어떻게 했을까?

산에 올라서 어떤 나무를 찾아 구멍을 파고
그 구멍에 비밀을 속삭이고는 진흙으로 막아버리는 거야.
그렇게 하면 아무도 그 비밀을 알수가 없어.

6 days 2002

王家衛 花樣年華未曝光片段


2046刪減未曝光片段1

2046刪減未曝光片段2


切腹 (Harakiri, Sepukku, 할복) 1962

미국, 고바야시 마사키 칸느 심사위원 특별상

할복이라는 독특한 일본 사무라이의 전통을 통하여 삶과 죽음, 명예 그리고 제도에 대한 통렬한 비판.

할복이란?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의식이라고이 영화에서는 표현된다.

전란은 끝나고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1600년대 초반의 일보.
에도에서도 유명한 이위가문에 한 명의 늙은 낭인이 찾아와 할복을 할 장소가 필요하니.
장소를 빌려달라는 요구를 한다. 한때 1만 2천명의 가신을 두었던 어느 가문의 무사였던
츠구모 한시로는 가문의 몰락이후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고 다른 주군을 구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고 오히려 궁핍한 생활에 굴욕을 느껴 구차하게 살아가느니 명예롭게 죽음을 택하겠다는 이유를 가지고 이위가로 찾아온다. 하지만 그에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이위가의 수장들은 근래 할복을 빌미로 돈 몇푼을 구걸하는 낭인들의 행태로 인하여 고심을 하게 된다..
그들은 츠구모가 진정 할복을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위와 같은 부류인지를 알아보고자 최근의
치즈야 모토메라는 어떤 낭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복을 빌미로 왔지만 결국은 목숨을 구걸하게 되지만 결국은 구차한 죽음이 되어버린 할복이 있었다.
너도 그런 경우와 같지 않느냐란 식으로.

하지만 주인공의 결심은 확고하다.
할복의식은 시작되고 보조무사를 지명하는 과정에서 사건은 전개 되고,
자신이 보조를 지명하기를 원하지만 그 사람들 마다 병을 빌미로 가능하지 않게 된다.

그 과정에서 츠구모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실은 얼마전에 여기서 할복한 츠구모는 자신의 사위이며, 힘들었던 시기에 사무라이로서의 자존심보다는
가족을 위해 칼을 팔아버린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가 할복을 택하게 만든게 진정 스스로인가? 아니면 당신들이
오히려 그를 이익과 편의를 위해 모욕을 주고 죽게끔 하지 않았느냐는 논리가 전개된다.

여러가지 상황들이 이위가의 편리를 위해 그를 죽게끔 강요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가 지명한 세명의 보조는 상투를 잘리는 수모를 츠구모에게 당하고 와병을 핑계로 출근하지 않거나 결투를 통한
패배로 인하여 칩거하고 있는 상황임이 또 다시 드러난다. 지명당한 세명의 무사는 모토메를 모욕하고 죽음으로 이끈 주도적 역할을 한 세사람이었다.

결국 할복의식은 츠구모와 이위가의 싸움으로 발전, 츠구모는 죽음을 이위가는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며,
씻을수 없는 치욕을 맛 보게 되는데. 이위가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츠구모의 죽음을 할복으로 위장하고 죽은 무사들은 병사, 세명의 무사에게는 할복을 강요하는 끝가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할복이란 의식을 통해 츠구모의 입을 통하여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결합시키면서 하나식 의문을 풀어나가는
심리 스릴러라고도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 딱 지금의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결코 사죄하지도 않고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며 스스로의 모양새 지키기에 급급한 현실을 강렬하게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진심어린 사과나 배려 한마디를 원했던 츠구모는 결코 단 한마디 사과도 듣지 못하며 자신의 사위와 비슷한 운명을 겉으로는 겪게 되는 것이다.
진실의 은폐와 오도로 지켜지는 제도와 명예의 가치가 인간의 목숨보다도 진정 중요한 것이며 사실을 확인하면 금방 알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자기 반성이 없는 추잡함을 고발하고 있다.

1962년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치밀한 심리 묘사. 극의 구성 지금의 어떤 스릴러보다 흡입력이 있는 이야기를 두루 갖추고 있다. 생존과 명예, 불합리한 제도의 폐해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결국 칼부림 끝에도 해결된 건 없다. 추악한 은폐만이 있을 뿐.

40년이 넘게 흘러도 일본의 모습은 아직 그대로이다. 일본 뿐만 아니라 작금의 위정자, 초강대국 미국의 모습은 바로 이위가의 처세에서 너무도 너무도 잘 드러난다. 한푼의 가치도 없는 명예로 남의 죽음을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게끔하는 처절한 사회고발이다. 뭐 그렇게 느꼈다.

맥추 麥秋 / Early Summer (1951)


가족의 흥망성사? 탄생. 반복 뭐 그런거다.
단란한 가족 3대, 장녀의 결혼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다.

1951년 영화. 오즈 야스지로.
아마 내가 기억하기론 오즈의 영화는 이게 두번째겠지만.
처음이나 마찬가지. 동경이야기는 기억이 잘 안 남.

오즈는 "이 영화에서 스토리 자체보다는 윤회라던가 무상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행복해 보이는 한 가족의 해체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친구와 어제 페미니즘 이야기를 한 기억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 여자주인공의 행동은 왠지 그런쪽으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노리코이다.

그녀의 결혼이 이야기를 끌어가고 가족의 모든 관심사이다.
그녀는 일종의 파격적 선택을 하게 되고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따라갈 수 밖에 없다.
난 페미니즘을 경계하는 편에 속한다. 물론 잘못된 편견과 무지에 일부
기인함을 인정한다. 내 단편적인 지식에 의하면 지금의 어떤 한국영화보다도
이 영화만큼 여성이 중심이 되는 영화는 없다.
굳이 딴지를 걸자면 여성이 남자를 선택할 뿐, 결국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하는게 진정한 페미니즘은 아니다. 선택만 했을 뿐, 결국은 남성이라는 우월적 존재
에 종속되는 게 아닌가?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여성은 진정 그게 자신의 역할 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이 영화에서 굳이 페미니즘이란 걸 말한 건 영화의 구성에 있어서의 주도적역할
과 계기등 모든 것을 끌고나가는 그 역할에 있음이다.
난 페미니즘도 남성우월주의도 모두 거부하는 쪽이다.
인간은 인간을 기본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나느 그것이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어떤 상대던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다.

오즈가 한 말을 생각해보면 언뜻 와 닿지 않는다. 윤회, 무상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가족 사진과 부모님만의 사진. 가족은 결국 이렇게 생성 소멸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두사람으로 시작해서 결국 두사람만 남는 것이다. 물론 가족이란 개념내에서 말이다.

가족은 각각 흩어지고 각각의 가족이 되어버린다.
이제 노부부는 추억과 사진 한장이 대가족을 생각케 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미 가족으로서 의미가 없는 삼촌이 바라 보는 것은 뭘까?

굳이 이 영화를 보고 분석하고 그러고 싶지 않다. 솔직히는 감상조차 적고 싶지 않다.

단지 노부부의 시선으로 혼례행렬을 같이 보고 있을 뿐이다.(그러고 싶을 뿐이 정확한 표현일꺼다.)
야마토에서 노부부가, 가는귀가 먹은 삼촌과 함께 머물면서 혼례행렬을 바라 볼때의
그 아련한 눈길은, 이른 가을의 벼이삭이 흔들림과 함께 뭉클한 여운을 남기지 않는가?.

이것 저것 주절거리긴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말은 위의 마지막 문단이 다이다.

파이란 白蘭

송해성

최민식
장백지

최민식이 역시 연기 하나는 잘한다.
보는 순간 저절로 띠벌하고 욕이 나오는 양아치 연기라니.
공형진과 용식역의 손병호도 괜찮았고.

밑바닥 삶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참으로 추하기만 한 인간들.
결국은 모두 죽고 마는 개같은 인생.

강재는 뭘 느꼈을까?
파이란은 뭘 느꼈을까?

더러운 삶이다.

나을게 없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이해하진 못하겠다.

그냥 슬픔을 느낄 뿐이다.

장백지가 이쁘긴 이쁘네.
몰랐는데 옛날의 장만옥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 영화에 있어서 이렇게 구차하고 비굴하지만 사실적인 양아치는 없었다.
친구가 조폭을 포장하고 조폭 마누라가 폭력을 희화화 해버리는 한국영화에서,
절절한 사실을 알려준다. 조폭양아치는 멋있지 않아. 이게 네들이 몰랐던 진짜 양아치새끼들의 실상임을.

불법체류 중국인들의 방치되어진 삶, 어느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생존조차 불가능한 현실이
양아치 새끼를 만나게 된다. 파이란으로 상징되어지는 순수와 강재로 상징되어지는 비굴하기만 악도
이런 뭣 같은 현실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되돌아가려 해도 되돌아가지를 못한다.

강재도 파이란도 어딘가로 가려고 한다. 단지 그게 나을 것 같다는 단순하기만 희망.
그런 희망조차 짓 밟아버리는 것은 과연 그들이 겪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의 한계인가?
그들이 택한것 처럼 보이는 삶이 결국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코 만나지 못한 두사람 사이의 교감은 관객에게 조그만 희망을 주었었다.
그랬었다. 단지 그랬었을 뿐이다.

네가 강재이고 내가 파이란이 된것 같아 너무 슬펐다. 그리고 절망했다. 젠장.

송일곤

감독이름은 몇번 들어본 것 같은데, 본 작품은 없는 것 같다.
잔잔한 영화라고 들었다.
10년전의 약속을 기억하고 우도로 가는 주인공.
거기서 모텔을 하는 조카와 삼촌
삼촌은 숙모의 가출 후 말이 없어져 고기만 잡고 있다.
조카는 무용을 공부했었던 것 같다.
10년전의 그녀는 결혼을 했지만,
기억에서 지웠지만
그래도 약속장소에서 기다린다.

그러던 며칠, 도착하는 피아노.
돌아온 숙모
새로운 약속.
헤어짐.
만남

세세한 사정을 나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
영화가 너무나 친절하니까.

잔잔하더라.

10년전의 잊혀진 약속은 지켜졌고
새로운 약속도 지켜졌다.

어찌 생각하면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의 환타지가 아닐까?

일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이란 거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기적으로 인식하지 못한채 우연내지는 의외로 받아들고 있을뿐.

看上去痕美Kan Shang Qu Hen Mei :A little red flowers

감독 : 장 위엔 張元
각본 : 왕 슈오 王朔 (원작소설)
남자주인공이 누드로 나오는 장면이 이렇게 많은 영화는 처음이다. ^^

일단 네살 꼬마들이라는 떼거리 악마들과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만으로 존경스럽다.
절대 저런 악마 떼거리들 속에는 일초도 같이 있고 싶지 않다.
네살 꼬맹이의 유아원 적응기라는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봤다.
지나간 어린 시절의 기억 못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라는 말들이 있던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기억못하는 우리가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이다.

방창창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강제수용소에서 획일화를 강요당하고, 무서운 요괴가 자기를 잡아
먹으려고 하고, 동료들과 반란을 일으키려 하지만 진압된 후 유폐를 당하고 이제는 사회악으로서의 역할을
하게되지만 역시 체포,약간의 교육 후 사회에 복귀하지만 자신도 동료들도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슬픈이야기이다. 이게 어디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당신이 방창창이고 유아원이 아니라 그곳이 통제되는 계엄국가라고 가정하고 위와 같은 일을 겪었다
고 생각해보라. 이건 어린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질서와 획일화, 단체가 중요시 되는 사회,
그 속에 새로이 진입하는 자유주의자.
작은 빨간 꽃으로 상징되는 상벌제도.
왜 나는 꽃이 없을까
왜 꽃을 주지 않는건가
그런데 다른 애들은 꽃을 왜 주는 거야
그렇게 시작되는 방창창의 의문을 풀기위한 어드벤처무비가 시작되는 것이다.
뭐 자세한 건 영화를 보시면 알테고.

혼자일 수 밖에 없을 때 본 작은 붉은 꽃은 마지막의 행렬에서 커다란 붉은 꽃이 되어버린다.
마지막의 빨간 꽃의 행열을 볼때도 방창창은 혼자이다. 뭘 느꼈을까
그를 찾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는 바닥에 앉아버린다.

마지막의 붉은 꽃이 나오는 행렬은 장례행렬이라고 한다.

우리는 빨간 꽃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구나. 제기랄.
빨간 꽃이 뭔지는 모른다. 단지 어떨때는 가지고 싶고, 어떨때는 피하고 싶기만 한 무언가이다.
중극을 상징하는 색이 빨간 색이다. 태어나서도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그들의 색깔.

표현과 소재, 애들이라서 가능한 생각들을 제대로 엿보았다는 점에서 절묘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린날의 무서운 기억을 현실에서의 문제점들과 잘 매치시켰다. 이건 애들 영화가 결코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해석을 하던 재미는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던 무서움을 느끼던 말이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의 통찰이며 비판이다. 그것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그런것까지 적고 싶지는 않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볼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냥 방창창의 아름다웠던 추억이다. 실제로는 처절하고 힘든 나름대로의 투쟁이었는데 말이다.
흔히들 추억을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가? 아름답게 느끼는 건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Aug 3, 2006

Battlestar Galactica (1978) (TV)

http://www.imdb.com/title/tt0077215/


흑인 부머와 남자 스타벅, 확실한 배신자 발타. -tv series와 의 차이점.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려는 사일런.

여기에 대항하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 "갤락티카"

이들은 인류의 모성인 "지구"를 찾아 떠나는 길을 가게 되는데.

배틀스타 갤락티카 시리즈의 원조격 TV 영화.

모세가 유대인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광야를 헤메는 것에 모티브를 얻은 것 같은 설정.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갤락티카와 일련의 우주선단들.

그 속에 펼쳐지는 인간의 탐욕과 생존, 투쟁 등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초반부의 박진감과 흠미가 뒤에 가면서 다 소멸 되어 버린다.

단지 즐거웠던 건, 앞서 말했듯 드라마시리즈와 다른 인물들의 모습과 전개이다.

시리즈에선 인공생명체인 사우론의 모습이 여기서는 단지 로봇군단 정도로만 보이며

정확한 정체는 나오지 않는다. 발타박사는 영화에선 배신자로서 당연한 최후를 맞고

아마다 함장의 사려깊음과 카리스마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폴로만이 더욱 확대된 역할을 가지고 있다.

TV드라마의 내용과 전개가 훨씬 흥미스럽고 곧 시작할 시즌 3를 보는 것을 대비해 봐 줄만하다.

국경의 남쪽

차승원, 심헤진.

좀 어정쩡한 드라마.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도 좀 부족하고,
확실한 웃음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분단, 탈북 정착 그리고 사랑의 기억이라는 쉽게 덤빌 수 없는 주제에 너무 쉽고 단순한게 겉핥기만 했다는 느낌이다. 차라리 탈북인의 실상, 분단상황에서 두 사회를 경험한 그들의 심정, 적응 그리고 사랑등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게 접근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고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다. 왜 한 쪽으로만 판단하고 결론 내 버릴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최고의 소재로 만들어 낸, 간도 맞지 않고 이맛 저맛 다나는 이상한 음식이다.

천국의 아이들 1997

children of heaven
마지드 마지드

이란 아이들은 영화에서 보면 참 잘도 뛴다. ^^
수선한 동생의 신발을 잃어버린 알리.
찾기 위해 노력도 하고, 상품을 타기 위해 마라톤에서 일등도 한다.
그게 내용의 전부. 하지만 보고나면 저절로 미소지을수 밖에 없다.

정말 동심을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알리와 자라, 그들에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그들도 고민하고 갈등하고 또 그렇게 성장해갈 것이다.
너무나 귀여운 영화.

一 一 Yi Yi :a one and a two

edward yang

이면을 본다는 것.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삶을 두-세배로 풍부하게 보여줄수 있다
네가 볼 수 없는 뒷 모습을 보게 해준다는 거겠지..

일단 두가지 맘에 안드는 두 장면만 짚고 넘어간다.
살인사건 보도에서의 그 엉망인 게임그래픽은 뭔가? 잘 보고 있다가 때려치울 뻔 했다.
그리고 작위적이고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과 의도적인 거라고 동시에 느끼는 것이 있는데 마지막 양양의 장례식 추도사이다. 그 외에는 거의 다 맘에 든다.

결혼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그리고 또 다른 삶을 예측케 하면서 진행되어진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앞면만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뒷모습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은유적 표현이 느껴진다.

위 그림에서 보면 제목이 一 그리고 一 이렇게 적혀나간다.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것은 아마도 앞모습과 뒷모습을 말하는거겠지.
앞과 뒤, 이 둘이 이루낸 것. 우리의 온전한 삶을 말하는것 같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둘일 것이다.
둘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온전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가 달의 한면만을 볼수 밖에 없듯이 자신의 뒷모습을 보기는 힘들다.
자기 자신은 거울이라는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앞모습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우리는 그 거울을 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뒷모습은 어떻게 볼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보던, 앞뒤로 거울을 두고 비추어 보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뒷모습을 보고 싶을 경우이다.
직접적으로는 절대 자신의 뒷머리를 볼 수 없다. 외관을 살피는 것 조차 그러하다.
외관을 보는 것 조차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외관뿐만 아니라 내면이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그 속에도 앞면과 뒷면이 있다.
자신의 진실한 내면의 뒷모습-스스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자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울말고 또 하나의 거울이 필요하게 된다.
그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그 거울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할 것이다.
되돌아 보고, 뒷모습을 보게 해주는 어떤 것들.
즉 음악, 문학, 영화 등등의 예술이 요구되어지고 사회의 생성이 필요해지는 것이리라.
인간이 인간답고 완전해지는 것은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타인을 구분함과 동시에 인정할 때 시작되는 것 같다.

뒷모습이 있으니까 그것도 봐야지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뒷모습은 볼수 없다고 앞에서 말했다.
뒷모습을 보려고 한다는 것은 타인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회를 인정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관계의 시작점이 아닐까?
영화에서 표현되듯 타인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주면서 도움을 주는거라고 한다.
사진을 찍어서 손에 들려주는 것까지가 그의 역할인 것이다. 그는 또 하나의 거울인 것이다.
그 거울을 보고 뭘 느끼던 그것은 이제 당사자에게 달려있다.
그것이 예술의 시작이며, 올바른 사회관계의 시작이다라고 이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아니 감독 자신이 영화를 하는 이유이며 삶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 버리면, 내가 앞서 말했던 두가지 맘에 안드는 것 중 두번째는 감독의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피력이라고 생각할수 있지 않을까?

앞모습과 뒷모습은 하나의 반이 아니다. 하나를 구성하는 하나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말이 조금 어렵다.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쳇 왜 이렇게 어려운거야.

감독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는, 영화를 만들어가는 이유와 가치관을 표현한 영화라고 느꼈다.

ps.몇년전에 가 본 타이페이의 후덥지근했던 거리가 떠오른다.
노천 음식점에서 먹었던 여러가지 대만음식들, 만두가게, 허름한 시장통에서의 그 묘한 맛의 수프
그리고 진주나이(이름은 정확히 기억못하겟다)라고 기억하는 엄청난 용량의 빙수음료(그것 먹고 배불렀다).
대만은 날씨와 언어만 빼면 우리나라 어떤 도시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
북경에서는 여기가 외국이구나라고 확실히 느꼈었는데 대만은 그런게 덜했다. 뭐 일단 대만은 영어라도 대충은 통하니 말이다.
ps2.감독이름이 왜 에드워드 양일까? 애네들은 왜 영어이름을 사용하는 걸까?
뭐 의문이랄 것도 없겟지만, 내가 그들한테 듣기로는 영어이름을 기본적으로 하나씩 만든다고 했다.
그들은 수출의 비중이 우린나라 못지 않고, 게다가 중소기업위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영어이름 만드는 것을 권장한다고 들었다.
그 이후 나도 Kane이라는 영어이름을 만들었으니. ^^
ps3. 친구가 준 동영상으로 보지 못하고 새로 구해 영자막으로 봐서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다.

Santa Sangre 성스러운 피 1989

i stretch out my hands to thee:
my soul thirsts for thee like a parched land...
teach me the way i should go for to thee i lift up my soul
psalms.143.6.8.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영혼이 피곤하나이다.(시편. 143.6.8.

위의 글은 이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지문이다.
성경 시편의 한 구절인데 영어와 번역된 성경의 구절은 뭔가 뉘앙스가 틀리다.
어느게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글성경의 의미로는 이 영화와 그리 부합해보이진 않는다.

그래서 내가 번역해본 말은 다음과 같다.
당신에게 손을 뻗치나이다.
메마른 대지처럼 내 영혼의 갈증은 당신을 갈구합니다.
내 영혼이 당신에게 닿을 수 있게 인도하소서.

당신을 신으로 해석하지 않고 스스로으 정체성으로 인식하면 조금 더 나을 것 같다.

Alejandro Jodorowsky의 1989년작.
fenix의 어린시절과 성장한 모습이 너무도 닮아 캐스팅을 보니 다 같은 집안이군.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전부 Jodorwsky집안이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컬트영화라고들 하는데 하여튼 기이한 영화.
공포영화도 아니고, 종교영화도 아닌 좀 묘한 영화이다.
우리의 손을 움직이는 것은 무었인가?
자신의 손을 찾기 위한 잔혹한 여정.
콘차가 섬기는 팔없는 강간당한 소녀 "리리나"
그 근거없는 사교의 생성은 과연 뭘까?

정신병원에서의 자신이 새인줄 알고 행동하는 "피닉스"
성스러운 피의 성전의 철거.
코끼리 장례식에서 보이는 사체의 투기에 따른 빈민들의 행동.
그리고 문신여인의 유혹에 의한 비극적 파탄.
콘차는 아르고에 의해 팔이 잘려죽고, 아르고 역시 죽고 만다.
어느날 정신병원에서의 외출에서 우연히 보게된 문신여인.
거기서 페닉스의 복수는 시작된다.
그 매개체는 팔없는 콘차의 환상.
자신은 콘차의 팔과 손으로 필요하다는 환상을 가지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콘차가 원하는 복수라고 정당화하며
스스로를 똑 같은, 아니 최대의 피해자로 만들어버리는 교묘함까지 동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복수의 칼날들. 그 와중에 자신도 모르게 살인이 주는 중독성 쾌감에
빠져버린 페닉스.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콘차의 환상은 너무나 거대하다.
콘차의 망령은 이제 그를 오히려 파멸로 이끌지만 서로를 구원하기 위한 매개체라고 할수도
있는 알마와 피닉스는 자석이 붙듯이 서로를 끌어당긴다.
알마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가 생긴 것이다. 자신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콘차의 팔과 손이어서는 안될 이유이다.

결국 피닉스를 구원하는 "알마"
알마에게도 "피닉스"는 같은 구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니까. 뭐 그렇게 스토리는 흘러간다.

과연 그가 한 살인은 사실일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환상인지가 애매모호하다.

이것은 과연 교묘한 변명으로 치장된 복수의 살인극인가?
아니면 자신의 손을 찾기위한 잔혹하고 슬픈 정체성의 확립과정인가?
나는 후자로 읽고 싶다. 그것이 변명이라 하더라도 큰 줄기가 변하는 것은 아니기에.

세상을 살아가고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온전한 나만의 의지는 있는가?
우리의 의지로 구현되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왜 구원 받기를 원하는가? 만약 구원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진정 구원받은 것일까?
내가 구원 받는 것은 나의 의지인가? 아니면 누구의 의지인가?

굉장히 복잡하고, 영상자체도 기이함으로 가득찬 영화이다.

PS.
가상인물의 실체화. 파이트클럽, 최근 한국영화 모노폴리.를 얼핏 떠올리게도 한다.
모노폴리와는 비교불허, 파이트클럽과 비교해 보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다.

미국 드라마 중에 카니발이란 드라마가 있다.
서커스단이라 던가 그 기이함등에서 유사함을 느낀다.

My Super Ex-girlfriend

ivan reitman
uma thurman

미국영화는 슈퍼히로물이 판을 치고 있다.
수퍼맨도 돌아오고, x-men, 스파이더 맨 등등. 지구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이제 질투에 눈먼 사랑싸움하는 슈퍼히로물까지.
우마서먼 때문에 봤는데. 쩝 괜히 봤다.
슈퍼히로물 어디까지 언제까지 나올지 궁금하다. ^^
이런 생각을 가지면서도 맨류가 나오면 보게 되는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The Pornographers : エロ事師たちより人類学入門1966

http://www.imdb.com/title/tt0060560/
The Pornographer 1966
Jinruigaku Nyumon: Erogotshi yori 1966
Imamura Shohei
Ozawa Shoichi
128min
Japan
B/W


예상외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를 보고도 이런 놀라움은 솔직히 느끼질 못했다. 정말 이 작품이 맘에 든다.
66년에 이런 작품을 만들다니.

에로영화 제작자인 오가타는 하루에 두편씩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과부인 하루와 그녀의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있다.
그는 집을 짓고 아이를 가지는 등의 소박한 꿈을 꾸고 있으며 자기가 하는 일이, 인간 특히 남자들의 잃어버린 것을 찾게 해주는 사회복지와 같은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루의 아이들은 그녀의 와병중 반항이 극에 달하고, 나름대로 오가타는 아버지역할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음란물유포 범죄자인 그에게 좋은 시선은 불가능. 하루의 죽음과 인간의 배신들을 겪은 후. 그는 요즘으로 치면 러브달이라고 하나? 인형제작에 착수한다. 그것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그의 집이라고 할수 있는 목조배는 먼 대양으로 떠내려가 버린다.
마지막의 작은 스크린을 쳐다보면서 떠드는 말들 - 신선했다.

잉어가 들어있는 어항너머로 보는 장면,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여러가지 전개들.

솔직히 어쩌다가 구한 영화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건 대단한데 하는 느낌이 들었다. 최고의 블랙코미디 중 하나라고 여긴다. 쳇 영자막이라 조금 그렇다. 대사보랴, 화면 보랴 힘들었다. 자막이나 손질해서 한번 더 봐야겠다.- 내용은 한 번 더 보고 보충할 예정.

楢山節考, The Ballad of Narayama 1983

나라야마 부시코
이마무라 쇼헤이 - 1983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생존인가? 사회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대화를 한다고 해서 거기에 생존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짐승과 다른가?

일본중세의 생존이야기.
우리나라의 고려장과 비슷한 70세가 되면 아들이 부모를 나라야마의 신령에게 데려다 주는 의식.
생존이 가장 중요시되는 시대. 종족번식의 본능과 음식만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면서 생겨난 풍습이리라. 거기에 어떤 관습 또는 믿음으로서의 나라야마 가는 길은 일종의 인신공양이며 그들만의 결코 어길수 없는 최대의 가치일 것이다. 생존을 위한 살인이 정당화되는 시대에 그러한 수고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제사의식이며 단 하나 지켜야만 하는 유일 가치일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어떻게 보면 슬프지만 떠들석하기도 한 장례식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당시에 70세를 산다는 것은 꽤나 장수일 것이다.
제식으로서, 가치유지의 장치로써 그리고 잔치로써 나라야마 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버지도 살해한 타츠헤이가 어머니를 버리면서도 발길을 되돌리는 그 감정은 어떤 것일까?
결국은 나라야마를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단지 눈이 내린다는 것으로 그 의식에 어머니는 좋을꺼야, 운이 좋은거야 하고 위안할 수 밖에.

절벽에서 아버지를 버리는 친구의 모습과 나라야마에 버리고 내려가는 자신에게서 그는 어떤 차이점을 느꼈을까.

어떤 식으로던 사람은 살아간다.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편하기 위해서 종교, 믿음, 이데올로기, 관습, 법, 제도 등등을 만들고, 생성되는 것은 아닐까? 살아가는 방식의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인간이다. 그것을 내가 이해를 하던 못하던 말이다.

그렇다면 타츠헤이는 어떤 선택을 한건가?
제도에 순응한건가? 아니면 자신의 선택일까?

타츠헤이의 삶이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과 단 한치의 차이도 없다면 단순한 나의 과장일려나?
타츠헤이도 우리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젠장 인류는 석기시대 이후 문명만 발전해 나갈뿐, 진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멸종직전의 종인가 보다. 뭐 이것 저것 발전했고 지금 저러한 일은 없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럴까? 하고 되묻고 싶다. 생활이, 제도가, 인간존중이 점점 발전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맞아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과연 인간은 발전하고 있는가? 문화, 문명,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의 종 그 자체는 발전하고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이 아닌 정신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건가? 그것이 인간이 우월해지고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유일한 이유인데 그것이 정체 되어있다.

진화가 멈춘 종은 반드시 쇠퇴하고 멸종하게 되지 않는가?

말이 또 엉뚱한데로 흘러가는군. 쳇 이건 나의 병인가 보다.

인간은 진화를 게속 해야만 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생존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영화가 아닐까. 여겨진다.

글을 좀 다듬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냥 떠 오르는 데로 적다 보니. 영화감상이 아니라 허튼 소리가 잘 되어버린다. 이 블로그의 영화, 음악에 관한 것들은 결코 비평도 아니며, 분석하기 위한 글들도 아니다. 내가 봤던것, 들었던 것, 느꼈던 것들을 단순히 메모하는 것이다. 절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음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주지해야겠다. 이건 내 생각의 정리를 위한 낙서장일 뿐이다. 그래서 두서도 없고 개념도 왔다갔다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정리가 될까 하여,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정도이다.




Aug 2, 2006

MArvin Gaye

Sexual Healing


MARVIN GAYE & TAMMI TERRELL "Ain't no Mountain High Enough"


Marvin Gaye - What's Going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