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인사이드 (The Sea Inside, Mar Adentro, 2004)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Alejandro Amenabar)
1. 씨 인사이드(Mar Adentro:The Sea Inside) 2004
2. 디 아더스(The Others) 감독 2001
3. 오픈 유어 아이즈(Abre Los Ojos:Open Your Eyes) 1997
4. 떼시스(Tesis) 감독 1996
위의 filmogrphy를 가진 감독이다.
작품이 적어서 그런지, 인지도가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거의 다 봤다.
그렇지만 솔직히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영화를 보기전 기본적인 정보는 안락사에 관한 이야기라는 정도였다.
라몬은 26년째 사지가 마비된 상태로 살아오고 있으며 스스로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요구한 첫번째 스페인 사람이다. 그를 돕기 위한 협회에서 훌리아란 퇴행성 질병을 앓고 있는 여성변호사를 소개하며 만남으로써 이야기는 전개된다. 훌리아를 만남으로써 그녀에게 끌림을 느끼고 자신을 진정으로 도와줄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에겐 로사라는 약간 덜 떨어져 보이는 여성이 접근한다. 그녀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관심이고 친절이다. 그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긴다. 물론 그에게는 가족도 있다. 자식의 죽음보다는 자식이 죽음을 원한다는 것이 더 슬픈 아버지,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동생과 가족을 위해 과수원 일을 하는 형, 마치 어머니 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는 형수 그리고 라몬이 자신의 자식처럼 느끼는 조카 "하비에르". 이 가족들의 헌신과 그에 대한 사랑은 아마도 그가 26년간이나 고민하면서도 살아가게끔 하는 원동력이었을런지도 모른다.
훌리아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의 단편적인 과거는 드러나고, 그의 사고순간도 알게 되면서 작은 의문이 생겼다. 왜 물이 빠지는 바다에 그는 뛰어 들었을까 하는 거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뱃사람이었던 그가 몰랐을리는 없었을 텐데. 아마 그 때 그는 죽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그는 여기서 죽음에 가까울때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과거의 순간들을 이야기한다. 그 장면들은 훌리아가 보는 그의 옛사진들과 함께 흘러가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된다. 그가 적었던 글은 그와 훌리아를 연결시키는 관계의 완성을 위한 과정이었다. 책의 완성은 두사람의 동병상련에 따른 깊은 이해에서 서로의 죽음을 향해 떠나는 약속이었지만, 훌리아의 질병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종교계, 법조계, 정부 등은 그의 죽음에 대한 열망을 용인할 수가 없다. 그것을 용인한다는 것은 인간 사회의 질서와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더 복잡한 이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 라몬에게 있어서 죽음은 선택할 수는 있지만 실행 할 수가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더욱 원하는 것일런지도.
라몬이 훌리아에게 처음 말을 할때 기억나는 대사는 그의 죽음을 원하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한다. 당신과 나는 2m정도 떨어져 있다. 당신에게 있어서 그 거리는 여정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의미없는 것일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 그 거리는 불가능한 거리의 여정이라고, 26년간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창밖을 보며 상상하고, 글을 적는 일이 전부였다. 그래 상상하고 꿈꾸는 외에는 그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창밖을 보는 것 조차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어떤 신부는 그를 관심을 끌기위한 행동일 뿐이라 매도하고, 그의 결심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 그를 사랑한다는 "로사"의 도움으로 그는 바다가 보이는 전망의 집으로 옮기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 준비를 한 후 28년 4개월의 존엄하지 못한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명예로운 죽음을 실행한다. 몇장의 편지만 남긴채.
그의 편지는 훌리아에게 전해지지만 훌리아는 "라몬"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 역시 바다를 보며 살아지고 있을 뿐이다.
간단한 줄거리를 적으려 했지만 여전히 잘 되지는 않는다.
라몬이 사고를 당할 때, 그가 구해지는 장면은 반복이 된다.
그것은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의지로 뛰어내린 바다이자
지긋지긋한 불명예스러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상상의 날개를 통하여 항상 바다로 향한다.
그는 삶의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고 존재의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것을 일반화 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그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를 원하며 작은 호의를 원할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수 있었다면 전혀 필요없었을 아주 작은 도움을 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법제도와 종교적, 도덕적 관념들은 그를 다만 침대에 묶어두고 있다.
그는 죽음을 원한 것이 아니고 자유를 원한 것이다라고 느낀다.
단지 느낄 수 있는 것이 그의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라 우리가 알수 없을 뿐이다.
슬프고 안타깝지만 기쁘기도 한 묘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 안락사란 부분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고 싶기도 하지만 어떤식으로 접근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여러가지 상황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라몬처럼 스스로의 의식이 살아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경우와 아무런 표시도 할 수 없는 식물인간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듯 하다. 다만 라몬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입장에서는 당연하지만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어떨까? 어렵다.
살아간다는 것, 있다는 것.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말인 듯 하다. 아마 두가지를 합쳐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를 존재한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존재라는 말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에.
그래서 나는 살아간다는 것으로 한정지어서 이 영화를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히 살아 있지만 이것은 그의 삶의 방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그는 선택한 것 이다. 더불어 안락사란 법적, 도덕적 규범에 대한 의문과 조소를 품으면서 말이다.
영 정리가 안되는 느낌이라 그만 적어야겠다. 필이 안 온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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