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Taiwan.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Taiwan. Show all posts

Oct 10, 2006

南國再見,南國 남국재견Goodbye South, Goodbye 1996


Taiwan

후샤오시엔

처음 본건 벌써 몇달 전인것 같다. 간단하게 시작했던 영자막의 한글화로 인해서
제대로 보는데 시간이 더 걸린 것 같고, 또한 처음의 후샤오시엔 답지 않은 음악과 극의 전개에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것 같다.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을 거의 다 잊어버려서 제목과 비슷하게 재견한 감상만을 적을 수 밖에 없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줄거리만 파악했을 뿐 내용과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하기 조금 애매하다.
결국 가오라는 대박을 꿈꾸는 식당주인의 남국로드무비이다. 애물단지 둘을 데리고 대박을 꿈꾸며
남쪽 치아이라는 곳으로 간 가오와, 플래티(납작이) 그리고 프레첼(꽈배기).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식당을 운영하고, 상하이에 가서 아버지의 꿈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다. 단지 좀 거칠고 도박을 좋아하고
큰 건수 하나에 목말라 있을 뿐이다. 드디어 그들에게 돼지꿈을 꾸게하는 남국의 개발사업에 종돈되팔기라는
묘책에 그들은 무작정 달려간다(결과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거기서 그들은 나름대로의 사기를 친다.
플래티는 개발사업으로 인한 가족소유 토지의 분배를 요구하지만, 오히려 권력에 가까운 경찰사촌에게
폭행을 당하고 복수마저 좌절되며, 여전히 어글리한 삶을 유지보수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플래티 뿐만 아니라, 프레첼의 황당함은 플래티와 막상막하이다. 그들이 결국 남국에서 보고 온 것과
그들에게 남은 것은 미래를 알 수 없는 논두렁에 처박힌 자동차의 신세임을 보여준다.
그건 아마도 대만의 어느정도 불균형한 개발과 그에 따른 재개발에 있어서 이득권층은 따로 있으며
여전히 하류서민층은 헛된 꿈밖에 꿀 수 없다는 건가? 다만 이렇게 추측할 뿐이다.
대만의 사회와 지역의 개발 편차라던지 그런 걸 모르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상황을 짐작했을 뿐이다.

후샤오시엔의 대만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독의 스타일이 낯선 것은 여전하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그렇게 다른 것 같지도 않다.

Aug 25, 2006

靑少年 那咤 Teenage Norcha; Rebel of the neon god

1992 106분

차이밍량 감독의 데뷔작
감독이 누군지도 모르고 본 영화.(처음에 그랬단 말이다. 한자로 된 크레딧이 잘 안 보이더라)
별 기대 없이 보다 보니까 끝나버렸다.
norcha(나타)가 뭔지도 몰랐고, 얼떨떨하게 보다 보니 끝나 버렸다.
역류하는 하수관이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다.

샤오강은 자신을 금쪽같이 여기는 엄마와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으며 뭔가 정신에 문제가 있는 놈이다. 결코 정상은 아닌 넘이다. 아체는 친구와 공중전화를 털고, 좀도둑질을 하며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양아치이다. 아퀘는 전화데이트를 통하여 원조교제를 하며, 이 년 역시 크게 생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의 접합점은 아무 것도 없다. 우연히 아체가 샤오강 아버지의 택시를 스치듯 지나가면 부순 사이드미러가 전부이다.
샤오강은 소심하고 덩치도 작고 내세울게 전혀 없다. 그저 아버지를 꺼려하고 엄마를 귀찮아 하며 이상한 짓을 가끔하는 그에게 사이드미러 이벤트는 어떤 결심을 하게 한다. 더 이상 아버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스로 위대한 착각을 하고 마는 것 같다. 이제 그는 샤오강이 아니라, 스스로 나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전히 샤오강은 뻘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며, 아퀘와 실랑이를 하며 아핑과 좀 도둑질을 한다.
샤오강은 그들을 발견하고 응징을 결심한다. 나타는 서유기에서 손오공을 응징하려하다 실패하고 오히려 갇히는 신이며, 그의 아버지인 이정(탁탑천왕)을 가장 미워하며 대체적으로 여성성으로서 발현한다고 한다. 그의 사소하지만 신으로서의 권능을 보이려고 하는데 , 하는 짓거리가 너무 유치해서 말이 안나왔다. 그렇게 아체의 개같은 날의 하루는 시작된다. 오토바이는 만신창이에, 도둑질한 장물을 팔려고 왔는데 그 주인에게 찾아가질 않나. 태어나고 이런 뭐 같은 날은 모두에게 처음이다. 아체와 아퀘는 떠나고 싶지만 떠날 곳을 모른다, 단지 울며 서로 끌어안을 뿐, 샤오강 역시 갈 곳이 없다. 전화방에 칸칸이 틀어박혀서 들려오는 전화벨소리.....

솔직히 말하면 아직 호남호녀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본 것이라 그런지 굉장히 낯설고 어색했다. 애정만세를 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이런 스타일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직 차이밍량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은 모르겠다. 에휴 어차피 자막확인차 한번 더 봐야 하니
보고 내용은 덧 붙일랜다. 위의 건 그냥 두고.

굳이 덧붙이고 할 건 없을 것 같다. 그냥 위의 느낌에 첨가하게 된건. 역시 몇몇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역류하는 하수도의 이미지는 영화가 주는 느낌 바로 그대로이다. 역류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 물속에 흐르는 빈 깡통처럼 같이 부유할 수 있을 뿐,

처음에 내리는 비와 영화 마지막에서 내리는 비는 뭔가 느낌이 많이 틀리다. 처음에 내렸던 비가 왠지 긴장감을 준다면 마지막에 내리는 비는, 같은 음악이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체념과 불안의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흘러가는 구름. 아마 역류하는 하수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볼수도 있다.

위의 것은 뭐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을 것 같고,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 나는 건, 여기에서 열리고 닫히는 문들에 대해서이다.

샤오강이 깨뜨려 버린 창문.
아체와 아퀘의 첫 만남인 화장실 잠금장치가 고장나 억지로 잡고 있는 문.
엘리베이터의 4층에서 저절로 열리는 문,
아체와 아핑이 좀도둑질을 하면서 억지로 따는 문.
샤오강이 부모의 대화를 엿듣는 살짝 열린 화장실의 문.
샤오강이 집에서 쫓겨나며 닫히는 문.
아체가 아퀘에게 닫아달라고 하는 자신의 방문.(아핑이 다쳐서 누워있다)
샤오강의 아버지가 살짝 열어두는 현관 문.
아체와 아퀘가 키스하며 떠나고 싶어하지만 어디로 갈지 몰라 할때의 덧문만 닫혀 있는 상태의 현관문.
샤오강이 들어간 전화방의 칸막이 문
샤오강이 나올 때 열려진 채 있는 전화방의 문.

영화를 보고 나서 가만 생각 해보니 위의 문이라는 이미지가 머리 속에 들어와 버렸다.
솔직히 물과 비가 주는 이미지에 비해서 약하게 보일런지도 모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문이라는 출입구란 것이 주는 이미지가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

깨뜨려 버린 창문 같은 경우-샤오강의 어떤 소심하지만 잔인하고 결벽증이 있어보이는 성격의 표출이 아닌가 느껴진다.
화장실의 문은 그냥 둘의 만남 정도라, 크게 의미를 줄 필요 없겠지만, 잠금 장치가 고장난 문을 잡고 있는 상황과 더불어
역류하는 하수구의 이미지가 중복 강화 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뭐하나 제대로 된게 없다는)
엘리베이터의 문 역시 위의 이미지와 별반 다를 건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계속 나오는 문을 통하여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그 상황의 강조 또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진다.
문이란 건, 정확히 출입구를 말하는 거다, 들어오고 나올수 있고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위에 장황한 설명을 했지만 내가 주목한 건 결국은 거의 마지막에서 나오는 문들이다.
아버지가 살짝 열어둔 현관문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버지 만의 마음이다.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아체 집의 덧문은 밖은 보이지만 어디로 떠나야 할 지 모르는 그들의 갇혀 있다는 불안감을 나타내는 창살문이다.
전화방 칸막이 문들은 전화벨 소리와 더불어 샤오강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더욱 강조한다.
그리고 나올때 열려진 채 있는 전화방의 문을 보면서 아버지가 열어둔 그 문이 떠오른다.

위의 문에 관한 건 솔직히 좀 억지스럽긴 하다. 하지만 모든 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문, 샤오강의 문 을 비롯하여 이들 모두에게
문이 존재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 각자의 문을 생각 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차이밍량의 작품 또한 이것이 거의 처음 보는 것이다(애정만세는 기억 안남).
한 작품만 보고 그를 판단할 수도 없겠지만 아직은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회가 닿아 몇 작품 더 보게 되면 조금은 알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짧게 적을 마음이었는데 또 길기만 한 허접감상문이 된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이건 내 메모로그의 성격이 더 강한데 말이다.

나타-서유기나 봉신연의에 나오는 신들 중의 하나로써 서유기에는 탁탑천왕 이정의 셋째 아들로 나온다고 한다. 나타는 대체적으로 여성성으로써 발현하는 신인이라고도 한다.

Aug 23, 2006

好男好女 Good men, good women 1995


아칭이라는 여자배우의 삶과 그녀의 극중 배역인 챵비유의 일생을 교차하면서 대만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후샤오시엔의 영화는 호흡이 너무 길다. 인내심 약한 내가 보기엔 조금 힘듦을 느꼈었다. 그러나 세번쯤 보고나서야 호흡이 길다고 느끼진 않는다. 이제 조금 이해가 간다고나 할까. 물론 허접하나마 영문자막을 한글로 바꾸면서 그 의미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게 정확하리라.

이 영화는 아칭의 죽은 애인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재와
흑백으로 묘사되어지는 치앙비유, 청하오뚱 부부의 일대기의 과거가 절묘하게 교차되고 있다.

영화 속 영화의 제목인 "호남호녀"는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 차별적이고 구분될 수도 있는 영화 구조이긴 한데 두개의 호남호녀는 마치 한 인물의 현재와 과거를 보는 듯 했다. 치양비유는 실존인물이긴 하지만 아칭이 연기하는 배역으로서, 또 다른 주인공으로 나타나지만 그 두 개의 캐릭터는 결국 하나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두개의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현재와 과거의 대만을 묘사하면서 대만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아칭의 삶과 교차되어지는 영화속 치앙비유는 몇가지 유사성과 나레이션으로 묘사되어지는 아칭의 또 다른 일기를 통하여 아칭이 보는 챵비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른 캐릭터임을 몇번이고 알려주지만, 여전히 아칭과 치앙비유를 같은 인물로서 인식하게끔 혼란을 주는 것 같다. 바로 그것이 감독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은 두개의 다른 모습으로 전체의 하나를 묘사하는 것 같이 느꼈다(하나 그리고 둘에서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아칭은 아웨이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는 죽고 추억과 혼란 속에 자신이 부르는 노래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그것이 바로 감독이 느끼는 대만의 현재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거기에 교차되어지는 챵비유의 삶은 과거의 슬픔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챵비유는 사회주의자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본토에 따라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반군활동을 한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을 한 것이라 느껴진다.

대만도 우리나라 못지 않게 복잡한 곳인 것 같다.. 일찌기는 일본 식민지, 미 군정, 본토와의 이데올로기 갈등에 따른 중국과의 반목 그리고 반공투쟁의 최전선으로 어쩔 수 없이 기능하게 되어버리는 모든 복합적이고 누적된 상황들은 대만의 정체성 확립을 더욱 힘들게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나오는 228사건이 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어떤 저항운동으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보면 본토인과 대만인의 충돌로 보여지는 상황에 진실은 다른 것이다라고 나온다.
그것을 둘러싼 대만의 국민당정권에의 반대세력인 사회주의 세력은 너무 미약하기만 하다
한국전의 발발로 야기되는 동서냉전의 격화의 한 중심이 되어버린 대만의 상황은
그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대만은 영원히 바껴버린 운명 속에 지금도 표류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가?
영화에서 묘사되었듯이 뭔가를 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반공의 최전선에 서게 되는 역사적 흐름 속에 그들의 선택없이 모든 것이 영원히 바껴버린 것이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여튼 중구난방으로 느낀 것들을 나열해보았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호남호녀에서 보여주는 두개의 면, 하나의 모습은 후샤오시엔이 보는 중국이 아닐까 생각 해본다. 본토와 섬으로 분리 되어 있는 그들의 상황에서 결국은 하나이고 둘 다 그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역사와 어떤 사건들로 인하여 인식치 못하는 현재를 과거에서 찾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뭐 그렇다는 거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이 떠올랐다. 위에 약간 수정을 하였는데, 순간 하나 그리고 둘의 감독도 후샤오시엔이라고 생각해버리는 멍청함이 발휘 되었었다. ㅜㅜ. 왜 이런 착각을 했을까? ^^)

아래는 영화를 보면서 맘에 들었던 몇 장면과 눈에 띈 장면들이다.

처음에 TV에 나오는 영화를 한참 보여주는데 낯이 익길래 생각해보니 오즈의 "맥추"인 것 같다. 역시 오즈는 그의 지향점인가 보다.

아칭이 아통을 따라 간 곳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갑자기 아웨이와 춤을 추는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아웨이는 총을 맞고 목숨을 잃게 된다. 여전히 아칭이 부르는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말이다. 이러한 점프컷(?)은 사소하게 넘어갈수도 있겟지만, 술에 취한 아칭의 노래가 계속 흐르는 가운데 아웨이와 춤을 추고 그가 죽는 것을 본다는 것은 아칭의 혼란된 심리를 제대로 묘사한 것이고 그것이 타이완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혼란을 비추는 것이 아닐까는 것을 그 컷에서 느꼈다. 물론 여기에 위에 잠깐 언급한 정치적, 지정학적, 역사적인 사건들과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인한 혼란이 기반한 것들이 녹아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맘에 드는 장면이다.

아칭이 팩스로 온 자신의 일기와 말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퍼붓는 넋두리의 장면 또한 참 좋았다. 전화를 통해서 어느덧 정체불명의 상대방은 아웨이가 되어버린다. 제발 돌아와 달라고 사정을 하게 되는 장면에서의 묘사는 정말 대단하다. 일기와 전화에 대해 따져 묻던 아칭이 상대방을 아웨이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어이 할 수 없는 자신의 현재와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오탕의 시신 앞에 지전을 불태우면서 읽혀지는 그의 편지는 담담하게 죽음을 맞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자신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면서. 그리고 소소한 가족들의 걱정과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왠지 모를 뭉클 함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과 끝의 시골의 길을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치앙비유 일행의 흑백화면은 너무도 잔잔하지만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힘을 느끼게 해 준다.

쳇 또 두서없이 글이 길어지기만 했는데 표현력이 딸리는 관계로 내가 느낀 것을 다 적지는 못한 것 같다.
하나그리고둘을 볼 때는 잘 몰랐는데, 후샤오시엔이 이제서야 대단하구나 하고 느껴버렸다.
솔직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너무 지루해서 중간에 보다 말았고, 다음 날 그 장면 부터 해서 다시 보았다.
그러다 자막확인 차 한 번 더 보게 되었는데,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번째 보고 나서야 이제 조금 이해를 하게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솔직히 보기 힘들었지만 세번 보고서야 재미를 느끼게 된 영화이다

Aug 3, 2006

一 一 Yi Yi :a one and a two

edward yang

이면을 본다는 것.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삶을 두-세배로 풍부하게 보여줄수 있다
네가 볼 수 없는 뒷 모습을 보게 해준다는 거겠지..

일단 두가지 맘에 안드는 두 장면만 짚고 넘어간다.
살인사건 보도에서의 그 엉망인 게임그래픽은 뭔가? 잘 보고 있다가 때려치울 뻔 했다.
그리고 작위적이고 어색하다고 느끼는 것과 의도적인 거라고 동시에 느끼는 것이 있는데 마지막 양양의 장례식 추도사이다. 그 외에는 거의 다 맘에 든다.

결혼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그리고 또 다른 삶을 예측케 하면서 진행되어진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앞면만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뒷모습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은유적 표현이 느껴진다.

위 그림에서 보면 제목이 一 그리고 一 이렇게 적혀나간다.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것은 아마도 앞모습과 뒷모습을 말하는거겠지.
앞과 뒤, 이 둘이 이루낸 것. 우리의 온전한 삶을 말하는것 같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둘일 것이다.
둘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온전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우리가 달의 한면만을 볼수 밖에 없듯이 자신의 뒷모습을 보기는 힘들다.
자기 자신은 거울이라는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앞모습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우리는 그 거울을 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뒷모습은 어떻게 볼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보던, 앞뒤로 거울을 두고 비추어 보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뒷모습을 보고 싶을 경우이다.
직접적으로는 절대 자신의 뒷머리를 볼 수 없다. 외관을 살피는 것 조차 그러하다.
외관을 보는 것 조차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외관뿐만 아니라 내면이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그 속에도 앞면과 뒷면이 있다.
자신의 진실한 내면의 뒷모습-스스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자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울말고 또 하나의 거울이 필요하게 된다.
그 거울의 역할을 하는 것은? 그 거울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할 것이다.
되돌아 보고, 뒷모습을 보게 해주는 어떤 것들.
즉 음악, 문학, 영화 등등의 예술이 요구되어지고 사회의 생성이 필요해지는 것이리라.
인간이 인간답고 완전해지는 것은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타인을 구분함과 동시에 인정할 때 시작되는 것 같다.

뒷모습이 있으니까 그것도 봐야지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뒷모습은 볼수 없다고 앞에서 말했다.
뒷모습을 보려고 한다는 것은 타인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회를 인정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관계의 시작점이 아닐까?
영화에서 표현되듯 타인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주면서 도움을 주는거라고 한다.
사진을 찍어서 손에 들려주는 것까지가 그의 역할인 것이다. 그는 또 하나의 거울인 것이다.
그 거울을 보고 뭘 느끼던 그것은 이제 당사자에게 달려있다.
그것이 예술의 시작이며, 올바른 사회관계의 시작이다라고 이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아니 감독 자신이 영화를 하는 이유이며 삶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 버리면, 내가 앞서 말했던 두가지 맘에 안드는 것 중 두번째는 감독의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피력이라고 생각할수 있지 않을까?

앞모습과 뒷모습은 하나의 반이 아니다. 하나를 구성하는 하나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말이 조금 어렵다.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 쳇 왜 이렇게 어려운거야.

감독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는, 영화를 만들어가는 이유와 가치관을 표현한 영화라고 느꼈다.

ps.몇년전에 가 본 타이페이의 후덥지근했던 거리가 떠오른다.
노천 음식점에서 먹었던 여러가지 대만음식들, 만두가게, 허름한 시장통에서의 그 묘한 맛의 수프
그리고 진주나이(이름은 정확히 기억못하겟다)라고 기억하는 엄청난 용량의 빙수음료(그것 먹고 배불렀다).
대만은 날씨와 언어만 빼면 우리나라 어떤 도시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
북경에서는 여기가 외국이구나라고 확실히 느꼈었는데 대만은 그런게 덜했다. 뭐 일단 대만은 영어라도 대충은 통하니 말이다.
ps2.감독이름이 왜 에드워드 양일까? 애네들은 왜 영어이름을 사용하는 걸까?
뭐 의문이랄 것도 없겟지만, 내가 그들한테 듣기로는 영어이름을 기본적으로 하나씩 만든다고 했다.
그들은 수출의 비중이 우린나라 못지 않고, 게다가 중소기업위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영어이름 만드는 것을 권장한다고 들었다.
그 이후 나도 Kane이라는 영어이름을 만들었으니. ^^
ps3. 친구가 준 동영상으로 보지 못하고 새로 구해 영자막으로 봐서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다.

Jul 27, 2006

童年往事 A time to live, A time to die 1985

후샤오시엔의 영화는 솔직히 지루하다.
그의 영화를 나는 몇 봤지만, 거의 기억하지를 못한다.
가장 최근에 본 카페뤼미에르가 기억나는 정도.
그 유명한 비정성시도 시놉시스 조차 잘 기억이 안 난다.

뤼미에르도 그렇지만 샤오시엔은 야스지로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난 동경이야기가 왜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건 아마도 다다미로 이루어진 방 때문인가? (오즈의 영화도 마찬가지로 잘 기억이 안난다. 묻지마라)

영화는 이건 나의 어린시절의 추억이다라고 시작한다.
원제인 동 년 왕 사를 풀이 해 보면 어린시절에 생긴일정도로 풀이할 수 있으니 당연하다.
영어제목인 A time to live, a time to die는 삶의 사간과 죽음의 시간을 말함으로써,
인생을 의미한다고도 생각되어진다.

이 영화는 아화가 기억할 수 있는 것 중심으로 이야기가 굉장히 주관적으로 진행되어진다.
본토(중국)에서 대만으로 아버지를 따라 이주하게 된 아화의 가족들.
아화를 꼭 데리고 본토의 메이군으로 돌아가려는 할머니.
(아화를 굉장히 챙기는 할머니를 보면서, 외할머니가 떠오른다)
연령대가 좀 헛갈렸던 4형제들 그리고 누나.
그리고 어머니.
어린시절의 여러가지 놀이들, 구슬치기, 팽이치기, 등등.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정말 지루하게도 조용히 흘러가는 영화.
중학교에 들어가서 부쩍 성장한 아화의 사춘기,(무섭더라. 칼들고 설치다니)
첫사랑의 기억.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
이 세 죽음을 겪으면서 아화는, 또 그 가족은 조금씩 삶에 적응하고 성장하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은 충격이었을 테고, 사춘기 방황의 한 원인이지 않을까 여겨진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 방황에서 벗어나게 되는, 이를테면 철드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장례식에서 너무도 서럽게 혼자만이 우는 아화의 모습은 무언가 의미가 있겟지.
이제는 삶에서의 죽음이란 것이 단절이고 현실임을 인식한 건 아닐까?
그리고 할머니의 죽음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이후 시신이 부패할 때까지 몰랐던 그 형제들,
장의사의 책망하는 듯한 눈빛.
그 눈빛을 보면서 할머니와 걸었던 그 본토로 가는 길에서의 구아바열매를 따던 기억들.
자신만이 기억하는 그 길을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서 떠올린다.
그 길은 이제 자신의 길을 찾았다(혹은 찾아야겠다)는 것의 상징이 아닐까?

원래 육군사관학교로 갈려고 했던 아화. 하지만 그는 대학시험을 치게 된다.
수 메이에게 건넨 한통의 연서,-이제 그는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그 즉각적 대답(조금 놀랬다. 옛생각이 나더라, 젠장)
대학시험에 합격하면 이라는 그 말에 아화는 대학시험을 치게 된다.

조금은 의외인 전개. 지금까지 가족의 일상과 성장, 그 죽음을 통하여 전개하던 이 영화는
여자애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바뀌어버리는 아화의 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
수동적이기만 하던 아화를 수의 한마디가 이렇게 바꾸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여자애의 한마디에 바뀐 것이 아니라.
아화의 삶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로 바뀐 것이다.
이제 그 자신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살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 여러 죽음 속에서 그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울고, 자책하고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전부였다면, 수 메이의 한마디는 어떤 동기를 그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제 살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영화자체의 나레이션으로 그것이 강한 동기엿다고 말을 하지만, 그 이후의 수메이 소식을 전하면서 그것은
단순한 동기였음을 밝힌다. 물론 그 당시에는 굉장히 크고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과정일뿐임을 수메이가 이사하고 연락이 되지 않음을 전하면서 확실하게 인식시킨다-감독은 자신의 결정이 단순한 그 한마디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오해받는 것을 경계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또 그것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므로 이러한 설명들을 이해한다)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영화이다.
거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것은 아마도 후샤오시엔 감독의 성향이겠지. 그리고 딥포커스가 거의 없는, 쉘로우 포커스라고 표현하는게 맞는지는 모르지만, 포커스의 특정한 고정을 통하여, 아화만의 시각을 위주로 이건 완벽히 개인적, 주관적 서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남의 일기를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자신의 추억과 대만의 과거와 현재를 담담히 주관적으로(자신의 성장), 또 객관적으로(대만의 변천) 잘 묘사하고 있다.

처음에 보게 되기가 굉장히 힘들었지만 처음의 고비를 넘기고 뒤로 가면서 참 재미있게 즐겁게 본 영화이다. 조금의 고비만 참을수 있고 잠들지만 않는다면 끝에 가서 여러모로 즐거울 영화라고 생각한다. 볼 기회가 있다면 나처럼 주저하지 말고(볼생각 가지고도 한달이 넘게 안 보고 있었다), 그냥 편안하게 봐도 후회하지 않을 영화라고 생각한다. 할머니가 찾는 다리와 아버지가 구입한 대나무가구들 등 여러가지 장치에서 대만과 중국의 교차되어진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점도 감안해서 보면 더 나을 듯.( 난 그렇게까지 확장해서 보지는 못했다)

언제 시간을 만들어 그의 작품 몇몇을 더 찾아서 봐야겠다.
후샤오시엔의 영화는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어떠한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어서이다.

Jun 26, 2006

Cafe.Lumiere


솔직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봤다. 보고 나서도 아무 생각이 없다. ㅜㅜ

포스터는 너무 밝게 나온 듯하긴 하지만 맘에 든다.. 포스터의 분위기와 영화는 전혀 별개.

약간의 지루함, 오즈 야스지로(동경이야기만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유명한 감독이란 정도만 안다) 기념 영화.

일상이 풍경이 되는 그곳 카페 뤼미에르. 글쎄. 일상이 풍경이 되면 뭔가 느껴야 하는데. 쩝.

영화 같지 않은 그냥 일상을 보았다. 이제 일상에서는 더 이상 감동을 받지 못하는 내가 되어버렸음을 느낀다.

일상- 평범한 삶의 아름다움을 언젠가부터 잃어버리고 있다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