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22, 2006

숨은 요새의 세 악인 隱し砦の三惡人 Hidden Fortress (1958)



黒澤明 kurosawa Akira 의 1958년 작품.

거장이라 불리우는 감독들 중 재미로만 본다면 가장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것은 내러티브와 구성의 꽉 짜여진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보기 전 스타워즈의 원형격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소개를 읽었다.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마타시치, 타헤이는 고향 마을을 떠나 전장의 시체를 털어 돈을 벌려고 하지만
죽도록 고생만 한채 돌아가는 중이다. 티격태격 자기 몫만 챙기는 모습이다.

그들은 우연히 장작 속의 황금을 발견하고
자칭 마카베 로쿠료타라는 불한당과 함께 황금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계획을 꾸민다.

마카베는 유키공주를 모시는 가신으로써 그녀를 도와 가문을 재건할 임무를 가진다.
숨겨진 요새에서 준비를 마친 후, 그들은 목적지를 향해 떠나게 된다.

유키는 성안에서의 삶, 망해버린 가문의 재건,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
그리고 서민들의 실상을 보면서 스스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되고 군주로서의
자질을 닦아나간다.

그들은 적들에게 잡히지만 마카베의 호적수인 타도코로 료헤이의 도움으로
탈출을 하게 된다.

마타시치, 타헤이는 얼떨결에 그들의 탈출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만
마지막에야 알게 되고 결국 한장의 금판만을 가진 채 서로 양보하며
고향으로 돌아간다.

결국 내용은 두 바보의 티격태격 좌충우돌 모험기에 망가의 가신과 공주의
모험담이 곁들여 지는 것이다. 물론 비중은 망가의 탈출에 더 있다.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두 바보의 이야기는 결국 덧 없음을 보여준다.
지배자들의 흥망성쇠와 관계 없이 민중들의 삶은 더욱 힘들기만 하다는 것 아닐까?
결국 이들은 죽도록 고생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만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한 채 말이다.

위의 느낌과 별도로 재미만 따져도 충분히 시간을 투자하여 볼만하다.
또 스타워즈의 캐릭터와 대비하여 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결국 떠올린 캐릭터는 레아, 오비완, 다스베이더였다.
루커와 솔로의 역할을 해야 할 두 사람은 너무 어글리 했으니 말이다.

다세포 소녀 2006


김옥빈..
다세포소녀라는. 유명 인터넷 만화가 원작이라고 한다.
만화를 보지 않아서 뭐라고 말은 못하겠지만,만화에서는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을 것 같다.
다세포 소녀는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가?솔직히 원조교제, 부도덕성. 빈부격차, 인터넷의 부작용, 등을 다루고자 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든다. 만화적 캐릭터에 어설픈 연기들, 그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 춤추고 노래하고 괴물등장에...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오렌지를 얼핏 떠 올리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감히 거기에 비교할 수는 없다.
보여주고자 하는 건 많았지만 내게 있어서는 느낌들이 전혀 오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는 불쾌하지도 않았다. 결국 현실에서나 가상세계 속에서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건가?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뭔가?
마지막의 괴물을 물리치는 장면에서의 자위행위를 통한 대항은이 영화가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자아비판인가?
진지하기만한 영화를 원하지는 않는다.영화라는 것은 자기 표현의 욕구를 형상화하는 것이다.오락영화라 하더라도 관객의 기호에 맞추기 위한 표현과 자신의 주관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난 이 영화에서 아무것도 느끼지를 못했다.
다세포 소녀? 세포의 이상증식 즉 암세포 소녀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스캔들은 그래도 재미있게 봤는데. 쩝.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The World's Fastest Indian


Anthony hopkins

인디안 이야기인줄 알고 안 봤었다.
보니까 인디안이라는 1920년 오토바이의 최고속 도전기였다.

버트 먼로와 그의 인디언이 세운 1967년 보너빌에서 세운
최고속 기록은 아직까지 안 깨지고 있다고 한다.

삶의 목표와 열정은 나이에 관계 없으며
원하고자 하는 바를 성취하는 것이 최상의 미덕이다.
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버트 먼로의 실제삶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처럼 아름답고 훈훈함으로 가득차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아직까지 남아 있고
모두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이야기이다.

너무 동화적이긴 하지만 얼마던지 참을 수 있다.
안소니 홉킨스의 괴짜 캐릭터 연기는 탁월했다고 느낀다.
뭐 이미 연기는 어떤 경지에 들어있는 노배우이기도 하고
이론을 제기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현대판 동화의 탄생이라고나 할까?
볼만하다.

오늘은 모터바이크 영화만 연속으로 두편을 본 것 같다.^^

diarios de motocicleta; Motorcycle Diary



Che Gevara

내가 아는 체 게바라는 구렛나루에 베레모를 쓴 모습이다.
그는 남미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진정한 혁명가로 알고 있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것도 처음 알았다. 쿠바사람인 줄 알았었다. ^^

알프레도 와 에르네스 체 게바라는 그들의 젊은 시절을 기념하기 위해
남미대륙을 모터사이클로 여행할 것을 결심하고 떠난다.

그들의 낭만적 생각은 남미의 현실을 직접 겪으면서
국가의 정체성과 남미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문명에 대한 고찰을 이끌어내게 된다.
영화 말미에 이건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꿈을 쫓아가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 꿈을 이루던 말던, 그들은 열정적인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되었다.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
그가 이상을 꿈꾸게 된 여행을 말한다.

뭐 이정도로 하는게 나을 듯 하다.
체 게바라에 대해서 아는 건 이미지 하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조금 더 알게 되고 기회가 되어 남미에 대해 알게 된다면
좀 더 감동이 왔을 듯도 하다.

지금은 이정도로만.

Vers Le Sud 남쪽을 향해

France

Laurent Cantet

브랜다, 엘렌, 수 등 일련의 중년 여인들은 아이티를 찾는다.
쾌락을 찾아서, 사회생활에서 찾지 못한 어떤 감흥을 찾아서
각자의 이유를 찾아서 아이티로 여행을 온다.

브랜다는 3년 만에 아이티를 다시 방문한다.
3년전 45살의 나이로 처음 느껴본 오르가즘을 잊지 못한 이유도 있고
더 이상 사회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엘렌은 55살의 나이로 철저히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이곳을 찾는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며, 일종의 소유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엘렌과 같이 지내는 소년(?이름을 까먹었다)은 과거에 브랜다에게 오르가즘을 주었었다.
브랜다는 소년에게 빠지고 그와 사랑에 빠진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엘렌은 알 수 없는 질투심과 소유욕을 느끼게 되고

소년은 그 스스로의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해변을 방황하며 살아가지만,
어떤 연유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게 된다.

엘렌과 브랜다는 일종의 책임을 느끼게 된다.
엘렌은 아이티를 떠나고
브랜다는 남은채로 아름다운 캐러비안해를 둘러볼 생각을 가지게 된다.

나쁘게 말하면 권태와 삶에 찌든 중년 여인들의 쾌락탐험기이고,
좋게 말하면 중년여인들이 느끼는 그들의 상실감과 여자로서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이다.

솔직히 썩 와 닿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흥미있게 보았다.

ps. 왜 언어가 두개 짬뽕이란 말이냐? 불어면 불어로 영어면 영어로 할 것이지
게다가 영어에 영어 자막은 왜 말하고 틀린데. 그래서 불어의 영어자막도
별 믿음이 안가고 뭔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Requiem 2006


종교 영화인지? 정체성확립으로 봐야 할지.?

미카엘라는 간질(epilepsy)로 1년을 휴학학고 튀빙겐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하게 된다.
그녀는 독실한 캐톨릭 신자이며 평범한 신입생으로서의 삶을 가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가 보는 환상들로 인한 간질 증상은 그녀를 미친 것으로 보이게 하기도 한다.
동향의 한나를 만나면서 그녀는 조금씩 학교와 새로운 생활에 적응을 해가지만
점점 그녀의 증상은 심해진다. 신부를 만나고, 의사를 만나도 병을 치료할 방법은
알수가 없는 상태이다.

억압적인 엄마와의 관계는 악화되기만 하고
친구인 한나, 연인인 스테판과의 관계도 어긋나기만 한다.
종교도 그녀에게는 어떤 치유를 주지 않는 다고 생각하여
그녀는 완전히 미쳐간다.

하지만 신부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엑소시즘을 통한 해결을 하면서
그녀는 일단은 악마들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녀가 한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결국 종교라는 도피처를 찾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포기한 것일까?

솔직히 종교와 관련된 영화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편이다.
종교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어설픈 접근은 영화를 망치는 것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시각자체가 오도되어서 전도영화가 되거나 반종교적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면서는 이건 반 종교적인 영화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미카엘라는 왜 자신이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 지를 모르며,
그녀가 하는 기도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하나님을 부정하려고 한다.
솔직히 종교의 진실유무를 떠나서 그 해석에 있어서는 얼마던지 확장과 축소가 가능하지 않는가?
종교는 관대하기도 하고, 엄격한 냉정함, 심지어는 잔혹함까지 가지고 있다.
과연 그것이 창조주의 뜻일까? 창조주 아니, 신이 있다면 지금 인간은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지 인간의 의지하고자 하는 욕구와 초월적 존재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구원을 믿음으로써 스스로 위안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단지 그 규모의 차이가 종교를 만들어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뭐 그건 나의 생각이고.

미카엘라라는 독실한 캐톨릭이 왜 악마라는 환상을 보며 스스로 미쳐가고 있는건가?
만약 그녀의 광증이 엑소시즘 또는 종교의 이름으로 덮어졌다면
그것만으로 종교의 가치는 있을 것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마지막 장면에서의 미카엘라는 왜 기뻐하지 않고
단지 집으로 돌아가서 신부를 만나려고 하는 의지만 남은 걸까?
스스로를 포기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종교집회라던가, 성서와 같은 책을 보면 스스로를 부정하고 포기함으로써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한다. 즉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스스로를 포기해야만 하는가?
개개의 자아는 유일한 존재인 신을 부정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가 종교의 역할과 개인의 정체성인 자아의 확립에 관한
의문의 제기라고 생각한다. 단지 의문을 제기했을뿐
스스로의 확실한 시각을 진술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다.

결론적으로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천리주단기 Riding Alone for thousands of miles 2005




장이모우

다카쿠라 켄

오랜시간 아들과 연락을 끊고 지내던 다카다는
아들의 와병소식을 듣고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한다.

며느리에게서 받은 비디오테입을 통하여
그는 아들이 원하던 중국경극의 촬여을 위해 중국으로 떠난다.

경극배우인 리자밍은 술먹고 동료를 상하게 하여 복역중이라
그의 경극 공연을 찍지 못하게 된다.
교도소로 찾아가 촬여을 하려고 하지만
리자밍은 자신의 아들 생각에 울어버리고 공연을 하지 못한다.
다카다는 리자밍의 아들을 데리고 오려고 생각하여
석촌이라는 곳을 찾아 아들인 양양을 데리고 오지만
양양은 아버지를 만나기릉 원하지 않는다.

양양과 길을 잃은 하룻 동안 그의 아들 켄이치는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그에게 유언을 남긴다. 이제야 화해를 하게 된 것이다.

다시 교도소로 리자밍을 찾아 온 다카다는 양양의 사진을
리자밍에게 보여주고. 리자밍은 다카다를 위해 공연을 한다.

장이모우가 다카쿠라 켄이란 자신의 우상이었던 일본배우와의
공연을 위해 만든 영화라고 들었는데, 솔직히 이 배우를 보기는
몇 번 본 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중국과 일본의 두명의 아버지와 두명의 아들 이야기이다.
중국의 아버지는 감성적이고 스스로를 마음대로 표현하고 살지만
아들과의 관계는 그렇지 못하다.
일본의 아버지는 무뚝뚝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다.
아들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들을 연결하고 극을 이끌어가는 것은
아들이라는 매개체, 부정의 표현이며 결국은 소통의 문제일 것이다

두 사람은 결국 아들을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사진, 유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서로가 소통하게 되며 이해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굉장히 자기 중심적이고 직접적인 교류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마도 이들은 만족했으리라 믿어진다.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배우를 통해서도 표현되어지기도
하고 극 자체를 통해서도 느껴지는 굉장할 정도의 절제미였다.

교도소에서 사진을 보고 울던 재소자와 리자밍의 모습에서도
난 엄격한 절제를 느꼈다. 아마도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직접적인 소통이 아닌, 하나를 건너 전해진 간접적인 형태의
교류라는 것과 또한 극의 흐름, 그리고 다카쿠라 켄의 절제된 연기와 캐릭터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 같다.

장이모의 초기 작품들과도 다르지만, 최근의 무협블록버스트들을 통한
넘쳐 흐르던 과잉영상과 부족했던 감성을 벗어난 것 같다는 느낌이다.

천리주단기는 관우가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수천리에 이르는 길을
혼자 달려가는 이야기라고 한다.

경극의 한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관우가 아닌 다카다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중국 내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면서의 감정과 이해의 폭과 과정을 같이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절제미와 억눌림의 선상에서 어떤 식으로 느끼느냐가
이 영화를 판단하거나 호오를 결정할 것 같다.

나는 억눌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볼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위에 두 포스터가 있지만 오리지널 포스터 보다 더 나은 한국판 포스터인것 같다.

Stormbreaker 2006

꽤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Teenage 007이라고나 할까.

그냥 아무 생각없이 볼만하다.

난 재미는 별로 못 느꼈음.

부서진 BMW가 아깝다는 생각에 ㅜㅜ;;

그걸 왜 부수냐구..

Sep 19, 2006

하나비 (Hana-bi Fireworks, 1997)


北野武
Kitano Takeshi

일곱번째 작품.

솔직히 이 작품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란 말들 하더라.
하지만 나한테는 그렇게 많은 느낌을 주지는 않았다.

내가 느낀 것은 권태와 애증,짜증 뭐 그런 것들이다.

부인이 백혈병에 걸린 빚투성이의 형사. 니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 사고후 혼자가 된 호리베.

니시는 은행을 털고 부인과의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호리베는 혼자 살면서 그림을 그린다.

둘은 아마도 하나비. 즉 불꽃놀이와 같은 아름답고 타오르는 듯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다.

일에 치이고, 가족에 치여서 그들은 여유가 없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살인이고, 자결이며 그림그리기이고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본 불꽃놀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케시를 내가 잘 모르는 것은 그가 일본에서 대단한 위치의 코메디언이고,
외국에서는 저명한 감독이라는 그 괴리감을 겪지 못했음일런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상징과 기호 그리고 캐릭터들을
잘 못 느꼈다. 솔직히 집중은 잘 되지 않았다.

아마 다음에 볼 기회가 있다면 제대로 보고 보충감상을 적어야겠다.
지금은 어떤 영화던 잘 와 닿지를 않고 있다.

점점 뭔가가 부족한 것이 느껴진다.


짝패 City of Violence 2006

류승완
정두홍류승완이범수
주먹이 온다를 기억하고는 조금은 기대를 했었는데,류승완은 완벽하게 그 기대를 배반해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의 장기인 액션마저도 굉장히 보기가 불편하고 영화만큼이나 이해가 안가는 느낌.
그냥 자기가 해보고 싶었던 액션장면을 이것저것 막 섞어놓은 듯하다.
남들이 말하기에도 액션씬은 좋다고 했는데.어떤 점에서 좋았다는 것인지.옹박, 성룡, 야마카시, 킬빌 등등 이것 저것 짜깁기라는 느낌이다.
일단 액션에 사실성도, 상상력도 부족하다.내러티브는 말하지 말자. 이런 엉성한 스토리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이류승완의 경우, 액션이나 폭력의 미학일텐데.전혀 보이질 않는다.
이 영화에는 류승완이 없다.

짧은 감상..

Ages of Lulu 1990

Spain
원조교제녀,
로리콘
변태들.
등등.
지금의 시각으로 이 영화를 표현한다면 위와 같은 말로 설명될수도 있을 듯하다.
사랑은 파격이 되어야만 강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사랑은 다 틀리니까.
여긴 파격만을 다룬다.
사랑은 없다. 욕망과 섹스만 있다는 느낌.


Princesas 2005

Spain
창녀들 이야기.
그들의 삶과 불법취업
폭력
갈등.
새로울 것도, 놀라운 것도 없다.
글쎄.



Benny and Joon 1993

Johny Depp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
내가 이 배우를 처음 본 것은 아마도
Edward Scissorhand였던 것 같다.
이 배우는 항상 독특한 캐릭터를 맡으면서도
그 것을 잘 살리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Benny 와 Joon은 남매이다.
Joon은 어릴 적의 사고로 인하여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Benny는 그런 동생을 혼자 두지 못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돌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Sam과 같이 지내게
되면서 그들의 숨겨져 왔던 진짜 문제와
각자의 사랑을 찾고 극복해나가는 이야기이다.
편안하게 보고 있으면 되는 영화란 생각.
그래도 재미가 없다면 Johny Depp만 쳐다봐도 된다.



토네이도 Category 7 2005

Gina Gerson
Category 6, 7 의 폭풍에 따른 천재지변
인간의 환경파괴로 인한 것.
좀 황당한 해결방법이긴 하지만
볼 때는 그런대로 지루하지 않게 봤다.
그런데 영화가 너무 길다.
2시간 반 이상 보기에는 좀 힘들다.



별에 소원을(星に願いを)

다케우치 유코때문에 본 영화홍콩영화 성원의 리메이크라는데 그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고유코는 유코만의 매력이 넘친다.
죽어서야 이루는 사랑이야기.솔직히 별로 애틋하진 않지만그래도 참을 만 했다.
그건 유코 때문이다.



angel-a

난 프랑스 영화가 별로다.
단적으로 말이 너무 많다는 느낌이랄까.
이야기는 어글리한 프랑스판 선녀와 나무꾼이다.
흑백에다, 프랑스 선녀는 폭력적이다.
나무꾼은 멍청하고 말만 많다.
둘은 사랑을 하게 된다.
아직 애는 안 낳았다.
근데 나무꾼이 매달려서 잡았다.
이제 선녀와 나무꾼은 앞으로도
사기치며 잘 살아갈것 같긴 하다.
프랑스 영화 볼 때마다 적응이 안된다.
자기네 말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라고
지랄을 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래 좀 심한 표현이다.
그치만 나한테는 콧소리로 밖에 들리질 않는다.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 The dream life of angels/la vie revee des anges

프랑스 영화
기이한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
결국 그녀가 보는 것은
뭘까?
재봉공장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같이 살게 되고 어울리게 된다.
한명은 사랑을 하게 되고
그 사랑에서 헤어 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둘은 헤어지지만
바로 그 때
자살하고 마는 ....
하여튼 프랑스 영화는
아니 프랑스는 감성체계가 많이 틀린 듯 하다는 느낌.

Hipnos 최면

Spain
최면
다 보고 나면 허무해지는 영화.
나오는 말. 떠거랄 뭐냐고?
처음의 흥미진진했던 스토리와 구성은 끝에 가서
피시식 다 꺼져 버린다.
결국은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한 환상이었을 뿐이란거.
그녀가 실제로 보고 겪은 것은 처음의 잠깐과. 기억을 되찾는 부분 뿐이었다는 말.
뭐 결국 천벌을 받아 다 죽고 만다는 이야기?
죽는 것은 쉽다.
뭔가 메시지를 느끼긴 했는데 그건 이영화로 인해서 느꺼져지는 것들은 아닌 듯.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들, 기억하고 있는 것들. 보고 있는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면 파국이 보인다. 그럴 경우?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진실인가? 진실은 믿을만한가?
만약에 모든 것이 조작되고 내가 알고 있는 것과 틀리다면?
뭐 그런 의문을 제시하는 영화인 것 같은데.
설득력은 좀 약하다.
또 보는 도중 베아트리스가 그 소녀라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기에 반전으로도 약하다.
뭐 그래도 흥미로운 접근인 것 같기는 하다.
ps. 여자 배우는 이쁘더라. ^^

Rainmaker 1997


Francis Ford Copolla

Matt Damon

법정드라마
존그리샴

초보변호사와 거대보험회사의 소송
시스템 속의 이기심과 개인의 희생.

희망을 가지고 살수 있는 세상에 살고 싶다.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고,
그렇다고 해도 바뀐 것은 없다.

웬지 산만하게 느껴지는 영화.
그러나 재미있게 볼 수는 있다.
찾다 보면 헛점도 많겠지만
그정도는 넘어가 주자.
법정드라마를 좋아한다면
볼 만하다.

Last Holiday



'Smoke'의 웨인왕을 기억하며 보았다.

하지만 smoke의 일상에 대한 성찰과 감동은 없었다.

결국 smoke는 원작의 힘이 컸다는 말인가?


영화내용은 좋다. 기계결함으로 인한 오진으로
죽음을 선고받은 조지아는 평소 꿈꾸던
카를로비바리의 유명한 호텔에서
꿈꾸던 모든 것을 해보려고 한다.

거기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산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지만, 조지아의 남은 시간은
열심히 자신에게 충실한 것 뿐.

결국 이런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생명을 되찾으며 사랑을 성취하고
꿈을 이루어나간다.

그냥 재미있게 볼만은 하지만
웨인왕의 작품으로써는 많이 부족하다.
아니 스모크를 만든 사람이 이런 작품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ㅡㅡ;

An Unfinished Life 2005

< Lasse Halstrom
Robert RedfordMorgan FreemanJeniffer Lopez

There is reason for everthing 이라는 마지막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가정폭력에 관한 영화인 줄 알았다.
다 보고는 상실에 따른 가족의 삶과 그 극복을 다룬 것이라고 느꼈다.
진(J. Lo)은 딸 그리프와 함께 살고 있는데 애인의 폭력에 시달려 결국은 도피를 한다. 도피를 한 곳은 시아버지가 살고 있는 와이오밍.
아이너(R.Redford)는 미치(M.Freeman)와 함께 농장에서 살고 있다.미치는 곰의 공격에 당해서 심각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
아이너는 돌아온 진을 미워한다. 이유는 아들의 상실을 그녀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손녀와의 삶과 진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조금씩 가까워지고 네 사람은 하나의 가족이 되어나가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엄청 줄여보았다.
3명의 중요한 캐릭터는 각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아이너는 아들의 상실로 인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 상태이다.
미치는 곰의 공격으로 인한 상처와 아이너의 자기방조적 삶을 조용히 보고 있기만 한다.
진은 남편의 죽음이 자신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다.
또 곰을 잡고 풀어주는 과정과 가족의 해체와 재성립을 잘 조화시켜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당신의 선택이며
그에 따라 삶 또한 변화해간다.

Interview with the Vampire

Neil Jordan
Tom CruiseBrad PittAntonio VanderasChristian SlaterKirstin Dunst
지금 봐서는 초호화 배역이라고 할 만하다.물론 당시에도 그랬겠지만.왜 전에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이 작품을 보고 Ann Rice의 원작이 보고 싶어졌다. 꽤 긴 연작시리즈로 알고 있다.
원작을 보지 않아서 원래의 설정이나 배경은 모르겠고,이 영화의 설정은 일반 흡혈귀와는 조금 다르다.마늘, 말뚝. 십자가. 등등은 다 필요없다.단지 햇빛은 피해야 하며, 관은 필요하다.
아내와 아이를 잃은 루이(브래드 핏)은 죽음을 원하며방황을 하고, 이 때 나타난 레스타트는 그에게 죽음과 생의 선택지를 준다.
루이는 생을 선택하지만 흡혈귀로써의 삶은 죽음 그 이상이다.루이와 레스타트는 끊임없이 충돌하지만클라우디아라는 소녀를 흡혈귀로 만들어서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세월이 지나면서 클라우디아는자신의 성장과 삶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반항을 시작한다. 그녀는 레스타트를 살해하고루이와 함께 파리로 떠난다.
동족을 찾아다니던 루이는산티아고와 알만드를 발견하고그들의 연극을 빙자한흡혈의식을 보게 된다.
알만드는 감정을 가자고 있는 흡혈귀인 루이에게 새로운 삶을 원하고산티아고는 동족살인자인 클라우디아를죽이려고한다.하지만 클라우디아의 죽음으로 각성한루이는 이 모든 것이 알만드의 음모인 것을 알게 된다
다시 고향인 뉴올리온즈로 돌아온다레스타트를 다시 만나고 헤어진다. 그는 끊임없이 살아간다눈물 흘리는, 인간을 닮은 뱀파이어로써계속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흡혈귀로써의 삶을 원하는 기자의 요청을 거절하고그는 떠난다.막상 죽음에 직면하자 겁이 난 기자는 도망을 가지만이때 나타나는 레스타트.
있지도 않은 뱀파이어 영화에서 흡혈귀로써의 삶을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흡혈귀와 인간이 다를바가 뭐 있겠는가?
흡혈귀가 가진 모든 특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다. 육식동물이며, 타생물을 죽임으로써 살아가고 있고,자신의 피를 전함으로써 종족번식 또한 강하다. 단지 감정이 없고 눈물을 흘릴 수 없을 뿐.
점점 인간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정도만 생각하기로 하겠다.
아마도 앤라이스의 소설을 언젠가 읽어보고 좀 더 생각해보련다.

Sep 11, 2006

천하무적 (天下無賊: A World Without Thieves, 2004)

결국 여자의 양심 찾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한 순수소년의 6만원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지는 모르겠다.
물론 의미를 붙일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환상에 빠져사는 꼬마 하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
그것도 현직 도둑놈이 말이다.
뭐 처음의 흥미로운 전개에 비해서 확실히 후반부는 젠장이다.
그냥 오락영화로 가려고 했으면 끝까지 가던지,
아님 소년의 순수를 더 강조하던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결국 감독의 생각은 댓가 없는 결과는 없다는 거겠지.
등가교환의 법칙인가( 강철의 연금술사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볼만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왠지 씁쓸해지는 맛이다.

유덕화의 모습은 과거 홍콩영화의 전성시대를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는 한국의 배우들과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이 몇 나온다. 여주인공은 현영과 좀 비슷하게 생겼다.
현영이 내게 주는 이미지는 푼수과이며, 왠지 정신이 없어지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 여주인공은 현영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은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그리고 재섭는 꼬마넘은 양동근 느낌이다. 멍청한 양동근이미지.

펑샤오강이라는 이 감독이 중국 최고의 흥행감독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스타일의 영화가 중국인의 취향인가 보다.

취향에 따라서는 선호작품이 될 수가 있을 듯하다.

야한 영화라고 해서 봤다. 아니었다.

세일즈 우먼 le secret

마리의 이중생활

꽤 유명한 영화라고 한다.

몰랐다.

야한 영화라고 들었다.

그래서 자막도 없이 보다 쏟아져 나오는

에스파뇰의 홍수에 깜짝 놀래서 정보를 찾아 보았다.

단순야동은 아니었다. 볼까 말까 망설였다.

프랑스 영화인데 왜 영자막도 없으면서

에스파뇰 더빙이란 말인가? 젠장

억울 했다. 그래서 대충의 플롯만 숙지하고 영상만 봤다.

대사는 대충 감으로 때려잡았다. ㅜㅜ


내용에 있어서도 내 편견에 의하여 굉장히 싫어하는 주제이다.

주제를 싫어한다기 보다는 상황을 싫어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i am a sex addict 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일부일처제란 약속하에 있다면 또 다른 사랑을 찾았으면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리는 둘 다 포기하지를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선택을 보여주고는

상대방에게도 선택을 강요한다.

그래 페어하다라고 느낄 수도 있다.

자신은 두개를 선택하고 난 이런데 넌 어떻게 할래하면서

자신의 선택을 들어주기를 바란다.

물론 들어주지 않아도 관계 없다.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은 하나가 더 좋은데 하나는 버리기 싫다는 의미라고 느껴졌다.

나에게는 하나를 포기하라는 의미의 선택을 강요한다.


그래 여자는 행복한가? 건실한 남편에 귀여운 자식 행복한 가정

그러나 그녀는 불행하다. 그런데 행복을 찾은 것 같다.

외간 남자와 격정적인 정사와 감정의 교류가 행복인가?

그러면서 남편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말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의 혼란 때문에 선택의 강요라는 형태로 들어나는 것임은 알겠다.


새로운 사랑 찾아라 관계 없다.

사랑을 찾았으면 그쪽으로 가라.

차라리 일부일처제의 불합리함과 편협성에 딴지를 걸어라.

그것을 페미니즘이니 자아 찾기니 포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찾았으면 그냥 제발 떠나라. 제발 하나는 포기하란 말이다.

책임지기 싫으면 떠나라, 그 대신 권리도 포기하라는 말이다.

조금 흥분했나 보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편견이 굉장히 작용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이런 상황의 전개인 줄 진작 알았다면 아마 보지 않았을 것이다.

딴지 걸고 대비시키려고 작정한 영화이다.

흑백의 대조와, 미국남자 프랑스 여자. 자유분방 싱글, 행복해보이는 유부녀.

그래서 더욱 짜증이 난다.

그녀는 과연 행복할까? 어쩌란 말인가?

행복하지 않으면 다들 바람 피우라고?

아 오해할까 싶어 덧붙이고 싶은 건

주인공이 남자이던 여자이던 내 반응은 똑 같다.

쳇 정서가 너무 틀리기 때문임 또한 인정해야 할까나? ^^




육체의 학교 (The School Of Flesh, L'Ecole De La Chair, 1998)


왠지 야한게 보고 싶어서 봤다.

제목에 완전히 속았다.

아는 이름 - 이자벨 위페르

원작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이라는 것 같다.

한 중년여인과 청년의 사랑이야기.

정서가 틀려서인지 생김새가 틀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프랑스 영화에 대해서는 왠지 모를 모호함을

많이 느낀다. 뭐 언젠가는 명확해지겠지.

사랑, 소유, 집착, 삶 그런걸 말하려고 한 것 같다.

Brassed off 1995


Michael Herman

Ewan McGregor

1984년 부터 영국에서는 탄광폐쇄로 인하여 25만이상의 실직자가 발생을 했다.

요크셔 지방의 그림리 탄광은 100여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이 물결을 피해갈 수는 없다.

전통깊은 브라스밴드인 그림리 탄광밴드는 탄광의 폐쇄여부에 따라

그 존속이 결정되어질 것이다.

단지 밴드의 단장인 대니만이 음악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이 전부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은 음악만으로 되지를 않는다.

탄광의 대부분 광부들은 이미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폐쇄에 따른 퇴직금만으로는 실직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하지만 일방적인 압력에 대해서 그들은 저항할 방법도 없다.

우여곡절 끝에 앨버트 홀에서의 밴드경연대회 결승전에 참석을 하게되고

병원에서 가까스로 나온 대니는 우승 소감을 말하면서

자신에겐 이 트로피가 아주 중요하다고 밷드단원들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 자체라고 말한다.

그 음악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라고

난 그것을 말하고 싶다고 한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권익을 위해

개인과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진보인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승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들의 말을 당신들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단순히 탄광의 폐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탄광은 생명의 터전이다.

진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를 위한 진보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도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영국식 액센트가 너무 강해서 알아듣긴 좀 힘들었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한 것 같다.

광부의 입장에서 찍다보니 그렇겠지만 조금은 편파적이긴 하다.

만약 본다고 해도 후회는 하지 않을 만 하다.

선택 2003 The Road Taken


보는 내내 울었던 영화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의 홍기선

나는 당신의 사상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 볼테르

영화의 시작은 위의 글로 시작해서

아래의 말로 끝난다.

1951년 10월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시작한 김선명은
1995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수감생활 43년 10개월 중 39년을 불취업으로
방안에만 갇혀 지냈고, 그 중 21년을 독방에서 지냈다.

석방된 뒤 선명을 본 90의 어머니는
2개월 뒤 돌아가셨고, 그 후에도 동생들은
선명을 만나주지 않았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고,
9월 2일, 치과기공일을 하던 선명은
다른 62명의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북송되었다.

일단 영화만 본다면 단순 나열이 주를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후반부 결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영화라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었다.

인간극장이나 다큐를 보는 듯 했다.

쉽지 않은 주제와 우리나라 근 현대사를 관통하는 40 여년 간을 다루는

소재의 무게감이 영화의 웬지모를 엉성함을 덮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후반부에 다가가면서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추어 간다는 느낌이 들긴 햇지만

물론 영화내에서 어떤 상징과 기호 같은 표현들을 일부러 자제한 것 같은데

은유적 표현이나 대사를 억제하고 직접적인 대사와 김선명의 시각에서만

즉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처음에 시작하면서 터널 장면을 보면서는 후샤오시엔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 영화의 구조나 형식 등 모든 것은 결국

이데올로기, 한국 근현대사, 인권, 삶, 가족을 조금씩 다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결국 이데올로기, 삶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물론 삶에 모든 것이 압축되는거 아니냐? 그렇게 물어본다면

표현을 달리 해야겠다. 양심의 가치라고 표현하면 정확할런지 모르겠지만

삶에서의 최우선 가치를 이들은 양심이라고 표현한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인정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러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가장 먼저 남북문제.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이데올로기 문제는 내가 논하기엔 힘겨운 주제이기도 하고

옳고 그름을 논하기 보다는 현 추세에 영합되어지는 부분이

더욱 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오태식의 말처럼 동구도 소련도 붕괴되었으니 하는 식의

단순한 의미는 아니다)

대림 되는 두 이데올로기에 개인적인 여러 관점들이 혼합되어 있지만

주 되는 두가지는 오태식과 김선명의 관점일 것이다.


통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으면서도

김선명의 입장이 더욱 강하다(그럴 수 밖에 없다. 시점 자체가)


둘은 기본적인 배경 자체가 극과 극이다.

경찰에게 자신이 빨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가족이 죽음을 당한 김선명

공산주의자에게 가족과 자신의 다리를 잃은 오태식.


오태식은 말한다. 당신들은 잊혀졌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삶을 낭비하고 있느냐?

김선명은 말한다. 내 삶에 가치있는 일을 하나는 하고 싶다. 이건 낭비가 아니다.


오태식은 묻는다. 그럼 김일성을 존경하는 것은 뭐냐?

통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북 주도하의 통일은 원하지 않는다.

그럼 남 주도의 통일이 된다면 당신은 관계없는가?

내가 정의가 힘이 있다면 너 같은 빨갱이는 벌써 없애버렸을 것이다.


김선명의 대답은 솔직히 괘변이었다. 내가 누구를 존경하던, 김구선생을 존경하던,

매국노 이완용을 존경하던 그것은 내 자유라고. 통일을 해서 모두가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고 싶을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괘변이라고 한 것은 매국노 이완용을

예로 들은 부적절함이었고 논리에 있어서 억지스러움을 말한 것이다.

매국노 이완용은 아무리 대비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들어서는 안되는 예이다.

이건 분명 잘 못 된 것인데(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그걸 자유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오히려 관철 하지 못할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오태식은 말한다.

진 싸움에 끼어들어서 감옥에 갇혀 있는 당신은 무었인가 하는 말이 계속 떠오른다고

그것은 자식의 성장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과거의 가치가 퇴색이 되었음 을 표현하는 것이다.


김선명은 말한다. 보통 감옥 밖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감옥내에 있는 것이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존중할 수 밖에 없다. 세월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말 중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불평등한 입장에서 이루어졌고 탄압이 가능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김선명이 출소하는 그 감옥 속에서

오태식은 오히려 갇혀 있는 듯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진정 갇혀 있었던 것은 누구일까?

하는 의문과 비난일 것이다.

그리고 오태식에게 했던 말은 출발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둘은 어떤 벽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메꿀 수 없는 상처가 그 벽을 이루고 있기에 말이다.

김선명은 당신도 용서하라고 말한다. 자신 때문에 죽은,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은 것을 자신은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그 간극을 메꾸지 못한다면 결국 증오의 악순환에 따른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계속될 수 밖에 없음을 알린다.

그렇지만 김선명이 출소하는 장면에서 입고 있는 죄수복은 그 또한 오태식 처럼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처음에 이건 뭐야? 그랬다. 감옥에서 죄수복 입고 출소하는 경우도 있냐? 라는 )

뭐 결국 실제화면에서 그들은 평상복을 입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것은 영화적 표현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데올로기 충돌에서 비롯되어진 잘못된 증오의 결과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으며 남은 것은 상처밖에 없다는 의미이리라.


난 이데올로기가 굉장히 중요한 어떤 것이란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것이 대량학살이라던지, 어떤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때는 의미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아닌가?

어떤 이데올로기가 옳다 그르다, 더 낫다 못하다의 판단은 개인이 하는 것이며

그 개인이 모인 사회가 약속을 하는 것이리라. 거기엔 자유와 평등은 기본적인 베이스이다.

기본적인 베이스가 없는 이데올로기의 충돌과 우리의 의지가 아닌 조작되어진 열강의 파워게임이

우리나라를 이렇게 반토막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말이 굉장히 길어졌는데 여기까지가 이데올로기와 그에 따른 대칭축의 두사람을 생각해본 것이다.

위에서 길게 서술한 것은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집학적 관념과 그에 따른 개인의 선택 문제이리라.



이제는 좀 더 개인적인 인간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위의 것과 완전히 떨어질 수는 없지만)

흔히들 양심수라고 표현되어지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개인적인 삶을 억지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처음에 표현했듯 보는 내내 울었다고 했는데 난 이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과 그 가족을 보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스스로의 양심과 사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일 수가 없기에 그들의 가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종다리라는 양심수의 딸이 면회를 처음으로 온다(물론 자발적으로가 아닌 정부부처의 강권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만 괴롭히라고 한다. 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우리가 힘들고 고생해야 하냐고?

이제 곧 결혼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에게 피해입히고 싶냐고?

종다리는 시간이 지나면 이유를 알게 될거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내가 빨갱이 딸이라고 다른 애들이 떠밀 때 당신은 어디있었냐면서?

그러고 일어나는 딸의 등은 곱추가 되어 있었다.

결국 자신의 양심이 딸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나도 울었다. 이렇게 만든 무서운 이데올로기들이 싫어졌었다.

그들은 늘 고문을 당했고, 배고픔을 겪었고 낙이라고는 통일의 소식과

북조선이 자신을 구할 것이라는 희망이 전부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그래서 그들은 갇혀 있는 것이다.

단지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말한다. 전쟁중 급조된 국방경비법 위반이라는 날조된 법으로

어떻게 자신들을 40여년이나 가두고 있을 수 있냐고?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서두의 볼테르의 말을 인용했듯이 사상이 다르다고 탄압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글을 계속 적으려면 여기서 노선을 정해야 한다고 한다(내 친구의 충고라고나 할까? 뭐 그렇다)

그렇지만 솔직히 힘들다. 한국전쟁이라는 우리나라 최대최악의 비극으로 파생되어진

문제,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악몽 속에, 나는 어느 쪽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정해야 한다면 여기서는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볼테르의 말을 인정하고 찬성한다.


이데올로기 간의 충돌과 찬반으로 인하여 인간의 죽음이 파생되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전에도 언급했지만 종교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요즘이야 이데올로기 충돌의 냉전시대라기 보다는

새로운 종교전쟁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되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민족 갈등을 포함한)


글이 굉장히 길어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마무리는 지어야 하겠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권문제와 연관되어진 볼테르의 말에서 모든 것이 나타나 있다.

김선명은 통일이 되면 결혼하고 싶어했던 순수한 신념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겪었었던 모든 것들은 그를 70이 넘은 노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잊혀진 인물이다. 하지만 잊혀져서는 안되는 한국사의 치부를 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의미가 있다.

남북 문제를 다루는 여러 영화를 보면서 고민이 없고 성찰이 없어 아쉽다고 말하곤 했었다.

이 영화는 제대로 그 맥락을 짚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갈등으로 시작해서 갈등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복제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고 아쉬워진다. 물론 결론을 내라는 말은 아니다.

한국현대사가 갈등과 증오로 점철되어진 역사인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단지 주제와 소재의 깊이감에 비해 영화는 왠지 주눅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잘 못 판단하는 건 아닐까?

내가 편견때문에 잘 못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쨌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계속 되어야 한다.

이제 제대로 다루어야만 할 때이다.


생각 나는 대사가 있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를 고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대사였다.

같은 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왠지 후자가 가슴에 와 닿는다.

둘중에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나머지 하나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를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 밖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이기에.

I am a Sex Addict



솔직히 제목보고 봤다. 인정한다.
진짜 섹스중독증에 걸린 이야기였다.
흥미있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은 결혼식 촬영이었다.
좋게 생각해보려고 노력을 조금은 했지만
결론은 자기고백과 극복이었으며
이 결혼에 대한 의미부여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가 솔직한 느낌이었고
여기서 글을 끝낼 수도 있겠지만
보면서 들었던 여러가지 생각들을 적어 보려고 한다.
카베이는 필름메이커이다.
그는 Prostitute Festish이다. 창녀집착증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Sext Addict 섹스 중독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많은 여자를 만난다.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을 두고도
그는 자신의 섹스중독증을 유지하며
또 그것을 파트너에게 정직하게 말하며 그것을 이해해주기 또한 바라고 있다.
솔직히 미친 놈 아닌가? 과거의 일도 아니고 현재진행인 것을 말이다.
monogamy 일부 일처제라고 단순히 번역할 수도 있는 현재의 시스템상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거의 힘들 것이다.
또 그것이 당연시되고, 법적으로나 관습적으로 정착이 되어왔기에 말이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여러번 결혼이 파탄에 이르고, 정상적인 관계의 유지가
어렵다. 그는 자신의 페티쉬를 상대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또 이해를 바라면서도
상대방의 외도나, 자신 이외의 관계에는 강한 질투와 소유욕을 또한 가진다.
이런 이율배반이라니. 그러나 그것은 모든 남자들, 아니 사람들이 가지는 당연한 것
일런지도 모르겠다. 뭐 나 또한 그런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대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기본적인 인간의 소유적 본능에 기인하기도 할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자신이 사겨왔던 모든 여자들을 자신은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섹스중독증이며 알 수 없는 집착에 의해 다른 여자(창녀)를 찾는다.
창녀라는 표현이 적당한지는 모르겠다. 국어로도 여러가지 말이 있겠지만
대부분 비하의 뜻 비슷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따라서 Postitute이란 말을 쓰는게 나을 듯 하다
(whore, slut등의 말은 비하의 의미가 강하다고 알고 있다 화냥년이나 걸레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
이 영화는 거의 셀프카메라와 재현드라마 그리고 다큐적인 성향을 띄기도 하지만
셀프카메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혀 객관적인 시각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상대방의 표현은 단지 싸우고 힘들어하고 알코홀릭의 성향만 보여줌으로써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모든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섹스중독증인데 말이다.
그냥 그렇게 끝이 났으면 인간본성적인 측면에서, 아니면 심리학적 측면에서
어떤 접근이 가능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monogamy에 대한 의문도, 섹스중독증에 대한 해결 방법 또는 그 근원에 대해서는
접근이 없다. 단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일반화가 힘들다. 섹스중독증에 걸린 여러가지 사람의 이야기를
치료모임에서 잠깐 언급하지만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결국 그는 한 여자와 결혼하면서 그녀를 만나면서
끊임없이 싸우면서 그것을 해결했다고 한다.
해결이 된것일까?
영화가 결론을 꼭 내릴 필요는 없다.
모든 의문과 문제들만 던져놓고 자신은 빠져버린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래 결혼 생활 행복하게 해라.
그 말을 듣기를 원하는가?
일부일처제란 관습적, 법률적 제도와 섹스 중독증이란 병과의 충돌을
제기 했으면 그 에 따른 다른 사람의 시각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위 관습과 병은 개인적 소사로 치부될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지 않은가?
결론은 상대와의 관계, 사랑이 해결한다는 듯한 결론이 나오면서도
그는 과거의 여자들을 모두 사랑했다고 한다.
사랑의 질이 틀린 건가? 모르겠다.
그냥 드는 생각이다.
사랑을 하는 방법에 있어 사람들은 모두 다르겠지만
어떤 제도와 약속에 얽매이면서 다 가질 수는 없을 듯 하다.
일탈할 수도 벗어날 수도 있다.
그 제도를 인정했으면 따르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끊임없이 제도를 부정하는 행동을 했으면서도
또 다시 그 제도로 회귀하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다.
쳇 또 뭔가 이야기가 새어 가는 듯 하지만
이 작품이 영화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시도가 있었던 듯 하지만 새롭지는 않다.
그리고 설득력이 있지도 않다.
그냥 셀프 결혼식 촬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끝..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エリ エリ レマ サバクタニ: Eli, Eli, Lema Sabachtani?, 2005)

Eli, Eli, Lema Sabachtani?
주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내가 알기론,
이 말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하는 말이다.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는 말이다.
예수가 모두의 죄를 대속하는 고통의 끝 장면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어린 양의 피로 제사장에서 속죄하듯이
그 자신의 피로써 모든 죄를 정화했다.
대충 위의 글 정도의 기본 상식만 가지고 영화를 보자.
더 이상 알고 싶지 않기도 하고
솔직히 그리스도교(기독교라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다는 말도 있더라)에 대해선
별로 말하고 싶지가 않다. 또 이 영화가 어떤 종교적인 의미는 없으리라 생각해서이다.
浅野忠信。宮崎あおい
아사노 타다노부, 미야자키 아오이 주연의 영화이다.
때는 정확지 않지만 레밍병이라는 자살을 일으키는 병이 창궐하여
일본에서만 300만명이 죽음에 이르렀다.
미즈이와 아스하라는 기이한 잡음과 소음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하는
두 사람의 음악이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소문에
자신의 손녀(미야자키 아오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 온 부호
미즈이는 레밍병으로 연인을 잃었으며
아스하라는 레밍병을 앓고 있다.
자신들의 음악이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균의 먹이라는 것을 둘은 알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이다라고 말을 한다.
아스하라는 갑자기 자살을 해버리고
미즈이는 그를 화장한다.
미즈이는 손녀를 위해 자신의 연인을 치료하듯이
그녀에게 못 해줬던 연주를 손녀에게 대신해 준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듯이 말이다.
결국 바뀐 것은 없다.
손녀가 계속 살아갈런지 죽음을 택할런지 말이다.
그 음악을 같이 들었던 탐정은 집으로 가는 도중
갑자기 자살해버린다.
결국 그들의 음악은 뭘까?
치료일까? 아니면 오히려 병의 발원일런지도 모른다.
그들의 소음은 삶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건 아닐까?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떤 메카니즘을 촉발시켜서
생과 사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일런지도.
대충 위와 같이 보았다.
결국 죽음을 택하고 죄를 대신 사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런지도
모르겠다. 삶이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인것이다.
삶이 가치가 있는 한 나를 찾아오라고 전하는 미즈이의 말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종교에서 제물을 필요로 하는 것은 거의 희생양
즉 자신의 죄를 누군가에게
덮어 씌우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뭔가를 희생하고 버려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솔직히 영화 보면서는 아 거의 두시간 동안 잡음과 소음 열라 들었네 하는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잡음과 소음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부조화스러운 잡음과 소음이 진정한 자연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는 그것을 참기 어려워 하지만 말이다.
위 종교에 대한 부분은 그냥 얼핏 들었던 말에 내생각을 조금 붙인 것이다.(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적다보니 영화보다는 다른 이야기를 적은 것 같다. 쩝.

니라이카나이로부터 온 편지 [ニライカナイからの手紙]


蒼井優(아오이 유우)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본 영화.
난 역시 이 배우를 좋아한게 아니라, 하나와 앨리스의
앨리스란 캐릭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이쁘긴 하다.
하지만 그 전에 본 야오이 유우의 영화처럼 크게 느낌이 오진 않았다.
영화는 그냥 평이하다.
감정이 메말라서인지 몰라도, 별로 감동스럽지도 않고
좀 억지스러운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좋게 보자면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에게 성장할때까지
엄마의 존재를 잊어버리지 않게 하겠다는 좋은 의도겠지만
그건 최상의 경우를 가정한 것일 뿐이고,
나쁘게 보자면 엄마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후키(야오이 유우)를 모두가 속이는 것 아닌가?
13년동안 속이는 사람들이나
13년동안 속는 사람이나,
만약 가능하다면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영화니까 넘어가자. 영화의 설정 자체가 그러하니 말이다.
14통의 편지가 후키에게 힘이 되고 성장의 밑바탕이 되었다면
다행이다. 또 그 과정에 대해서 후키가 잘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아 물론 여전히 억지스럽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후키에게는 1년에 한 번 오는 엄마의 편지가 전부였을까?
1년이란 시간은 짧다면 짧을 수 있는 기간이지만
충분히 긴 시간이기도 하다.
1년 내내 편지를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편지와 관계된 이외 후키의 성장사는 전혀 없다는 게
어떤 갈등도 없다는 것이 이 영화를 지루하게 밋밋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 물론 도쿄로 떠날때의 충돌이 있긴 하다.
그 전까지 뭔가에 억눌린 듯한 후키는
과거의 엄마로부터의 편지에 힘을 받아
도쿄로 떠난다.
자신의 일을 성취한다.
그리고 사실을 안다.
마지막엔 모든 것과 화해를 하고 감사를 한다.
엄마의 편지와 후키의 성장과정을 끝에 하나씩 되짚어가면서
보여주긴 하지만 왠지 공허하다고나 할까?
뻔한 스토리임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확인해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론 극의 전개순서가 왠지 맘에 들지 않고, 편지와 성장의 과정을
쭈욱 늘여서 보여준 것도 좀 그러하다.
뭐 거기에 감독의 의도가 있긴 하겠지만, 왠지 와닿지 않는다는 느낌.
단지 유우의 캐릭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가 커서 그럴까?
아직도 앨리스를 찾고 있는건가? 그럼 안되는데. ^^

Sep 7, 2006

릴리 슈슈의 모든 것,リリイシュシュのすべて,All about lily chou chou 2001


リリイシュシュのすべて
岩井俊二

이 영화가 이렇게 어둡고 슬픈 영화인줄 모르고 봤다.
이지메, 왕따, 원조교제, 청소년이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는 줄도 몰랐다.
그냥 이와이 슌지라는 이름 하나, 위의 어둡기만 한 포스터 한장,
아오이 유가 나온다는 것 정도만 알고 접했다.
이 영화를 봄으로써 아마 이와이 슌지의 극영화는 다 본 것 같다.
tv영화였던 불꽃놀이......는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보는 이와이 슌지의 두개의 경향중 이 영화는 피크닉, 언두,
스왈로우 테일에 가깝다고도 볼수 있지만 또 다르다.
러브레터, 사월이야기, 하나와 앨리스와는 전혀 다른 것은 분명하다.

릴리슈슈라는 가수가 있다. 그녀는 에테르를 표현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우리를 대변할 수 있다....등등
난무하는 인터넷의 메시지들. 그런데 그걸 바로 화면 위에
뿌려버리다니, 적응이 쉽게 되지를 않는다.
적응이 될 때 즈음 영화는 끝이 나버린다.
처음에 자막과 타이핑 소리는 귀에 거슬리고
굉장히 영화에의 집중을 방해한다.
이해할 수 없는 정보들이 알수 없는 글로써 막 뿌려지고
흘러가버린다. 난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생각났다.
나는 위 작품을 영화보다는 이문열의 소설로서 기억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호시노의 행태와
주인공?의 모습에서 그러한 기분을 느꼈다.
이문열의 소설은 이 영화에서 처럼 소년기에 멈추진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기억들에서 변하지 않는 현재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으며
조금은 교훈적인 담론을 포함하기도 한다.(완전히 그러하진 않다)

한때 왕따였던 호시노와 이제는 가학자로서 지배자로서의 변화와
항상 그 자리에 있지만 굴복하고 마는 주인공의 끌려다닐수 밖에 없는
피수용자로서의 자기 인식은 비교될 수 밖에 없다.
츠다(야오이 유)와 쿠노의 대조적인 대처방식은 생명과 연결되어버린다.
츠다는 원조교제를 강요당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적 현실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날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쿠노는 츠다와 똑 같은 피해를 당하지만 오히려 지금까지의 자신을 버려버린다.
삭발을 통하여 어떤 경고를 하고 있다. 그녀는 아마도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주인공은 릴리슈슈의 콘서트장에서 호시노를 살해해버린다.
릴리슈슈의 에테르를 스스로 더럽힘으로써
호시노를 정화하고 자신을 정화시키려고 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릴리슈슈의 음악뿐이다.

극중 나오는 자막을 대충 본 관계로 그것을 유심히 한번 살펴봐야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지막 살인의 과정과 결과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고로 이 이상의 글은 무리. 따라서 나중에 첨부하겠다.

역시 극중의 인터넷 댓글이라고 할까?
그 지문들은 영화에 있어서 또 다른 다양한 캐릭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일단 넷상의 글 자체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필리아와 아오네코(青猫)의 정체부터 시작하자.
계속 보면서도 조금은 헛갈렸는데
필리아는 하스미 유이치의 분신이었고,
아오네코는 호시노였다.
이 둘은 서로의 정체를 모르지만 릴리슈슈를 통하여
깊이 교감하고 있다고 느낀다.
릴리슈슈를 통해서만이 서로의 존재를 느낄수 있고 인정할 수가 있다.

위에서 살인의 과정과 결과가 명확하지 않다고 표현했는데
결과라는 표현보다는 이후의 하스미의 행동이 모호하다고 표현하는게 나을 듯 하다.

지금 다시 보고 적는 것이라 일단 이전에 적었던 위의 글에 덧붙이라기 보다는
느낌을 다시 적어보련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릴리슈슈와 에테르라는 그들만의 용어를
이해해야만 한다.

에테르의 사전적인 의미는 (MS .Bookself 2.0)
1. 詩 하늘, 창공
2. 古 하늘을 채우는 정기
3. 빛, 열기, 전기, 자기를 전해주는 매질로 우주공간에 가득 차 있었다고 여기던 물질이다.
1. the regions of space beyond the earth's atomosphere : the heaven
2. the element believed in ancient and medieval civilization to fill all space
above the sphere of the moon and to compose the stars and planets.

(Collins Cobuild 5th ed)
Ether is a colourless liquid that burns easily. It is used in industry and in medicine as an anaesthetic.

콜린스 코빌드 사전은 별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새로 나온 사전인데 왜 이 모양인지)

이 영화에서 에테르는 위의 의미도 포함을 하지만 거의 릴리슈슈와 동일시 된다.
릴리슈슈는 에테르를 각성한 초월적 존재이며 모든 것을 치유하고 보듬어 안는 그들의 신이다.

그들의 인터넷 투고 글에서 보듯이 에테르의 의미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릴리 슈슈 또한 그들의 주관만이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호시노와 하스미, 아오네코와 필리아.츠다와 쿠노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대답은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릴리슈슈로 연결되어져 있다.
처음엔 아닐지 몰라도 그들은 릴리를 통하고 있다.
공통분모를 찾았으니 이제는 차이점을 살펴야 할 듯 하다.

호시노와 하스미
둘은 친구였다가 지배와 피지배 형태로 관계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둘은 비슷한 소심한 성격이었다.
하스미는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그의 변화는 오직 두번이다. 살인과 염색)
호시노는 오키나와 여행계획 때부터 조금씩 변화를 거쳐
오키나와에서 죽음을 경험며 캐릭터가 완전히 바껴버린다.

하스미는 소심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는 우울한 캐릭터이다.
그것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둘은 릴리슈슈를 통하여 필리아와 아오네코라는 가면을 이용해서만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말해줄 수 있다.

필리아와 아오네코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느낀다.


츠다와 쿠노의 캐릭터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같은 처지, 다른 선택, 다른 결말을 이끌어낸다.

즉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의 슬픔이란 것이다.

쿠노의 삭발을 본 츠다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고

연날리기를 통해 날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다.

그것은 죽음의 다른 표현이다.

영 정리가 안된다. 젠장.

모두가 쓸데 없는 소리이다
.

이들에게 릴리슈슈는 무엇인가?

그들이 살아가고 싶은 모든 것이리라.

그들이 말하는 에테르는 너무나 간절하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는 희망이며 휴식과 치유의 촉매일 것이다.


그들이 갈구하던 에테르는 이미 없어 졌고, 현실에 절망한다.

단지 들판에서 릴리슈슈를 들을 뿐이다.

어째 글을 적을 수록 정리가 안되고 있다.

그건 아마도 필리아와 아오네코가 나누었던 게시판 대화와

릴리슈슈의 이미지에 벗어 나오지 못한 것 때문인 듯 하다.


일본에서 중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

불합리한 현실에 살아간다는 것....



이와이 슌지의 "UNDO"와 궤를 같이 하는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

관객의 집중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 방해에 익숙해지면 영화는 끝나버린다.

화면에서 타자음과 함께 투덜대던 음악과 자막들은 종국에 가서

Undo의 풀어서 흩어져 있는 줄을 연상시킨다.

보는 내내 힘들었다. 젠장. 그것도 두번씩이나. ^^

키즈 리턴 (キッズリタ ン, Kids Return, 1996)


위 포스터의 카피를 제대로 표현한 듯하다."우리 이제 끝난 걸까?""바보, 우리 시작도 안했잖아!"
신지와 마짱은 학교의 소문난 양아치이다.금품갈취, 기물파손은 기본이다.어떤 복서에게 두들겨 맞고는복싱을 시작하는 마짱과 신지재능의 차이에 의하여 두사람의 길은 엇갈린다.한명은 복서로, 또 한명은 야쿠자의 길로한 때는 승승장구 하는 두사람.그러나 결국은 몰락한다.
그리고 만난 두 사람이학교 운동장을 자전거로 돌면서 하는 마지막 대화이다.
예전에 본 영화였다. 아마 끝까지 보지 못했던 것 같다.솔직히 다케시의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기대에 조금 못 미친다.물론 현재진행형의 청춘을짧은 시간동안 성쇠와 몰락을 모두 보여준다. 만화적일때도 있고, 너무나 사실적일 때도 있긴 하다.
스토리보다는 단편적인 주변캐릭터의 성격구성만으로 영화는 전개되는 듯 하다. 얼핏 보기에는 일본 학원폭력만화의 구성과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도 않는다. 엄연한 차이가 있다면 주인공에 대한미화와 우상화가 없다는 것이다. 보이는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에 있어 어떤 주관적인 사실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단지 위의 대사만이 유일한 자기 표현이다. 영화를 보았다는 느낌 보다는 그것도 별 생각없이 지나가는 말로 전해 들었다는 느낌이다.
이제 시작한 것이다. 주관을 가지고 이제 시작하자. 쳇 이렇게 되면 너무 교훈적인 전개일 듯 하고.그냥 별 생각없이 아 그렇구나 하고 봤다. 깊게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중요한 걸 놓칠 것 같은 영화이다.그들이 지나온 길을 보고 앞으로 가게 될 길을 생각해볼 뿐이다.

Sep 6, 2006

하나와 앨리스 (花とアリス: Hana & Alice) 2004

岩井俊二스즈키 안아오이 유우
상큼발랄깜찍발칙앙큼한 두 소녀의 우정과 사랑이야기.
하나와 앨리스는 어릴 때 부터의 단짝 친구이다.
두 사람은 등교하는 전차속의 한 남학생을 눈여겨 보고
하나는 그(미야모토) 에게 접근한다.
미야모토의 우연한 사고에 그를 기억상실증이라고 속여서
둘이 사귀는 척 연기를 한다.
우여곡절 끝에 앨리스까지 그 연극에 동원이 되지만
왠걸, 미야모토는 마크가 되어버린다.(앨리스에게 끌리게 된다는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밝혀지고, 하나는 미야모토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종지부를 찍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입장이었고
미야모토는 자신만의 입장이 있었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며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앨리스는 우연히 스카웃된 연예 기획사의 오디션에 번번히 떨어지지만
어떤 오디션장에서 발레를 통하여 강한 인상을 주고 잡지 커버 모델로
뽑히게 된다. 하나와 앨리스는 처음처럼 티격태격 사이좋게 그 잡지를
가지고 다시 길을 걸어간다.
무엇보다 먼저 아오이 유는 여기에서 너무 이쁘게 나온다. 거의 사기 수준이다.
아오이 유가 나오는 영화도 몇 보았는데 전혀 인상깊지 않았었다.
넷상에서 아오이 유가 귀엽고 예쁘고 어쩌구 하는 글을 보았어도
취향이 다른가 보다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이 영화를 보고 안 보고의 차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이쁘게 나온다. 이와이 슌지는 여자가 감성적으로 이쁘게 나오게 하는 천부적 재주가 있는 듯 하다.
아 물론 스즈키 안도 매력이 있다. 유가 없었다면 이 영화에서 정말 내 맘에 꼭 들 캐릭터이긴 하다.
아오이 덕분에 안은 이 영화에서 no2로 밀려나고 말았다.
하나와 앨리스에는 일단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와 길이 가지는 여러가지 이미지로 이루어진 듯 하다.
먼저 길이라는 이미지는 영화 전체에서 흐르고 있다. 하나와 앨리스의 접촉이 일어나는 대부분의
장소는 등교길이며 하교길이고, 어딘가를 끊임없이 걸어가면서 둘의 관계는 전개되어지고 발전되어진다.
그들이 실내에 있거나 멈추어 있으면 그것은 정체와 단절의 경우라고 느꼈었다.
만담을 하는 강당에서 둘만이 남았을 때, 앨리스는 이거 계속 해야 하냐고 묻는다. 이제 단절과 답보를
벗어나 같이 앞으로 걸어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였었다.
그들은 길을 통하여 중학교의 졸업을 보여주고 고등학교의 입학을 보여주고
이제 그들이 새로이 겪어나갈 인생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 억지스러울런지도 모르겠다(별로 자신은 없다는 말이다. 느낌이 그런 걸 뭐
아버지의 부재가 만들어 낸 이미지의 확장과 소녀들이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보았다.
하나나 앨리스 모두 집 내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실종이 되어있다.
하나의 정돈되고 깔끔한 소녀취향의 집은 아버지의 존재가 어떤 이유로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앨리스의 정돈되지 않은 난장판의 집은 아버지의 존재와 더불어 어머니의 존재조차 희미함을 말하고 있다.
아 물론 앨리스는 아마도 이혼한 부모때문에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 같다.
앨리스가 마크(미야모토)와 벌이는 추억 찾기 놀이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구체화이며
그 추억을 완성하고 스스로를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했었던 과거의 일들을 둘의 연애로 포장하고 위장하면서 앨리스는 마크에게서
남자가 아닌 아버지를 찾고 있다. 과거에 아버지와 보냈던 해변에서 잃어버린 하트 에이스를
마크가 찾아냄으로써 앨리스는 현실을 인식하고 아버지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마크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녀는 하나가 만들어 낸 기억놀이 속에서
불가능한 과거의 하트에이스를 찾음으로서
스스로 나아가야 할 길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 같다.
하나는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 자체가 거의 없는 듯 느꼈다.
그것을 미야모토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그녀는 미야모토를 통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냄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통한 추억만들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앨리스와의 갈등을 통하여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하나는 다시과거로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 꽃집귀신이라고 불리던 폐쇄적이고 고독한 시절에서 구해준 것이 바로 앨리스임을 자각하면서
그녀는 아버지라는 환상속의 추억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녀는 미야모토에게 눈물젖은 고백을 하면서
환상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사랑하는 친구를 찾게 되고,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 또한 가지게 될 듯하다.
이렇게 둘은 성장해 나간다
앨리스의 잡지 커버의 사진은 그녀들이 영화의 시작과 전혀 변하지 않은 듯 하지만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의 성숙과 발전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얼마전에도 적었지만 이와이 슌지의 감성은 정말 부럽다. 중3 고1시기의 사춘기 소녀들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다니 말이다.
끝에 나오는 히로스에 료코의 모습 또한 흥미로왔다.
러브레터, 4월이야기 를 잇는 이와이 슌지의 감성러브판타지인 것 같다.
ps. 아오이 유는 정말 이뻤다. ^^

맨 온 더 문 (Man On The Moon, 1999)


milos forman
jim carrey


Man on the moon
7년여 만에 다시 본 영화이다.
그 당시에도 극장에서 본 것은 아니고, irc를 통하여 캠버전의 저화질을 구했었다.

앤디 카우프먼이란 코미디언의 삶을 다룬 전기식 영화이다.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확신은 못하지만 얼핏 듣기로 사실이라고 들은 것도 같다.
그는 독특한 인물이다. 달리 제목이 달에 사는 사람이겠는가?
기존의 틀에 박힌 정형화 되어진 코미디를 거부하고 그는 창의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는 재미를 추구한다. 그것이 자신만의 재미이던, 타인과의 공유되어진 재미이던 말이다.
앤디 카우프먼이란 캐릭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재미를 위하여
토니 크리프턴이란 가상캐릭까지 만들어 내며 자신만의 창의적 재미를 추구한다.
여성을 비하하여 적으로 만들고, 레슬링계와의 대립 등 그가 하는 것은
모두가 싫어하지만 재미를 느낄 수 밖에 없는, 극단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를 싫어하는 극도의 안티는 엄청나게 존재를 한다.
결국 그의 과도한 재미의 추구는 그에 대한 대중의 거부로 나타나며,
그는 퇴출되고 만다.
더더구나 그는 폐암에 걸리게 되고, 모두에게서 거부당한다고 느낀다.
이제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그의 꿈이었던 카네기홀에서의 단독공연을.
그 공연은 감동적이고 훌륭했으며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다.
이제 그는 자신이 살기위해서 별의 별 방법을 다 동원한다.
그가 처음 암이라고 했을 때 그 누구도 믿지를 않는다.
또 다른 이벤트이다. 사람 엿먹이는 골탕먹이기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의 병은 사실이었고, 돌팔이 병원에서 잘못된 치료로
그는 목숨을 잃고 장례식을 치룬다.
장례식은 그 답다. 노래 부르고 웃고 울리는
다시 보게 될 것을 말하며 그는 이별을 한다.

그러나 1년 후 어느 공연장에서
토니 크리프턴은 그가 하고 싶어하던 공연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잘 살고 있었다.

위 내용은 굉장히 줄여진 것이며 흐름만을 기술한 것이다.
영화에서 앤디카우프먼이란 캐릭은 굉장히 까다롭고 불편하고 짜증나는 스타일이다.
실제로 마주 대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비우고 채우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것 만으로도 앤디카우프먼이란 사람에 대해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먼저 생각이 들어지는 것은
창의적인 만들기, 즉 예술과 매체에 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코미디는 앤디 카우프만에 있어 예술이요, 창의력의 총집이다.
하지만 산업적인 측면에서는 시청률을 담보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발달된
형태의 상품중의 하나이다.

토니와 앤디의 동시 출연 장면 후 샤피로가 이렇게 묻는다.
단지 둘만을 위한 재미는 방송에서 원하지도 않고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더구나 코미디는 관객을 웃겨야만 하는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장르이다.
토니에게 중요한 것은 재미이다. 그는 남들이 왜 웃는지를 잘 모른다.
웃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자신을 재미있게 해 주는 것을
끊임없이 찾고 행하는 것이다. 나머지의 평가나 타인과의 공유는 그에게 있어
전부의 의미는 아니다. 오죽하면 그 자신이 재미있다고
공연장에서 위대한 개츠비 한권을 다 읽어주겠는가?

예술적 측면과 산업적 측면은 항상 떼어질 수 없는 관계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두 측면이 다 중요하다. 어느 부분에 집중을 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표현을 해야만 자신의 의지와 논지가 타인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앤디의 짜증날 정도로의 자기추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짐캐리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영화 이후, 단순한 코미디언이 아니라고 느끼기 시작했었다.
아마 이 역할을 저렇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짐캐리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00년 초에 본 몇 몇 영화들 중 being john malkovich, girl interrupted등과 함께
그 당시 좋아했었던 몇몇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 또한 즐겁다.
아쉬운 건 내가 미국 코메디를 제대로 이해 못한다는 것이 문제일뿐이다.
앤디가 웃길때 같이 웃어야 하는데, 조금 느리거나 생각중이었다. 젠장.

Sep 5, 2006

천국을 향하여 Paradise Now

하니 아브아사드


위의 한국포스터 카피는 마음에 안든다.
Paradise now
천국은 어디인가? 천국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현 지구의 종교갈등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그들은 분명 억압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테러를 한다. 왜 할까?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자이드는 말한다.
존엄성이 없는 삶은 굴욕이라고.
그들의 삶은 자유가 없는 감옥속에서 존엄을 무시당하는 삶이다.
솔직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뿌리깊은 갈등과 첨예한 이익의 대립은
어디서 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른다.
따라서 영화자체만 이야기하고 느낀 것을 적어내려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조금은 정리 될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이스라엘군이 경비를 서고 있는 곳에 수하가 귀향을 한다.
자이드와 할레드는 팔레스타인 점령지구에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다.
차량정비를 하던 그들은 저항조직에 의해 순교자로서 선택을 받으며
그것을 기꺼이 받아 들인다.
자이드는 새벽에 수하를 방문하고 약간의 대화를 하게 된다.
그들이 존경하는 영웅 "아잠"의 딸인 수하는 테러가 아닌 평화로운 방법을
선호하며 공존하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것이라고 믿는다.
자이드와 할레드는 순교자의 비디오를 찍은 후 텔아비브로 떠나가지만
이스라엘 군에 발각이 되면서 자이드는 고립이 되어버리고
할레드는 돌아와서 자이드를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
자이드는 철조망을 다시 넘어 버스에서 폭탄테러를 하려고 하지만
그 전날 수하와의 대화와 버스에 탄 어린아이의 모습에 그것을 포기한다
자이드는 다시 점령지구로 돌아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할레드와의 만남은 계속 엇갈리기만 한다.
자이드는 계속 고민하고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할레드는 아직까지 고민하고 있지 않다.
자이드는 수하를 다시 만나고 그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매국노 아버지의 처형과
수하의 아버지인 영웅 아잠을 이야기 한다. 그가 철조망을 처음으로 넘어서 본 것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친인을 둘러 봄으로써
현실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수하와의 키스 후 그는 떠난다.
자레드를 기다리던 할레드는 수하와 만나고 그가 있을 무덤을 향해 쫓아간다.
가는 도중 수하와의 이야기를 통하여 조금은 변한다.
자이드는 할레드와 저항군 본부로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은 점령지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이다.
자이드와 할레드는 텔아비브를 차를 타고 지나간다. 그들이 본 것은
다른 세상이다. 발전된 도시와 자본적 풍요를 보게 된다.
할레드는 자이드를 설득해서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만
자이드만이 텔아비브에 남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스토리의 전개이다.
간단히 하자면 자이드와 할레드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젊은이인데 이스라엘 폭탄테러의 순교자로
선택을 받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일 것이다.

솔직히 양측의 배경과 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은 앞서도 말했고 그에 따라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칭축을 따라가 볼 수 밖에 없었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것은 뭐라고 해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점령자와 피점령자의 관계이다.
양측은 모두 자유와 평화를 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의 선택과 결말은 항상 유혈과 폭력이다.
팔레스타인은 실제로 억압받고 갇혀 있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이 피해자인 척 한다고 느낀다.
점령자가 어떻게 희생자가 되냐고, 그들이 억압자이자 희생자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순교자가 되고 살인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수하와 자이드이다.
둘은 서로에게 이성적인 끌림을 느끼지만 그들이 바라 보는 것과 겪어온 것은 반대이다.
수하는 저항세력의 영웅 "아잠"의 딸로서 팔레스타인 내에서는 혜택을 받고 자란다.
더우기 불어권에서 생활을 했기에 이 갈등에 대해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수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녀는 죽은 영웅보다는 살아있는 아빠를 원한다.
자이드는 매국노로 처형당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핍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영웅을 꿈꾼다. 팔레스타인의 불평등한 현실밖에 아는 것이 없다.
타인이 그를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고 보고 있다.

셋째. 자이드와 할레드
이 두 캐릭터에서는 입장의 변화와 노선의 변화가 흥미롭다.
처음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은 자이드이다.
그는 두 현실을 직접 보면서 판단을 한다.
확고했던 할레드의 노선은 한번의 실패와 자이드의 방황을 보면서
수하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며 더 나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사고가 전환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확고한 신념도 있지만 어머니가 더 좋은 정수기 필터를 사용하기를 원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는 자이드의 상황변화에 따라 항상 대각적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 것같다.

위 세가지 대립각에서 팔레스타인이 고민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무엇이 옳은지는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
단지 이러한 현실이 있으며 분명히 팔레스타인은 공정한 시각을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들도 원하는 것은 자유와 정의이며 평등한 입장을 원한다는 것이다.

어쨌던 스토리와 여러가지 대칭을 통하여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텔아비브에 혼자 남은 자이드의 줌인 되는 시각을 통하여 관객이 그 눈으로 현실을 보기 원하는 것이다.
그가 폭탄을 터뜨릴지 포기할지는 모른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다른 사람들이 편향되지 않은 시각으로 봐주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것 저것 많은 생각과 사유를 필요로 하는 영화이다.
삶에 관한 존엄성과 그 가치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영화이다.
생에 우선하는 가치, 가치에 우선하는 생.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단지 어떤 경우에는 삶에 우선하는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난 여전히 어떤 경우에도(물론 지극히 내 개인적인 시야에서) 삶에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고 여긴다.
존재의 이후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은 천국인가? 내가 가야할 곳은 천국인가? 그것을 묻고 싶어지는 영화이다.

The Plague 2006

10년전 10살 미만의 모든 아이들이 코마에 빠져버린다.
대혼란이 일어나고 법률적으로 임신이나 그 시도는 금지된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 모든 아이들이 일어나 인간을 없애기 시작한다.

그것의 해법은 어느 한사람이 영혼을 자발적으로 주는것?
젠장 무슨 이런 황당한 해결이라니.
내가 성서를 이해 못하는 것도 있겠지만
영화내용이 이해도 안 가고 황당하기만 하다.
차리리 이 마을로 국한만 되었으면 나았으리라.
범세계적인 종족번식이 10년간이나 안되었다면
아마도 인간은 그들이 일어나기 전 멸망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처음엔 흥미롭고 재미있었는데
캐릭터의 황당한 성격변화와
이해못할 결말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
결론은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물론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알게 된다면 다른의미를 줄수 있을런지도 모르지만.

천국의 나날들 (Days Of Heaven, 1978)

테렌스 맬릭 (Terrence Malick)

리차드 기어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었다.
미국의 곡창지대(?) 아니 광대한 자연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결국은 삶의 이야기이다.

공장에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빌은 연인 애비와 동생을 데리고 도피하여
곡창지대의 추수철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친남매인 것으로 위장을 한채 말이다.
애비에게 관심을 가지는 지주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연인과 지주의 계획적인 사랑을 통하여 그들은 잠시 천국의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그들은 떠날 것을 예비하고 그 생활을 시작한다. 이유는 그 지주는 불치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주는 빌과 애비의 사이를 의심하게 된다.
둘이 같이 있는 것을 목격한 지주는
결국 질투와 배신감에 눈멀어 리차드 기어를 죽이려고 하지만
오히려 죽고 만다.
그들은 그렇게 천국에서 떠나게 되고 새로운 도피가 시작된다.
그렇지만 빌 역시 죗값을 치루고 죽고 만다.
그가 죽어도 남은 두명의 여인은 굳건하게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

광대한 미국의 평원과 자연은 바로 그들의 삶이다.
아무리 메뚜기가 날뛰고 불을 질러도 그들의 터전은 바로 그자리에 있다.

그들이 보냈던 잠시의 행복한 시간은 진정 천국의 나날이었을까?
물질적 풍요가 그들의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듯이
함께 하지 않는 천국은 이미 그 파탄이 예고되어 있다.

그들은 잠시 꿈을 꾸었었다. 뼈아픈 댓가를 치루고 말이다.

뭐 위의 조금은 과장스러움을 인정하긴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어떤 짧은 평에서 말하듯이 결혼사기극의 파국일까?
풍요를 위한 사랑의 일시적 포기가 물질적 천국에 그들을 이끌지만
사랑이란 건 머물러 있지도 않고 끊임없이 다른 모양을 요구하면서 관계하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변해간다.
사랑을 이용함으로써 사랑을 포기한 것이다.
사랑을 선택하지도 말고 꾸미지도 말고
그냥 사랑을 해야 했었다.

뭐 그렇게 집중은 안되는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랑을 가지고 속이는 스토리엔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서 인것 같다.

바보선언 1983


이장호
이보희
김명곤

바보동칠이와 육덕이의 사회탐구이야기.
1980년대 초. 아마도 살기 참으로 힘들었을 시기였으리라.
문화예술활동은 더 말 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 속에 어떤 정치적 의미라던지, 메시지를 내재한다는 것은 투쟁이었을 것 같다.

한 때,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검열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의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
나 또한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난 한국에 왜 영화계의 거장이, 문화계의 거장이 드문가에 대한 의문을
잠시 가진 적도 있었었다. 물론 다른 나라라고 해서 우리나라보다 나았으리라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우리 나라 예술의 정체는 바로 검열이라는 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체가 아닌 급속퇴행을 초래한 그 검열은 정치권력의 수구의 한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바보선언을 보면서 영화보다는
그러한 상황을 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슬퍼서라고 해야겠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흐릿한 국회의사당 앞에 웃통을 벗은 두 바보가 아이의 국어교과서를 읽는 듯한
목소리를 통하여 고함치며 현실을 알리고 비판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바보나 아이들 빼고는 저항을
할 수가 없었었던 것이다. 오직 모자라고 어리석은 이들만이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슬픈 고백이었으리라.

이장호는 영화 초반부에 동칠에게 옷과 신발을 남기고 투신자살을 해버린다.
동칠은 이뻐보이는 여대생을 쫓아다닌다.
그리고 그녀를 가지기로 결심하고 택시운전사인 육덕과 모의를 한다.
그러나 거센 저항에 굴복하고 만다. 왜냐구? 그들은 바보이고 쪼다이기 때문이다.
짜증나는 애새끼의 목소리는 갑자기 여자의 힘이 세졌다고 한다.
그 당시 힘센 여자는 하나밖에 없었다.
턱쭈가리 말이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스포츠밖에 없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그때는 우리나라 프로스포츠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힘든 현실을 피할 도피구가 필요햇고
정권은 프로야구를 이용한다. 사람들은 금방 거기에 열광해버린다.
이보희가 보여주는 창녀의 캐릭터는 참 다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기도 하다.
허영덩어리이기도 하고, 턱쭈가리의 아바타일 때도 있고, 상류층 퇴폐문화의 꽃으로서 희생되어지는
제물의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 것 같다.
결국 이영화의 모든 것은 처음 감독의 죽음 장면과 마지막 국회의사당에서 빡큐를 외치는 바보들의
소리없는 저항에서 다 표현된다고 여겨진다.

왜 바보선언일까? 바보라고 선언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세상인 것이다.
생각을 가지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보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당신이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솔직히 영화의 은유적 몇가지 표현의 외에 숨은 것들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 시대 영화를 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아픔, 슬픔 그리고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시대는 창작의 과정이라기 보다는 의미와 표현의 은유와 은폐과정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영화자체로는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형식에서 감독의 비판의식 자체가 시작된다고 본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낙서와 유치한 그림들은 바로 영화 그 자체 표현의 외부적 제한에
따른 것임을 완벽하게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위의 생각들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할 여지가 전혀 없는 영화이다.
이런 직접적인 비판적 영화가 어떻게 당시 개봉되었는지가 의문이기도 하다.
이장호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가 계속 바보선언을 유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쉽다.

Sep 3, 2006

四月物語 4월 이야기 April Story

씨 인사이드 (The Sea Inside, Mar Adentro, 2004)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Alejandro Amenabar)

1. 씨 인사이드(Mar Adentro:The Sea Inside) 2004
2. 디 아더스(The Others) 감독 2001
3. 오픈 유어 아이즈(Abre Los Ojos:Open Your Eyes) 1997
4. 떼시스(Tesis) 감독 1996

위의 filmogrphy를 가진 감독이다.
작품이 적어서 그런지, 인지도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거의 다 봤다.
그렇지만 솔직히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영화를 보기전 기본적인 정보는 안락사에 관한 이야기라는 정도였다.

라몬은 26년째 사지가 마비된 상태로 살아오고 있으며 스스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요구한 첫번째 스페인 사람이다. 그를 돕기 위한 협회에서 훌리아란 퇴행성 질병을 앓고 있는 여성변호사를 소개하며 만남으로써 이야기는 전개된다. 훌리아를 만남으로써 그녀에게 끌림을 느끼고 자신을 진정으로 도와줄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에겐 로사라는 약간 덜 떨어져 보이는 여성이 접근한다. 그녀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관심이고 친절이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긴다. 물론 그에게는 가족도 있다. 자식의 죽음보다는 자식이 죽음을 원한다는 것이 더 슬픈 아버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동생과 가족을 위해 과수원 일을 하는 형, 마치 어머니 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는 형수 그리고 라몬이 자신의 자식처럼 느끼는 조카 "하비에르". 이 가족들의 헌신과 그에 대한 사랑은 아마도 그가 26년간이나 고민하면서도 살아가게끔 하는 원동력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훌리아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의 단편적인 과거는 드러나고, 그의 사고순간도 알게 되면서 작은 의문이 생겼다. 왜 물이 빠지는 바다에 그는 뛰어 들었을까 하는 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뱃사람이었던 그가 몰랐을리는 없었을 텐데. 아마 그 때 그는 죽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그는 여기서 죽음에 가까울때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과거의 순간들을 이야기한다. 그 장면들은 훌리아가 보는 그의 옛사진들과 함께 흘러가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된다. 그가 적었던 글은 그와 훌리아를 연결시키는 관계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었다. 책의 완성은 두사람의 동병상련에 따른 깊은 이해에서 서로의 죽음을 향해 떠나는 약속이었지만, 훌리아의 질병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종교계, 법조계, 정부 등은 그의 죽음에 대한 열망을 용인할 수가 없다. 그것을 용인한다는 것은 인간 사회의 질서와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더 복잡한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 라몬에게 있어서 죽음은 선택할 수는 있지만 실행 할 수가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더욱 원하는 것일런지도.

라몬이 훌리아에게 처음 말을 할때 기억나는 대사는 그의 죽음을 원하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한다. 당신과 나는 2m정도 떨어져 있다. 당신에게 있어서 그 거리는 여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의미없는 것일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 그 거리는 불가능한 거리의 여정이라고, 26년간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창밖을 보며 상상하고, 글을 적는 일이 전부였다. 그래 상상하고 꿈꾸는 외에는 그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창밖을 보는 것 조차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어떤 신부는 그를 관심을 끌기위한 행동일 뿐이라 매도하고, 그의 결심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그를 사랑한다는 "로사"의 도움으로 그는 바다가 보이는 전망의 집으로 옮기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 준비를 한 후 28년 4개월의 존엄하지 못한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명예로운 죽음을 실행한다. 몇장의 편지만 남긴채.

그의 편지는 훌리아에게 전해지지만 훌리아는 "라몬"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 역시 바다를 보며 살아지고 있을 뿐이다.

간단한 줄거리를 적으려 했지만 여전히 잘 되지는 않는다.
라몬이 사고를 당할 때, 그가 구해지는 장면은 반복이 된다.
그것은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의지로 뛰어내린 바다이자
지긋지긋한 불명예스러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상상의 날개를 통하여 항상 바다로 향한다.

그는 삶의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고 존재의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것을 일반화 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를 원하며 작은 호의를 원할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수 있었다면 전혀 필요없었을 아주 작은 도움을 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법제도와 종교적, 도덕적 관념들은 그를 다만 침대에 묶어두고 있다.
그는 죽음을 원한 것이 아니고 자유를 원한 것이다라고 느낀다.
단지 느낄 수 있는 것이 그의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라 우리가 알수 없을 뿐이다.
슬프고 안타깝지만 기쁘기도 한 묘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 안락사란 부분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고 싶기도 하지만 어떤식으로 접근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여러가지 상황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라몬처럼 스스로의 의식이 살아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경우와 아무런 표시도 할 수 없는 식물인간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듯 하다. 다만 라몬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당연하지만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어떨까? 어렵다.

살아간다는 것, 있다는 것.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말인 듯 하다. 아마 두가지를 합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를 존재한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존재라는 말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에.
그래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으로 한정지어서 이 영화를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히 살아 있지만 이것은 그의 삶의 방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그는 선택한 것 이다. 더불어 안락사란 법적, 도덕적 규범에 대한 의문과 조소를 품으면서 말이다.

영 정리가 안되는 느낌이라 그만 적어야겠다. 필이 안 온다. 쩝.

리턴 (The Return, Vozvrashcheniye, 2003)

(Andrei Zvyagintsev)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60th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베니스 영화제 신인감독상
뭐지? 영상은 정말 장면장면이 말 그대로 예술이다. 그런데 뭐지?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를 않는다. 가장 의문은 그들이 다락방에서 찾은 사진과 마지막 차에서 찾은 사진에서의 아버지의 존재유무이다.차라리 두번째 사진이 없었으면 스토리는 편하게 이해할 수가 있지만.사진 한장으로 인하여 굉장히 헛갈리게 한다. 스토리는 그렇다 치고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도대체 뭔가? 그냥 영상이미지와 형식미가 전부인 영화인가?
다이빙을 하지 못한 이반은 어머니에게 구함을 받지만친구들에게 겁쟁이라 놀림을 받는다. 12년만의 아버지의 귀향.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리 기뻐하는 듯 하지 않다.이반, 안드레이는 아버지와 여행을 떠나게 된다.이반은 아버지에게 매사 반항적이다.(심할 정도로 싸가지가 없다.)아버지는 권위적이며 폭력도 불사한다. 낚시 여행은 뭔가를 찾기 위한 여정이 되어간다.약속시간에 돌아가지 않은 두형제와 아버지의 충돌은 결국 아버지의 죽음.아버지가 찾던 것은 무었이며, 마지막에서야 아빠를 외치는 두 형제는?
여러가지 이해가 안가지만 가장 먼저 이반의 캐릭터이다.겁쟁이에 마마보이기질까지 있는 이반은 왜 아버지에겐 그렇게 용감하게 대어드는가?아니면 어머니를 빼앗겼다는 상실감에서 비롯되어진 것인가? 실제로는 누구보다 아버지를 기다려온 이반의 끝없는 반항과 싸가지 없음은 도대체 왜인가?그리고 마지막에 보여지는 사진들은 과연 아버지가 찾았던것일까?그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까?아니면 진정한 상실의 확인일까?
영상미를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별로다.

파니 핑크 (Nobody Loves Me, Keiner Liebt Mich, 1994)



글쎄. 뭐라고 할까?
노처녀의 판타지 러브스토리라고나 할까?
아멜리에의 내성적 버전 정도

Sep 2, 2006

Assault on Prestinct 13


그냥 저냥 볼만한 킬링 타임용 영화. 에단호크의 망가진 모습이 이 영화에서는 딱이다. 로렌스 피쉬번은 항상 매트릭스다. 달라지는게 없는 듯.


억지설정이긴 하지만 생각없이 보면 된다.
악과 악의 대결. 그 속에 갇힌 선(?)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입장의 주인공.
선과 악의 일반적 도식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그 역전을 요구하기고 한다. 이것 저것 적었다가 그 내용이 다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짧게 적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