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향하여 Paradise Now
하니 아브아사드
위의 한국포스터 카피는 마음에 안든다.
Paradise now
천국은 어디인가? 천국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현 지구의 종교갈등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유대인에게 그들은 분명 억압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테러를 한다. 왜 할까?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자이드는 말한다.
존엄성이 없는 삶은 굴욕이라고.
그들의 삶은 자유가 없는 감옥속에서 존엄을 무시당하는 삶이다.
솔직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뿌리깊은 갈등과 첨예한 이익의 대립은
어디서 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른다.
따라서 영화자체만 이야기하고 느낀 것을 적어내려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조금은 정리 될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이스라엘군이 경비를 서고 있는 곳에 수하가 귀향을 한다.
자이드와 할레드는 팔레스타인 점령지구에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다.
차량정비를 하던 그들은 저항조직에 의해 순교자로서 선택을 받으며
그것을 기꺼이 받아 들인다.
자이드는 새벽에 수하를 방문하고 약간의 대화를 하게 된다.
그들이 존경하는 영웅 "아잠"의 딸인 수하는 테러가 아닌 평화로운 방법을
선호하며 공존하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것이라고 믿는다.
자이드와 할레드는 순교자의 비디오를 찍은 후 텔아비브로 떠나가지만
이스라엘 군에 발각이 되면서 자이드는 고립이 되어버리고
할레드는 돌아와서 자이드를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
자이드는 철조망을 다시 넘어 버스에서 폭탄테러를 하려고 하지만
그 전날 수하와의 대화와 버스에 탄 어린아이의 모습에 그것을 포기한다
자이드는 다시 점령지구로 돌아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할레드와의 만남은 계속 엇갈리기만 한다.
자이드는 계속 고민하고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할레드는 아직까지 고민하고 있지 않다.
자이드는 수하를 다시 만나고 그의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매국노 아버지의 처형과
수하의 아버지인 영웅 아잠을 이야기 한다. 그가 철조망을 처음으로 넘어서 본 것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친인을 둘러 봄으로써
현실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수하와의 키스 후 그는 떠난다.
자레드를 기다리던 할레드는 수하와 만나고 그가 있을 무덤을 향해 쫓아간다.
가는 도중 수하와의 이야기를 통하여 조금은 변한다.
자이드는 할레드와 저항군 본부로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은 점령지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이다.
자이드와 할레드는 텔아비브를 차를 타고 지나간다. 그들이 본 것은
다른 세상이다. 발전된 도시와 자본적 풍요를 보게 된다.
할레드는 자이드를 설득해서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만
자이드만이 텔아비브에 남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스토리의 전개이다.
간단히 하자면 자이드와 할레드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젊은이인데 이스라엘 폭탄테러의 순교자로
선택을 받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일 것이다.
솔직히 양측의 배경과 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은 앞서도 말했고 그에 따라
영화에서 보여지는 대칭축을 따라가 볼 수 밖에 없었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것은 뭐라고 해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점령자와 피점령자의 관계이다.
양측은 모두 자유와 평화를 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의 선택과 결말은 항상 유혈과 폭력이다.
팔레스타인은 실제로 억압받고 갇혀 있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이 피해자인 척 한다고 느낀다.
점령자가 어떻게 희생자가 되냐고, 그들이 억압자이자 희생자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순교자가 되고 살인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 수하와 자이드이다.
둘은 서로에게 이성적인 끌림을 느끼지만 그들이 바라 보는 것과 겪어온 것은 반대이다.
수하는 저항세력의 영웅 "아잠"의 딸로서 팔레스타인 내에서는 혜택을 받고 자란다.
더우기 불어권에서 생활을 했기에 이 갈등에 대해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수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녀는 죽은 영웅보다는 살아있는 아빠를 원한다.
자이드는 매국노로 처형당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핍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영웅을 꿈꾼다. 팔레스타인의 불평등한 현실밖에 아는 것이 없다.
타인이 그를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고 보고 있다.
셋째. 자이드와 할레드
이 두 캐릭터에서는 입장의 변화와 노선의 변화가 흥미롭다.
처음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은 자이드이다.
그는 두 현실을 직접 보면서 판단을 한다.
확고했던 할레드의 노선은 한번의 실패와 자이드의 방황을 보면서
수하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며 더 나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사고가 전환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확고한 신념도 있지만 어머니가 더 좋은 정수기 필터를 사용하기를 원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는 자이드의 상황변화에 따라 항상 대각적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 것같다.
위 세가지 대립각에서 팔레스타인이 고민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무엇이 옳은지는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
단지 이러한 현실이 있으며 분명히 팔레스타인은 공정한 시각을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들도 원하는 것은 자유와 정의이며 평등한 입장을 원한다는 것이다.
어쨌던 스토리와 여러가지 대칭을 통하여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텔아비브에 혼자 남은 자이드의 줌인 되는 시각을 통하여 관객이 그 눈으로 현실을 보기 원하는 것이다.
그가 폭탄을 터뜨릴지 포기할지는 모른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다른 사람들이 편향되지 않은 시각으로 봐주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것 저것 많은 생각과 사유를 필요로 하는 영화이다.
삶에 관한 존엄성과 그 가치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영화이다.
생에 우선하는 가치, 가치에 우선하는 생.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단지 어떤 경우에는 삶에 우선하는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난 여전히 어떤 경우에도(물론 지극히 내 개인적인 시야에서) 삶에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고 여긴다.
존재의 이후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은 천국인가? 내가 가야할 곳은 천국인가? 그것을 묻고 싶어지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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