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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4, 2006

샤만카 (Chamanka, Szamanka, 1996)




내가 유일하게 정확하게 기억하는 그의 영화는
나의 낮은 당신의 밤보다 아름답다?
그리고 소피마르소의 남편이었다는 거 정도.
아 public woman도 있었나?

샤만카란 말은 아마 주술사인 걸로 짐작된다.
sharman정도겠지. 뭐.

비정상적인 인물 투성이에
어느날 인류학과에서
옛 유골을 발견한다.
그것은 피부층까지 잘 보존된
최상의 것으로서
그것을 연구하는 교수와

미쳐돌아가는 세상에 미쳐 있는 여대생?
의 사랑이야기?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 동영상이 폴란드어로 대사를 치는 가운데
러시아어로 덧 씌워버린 무식한 짓을 저지른
버전이라 전혀 집중이 안되었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영화인데?

결국 그는 미쳐서 죽고
그녀는 여전히 미쳐 있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볼지는 미지수.

Oct 10, 2006

南國再見,南國 남국재견Goodbye South, Goodbye 1996


Taiwan

후샤오시엔

처음 본건 벌써 몇달 전인것 같다. 간단하게 시작했던 영자막의 한글화로 인해서
제대로 보는데 시간이 더 걸린 것 같고, 또한 처음의 후샤오시엔 답지 않은 음악과 극의 전개에
오랫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것 같다.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을 거의 다 잊어버려서 제목과 비슷하게 재견한 감상만을 적을 수 밖에 없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줄거리만 파악했을 뿐 내용과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하기 조금 애매하다.
결국 가오라는 대박을 꿈꾸는 식당주인의 남국로드무비이다. 애물단지 둘을 데리고 대박을 꿈꾸며
남쪽 치아이라는 곳으로 간 가오와, 플래티(납작이) 그리고 프레첼(꽈배기).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식당을 운영하고, 상하이에 가서 아버지의 꿈을 이루고 싶은 사람이다. 단지 좀 거칠고 도박을 좋아하고
큰 건수 하나에 목말라 있을 뿐이다. 드디어 그들에게 돼지꿈을 꾸게하는 남국의 개발사업에 종돈되팔기라는
묘책에 그들은 무작정 달려간다(결과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거기서 그들은 나름대로의 사기를 친다.
플래티는 개발사업으로 인한 가족소유 토지의 분배를 요구하지만, 오히려 권력에 가까운 경찰사촌에게
폭행을 당하고 복수마저 좌절되며, 여전히 어글리한 삶을 유지보수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플래티 뿐만 아니라, 프레첼의 황당함은 플래티와 막상막하이다. 그들이 결국 남국에서 보고 온 것과
그들에게 남은 것은 미래를 알 수 없는 논두렁에 처박힌 자동차의 신세임을 보여준다.
그건 아마도 대만의 어느정도 불균형한 개발과 그에 따른 재개발에 있어서 이득권층은 따로 있으며
여전히 하류서민층은 헛된 꿈밖에 꿀 수 없다는 건가? 다만 이렇게 추측할 뿐이다.
대만의 사회와 지역의 개발 편차라던지 그런 걸 모르는 상황에서 위와 같은 상황을 짐작했을 뿐이다.

후샤오시엔의 대만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독의 스타일이 낯선 것은 여전하다.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그렇게 다른 것 같지도 않다.

Sep 11, 2006

Brassed off 1995


Michael Herman

Ewan McGregor

1984년 부터 영국에서는 탄광폐쇄로 인하여 25만이상의 실직자가 발생을 했다.

요크셔 지방의 그림리 탄광은 100여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이 물결을 피해갈 수는 없다.

전통깊은 브라스밴드인 그림리 탄광밴드는 탄광의 폐쇄여부에 따라

그 존속이 결정되어질 것이다.

단지 밴드의 단장인 대니만이 음악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이 전부라고 주장을 한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것은 음악만으로 되지를 않는다.

탄광의 대부분 광부들은 이미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폐쇄에 따른 퇴직금만으로는 실직이상의 의미가 없다.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하지만 일방적인 압력에 대해서 그들은 저항할 방법도 없다.

우여곡절 끝에 앨버트 홀에서의 밴드경연대회 결승전에 참석을 하게되고

병원에서 가까스로 나온 대니는 우승 소감을 말하면서

자신에겐 이 트로피가 아주 중요하다고 밷드단원들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 자체라고 말한다.

그 음악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라고

난 그것을 말하고 싶다고 한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권익을 위해

개인과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 진보인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승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들의 말을 당신들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단순히 탄광의 폐쇄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탄광은 생명의 터전이다.

진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를 위한 진보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도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영국식 액센트가 너무 강해서 알아듣긴 좀 힘들었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제대로 전달한 것 같다.

광부의 입장에서 찍다보니 그렇겠지만 조금은 편파적이긴 하다.

만약 본다고 해도 후회는 하지 않을 만 하다.

Sep 7, 2006

키즈 리턴 (キッズリタ ン, Kids Return, 1996)


위 포스터의 카피를 제대로 표현한 듯하다."우리 이제 끝난 걸까?""바보, 우리 시작도 안했잖아!"
신지와 마짱은 학교의 소문난 양아치이다.금품갈취, 기물파손은 기본이다.어떤 복서에게 두들겨 맞고는복싱을 시작하는 마짱과 신지재능의 차이에 의하여 두사람의 길은 엇갈린다.한명은 복서로, 또 한명은 야쿠자의 길로한 때는 승승장구 하는 두사람.그러나 결국은 몰락한다.
그리고 만난 두 사람이학교 운동장을 자전거로 돌면서 하는 마지막 대화이다.
예전에 본 영화였다. 아마 끝까지 보지 못했던 것 같다.솔직히 다케시의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다. 이 영화는 기대에 조금 못 미친다.물론 현재진행형의 청춘을짧은 시간동안 성쇠와 몰락을 모두 보여준다. 만화적일때도 있고, 너무나 사실적일 때도 있긴 하다.
스토리보다는 단편적인 주변캐릭터의 성격구성만으로 영화는 전개되는 듯 하다. 얼핏 보기에는 일본 학원폭력만화의 구성과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도 않는다. 엄연한 차이가 있다면 주인공에 대한미화와 우상화가 없다는 것이다. 보이는 사실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에 있어 어떤 주관적인 사실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단지 위의 대사만이 유일한 자기 표현이다. 영화를 보았다는 느낌 보다는 그것도 별 생각없이 지나가는 말로 전해 들었다는 느낌이다.
이제 시작한 것이다. 주관을 가지고 이제 시작하자. 쳇 이렇게 되면 너무 교훈적인 전개일 듯 하고.그냥 별 생각없이 아 그렇구나 하고 봤다. 깊게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중요한 걸 놓칠 것 같은 영화이다.그들이 지나온 길을 보고 앞으로 가게 될 길을 생각해볼 뿐이다.

Jul 31, 2006

Picnic

Iwai Shunji
Asano Tadanobu
Chara
i know when the world will end.
when i die.
it began when i was born so when i die, it will end

정신병원에 수감된 세 청춘의 지구종말을 지켜보기 위한 소풍.
자신을 괴롭힌 담임을 살해한 Tsumuji는 담임의 환영에 계속 시달리고 있다.
누가 진짜인지를 증명하기 위한 목매달기를 통해 쌍둥이 동생을 살해한 Coco.

이들은 구원 받기를 원한다. 그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금지된 벽을 걷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러다 벗어난 한 걸음은
구원의 가능성과 세계의 종말을 알려주게 되고,
그 세계 종말을 지켜보기 위한 그들만의 Picnic을 떠난다.

끝없이 이어지는 벽들, 그리고 벽에서 내리는 순간 그들은 세계의 종말을 각각 경험하게 된다
사토루는 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자신이 중얼거리던 lovely doll이란 말처럼,
마리오네뜨의 춤을 추며 세상의 종말을 겪는다.
코코는 츠무지를 구원해준 천사로서의 역할을 마감하고 스스로 자신의 죄를 사하고,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끝내버린다. 왜냐구 그녀가 생각하는 신은 자신을 버렸으니까 스스로를 구원해야만 한다.
츠무지는 믿었던 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구원했던 코코의 죽음을 보며 신을 저주한다.
그렇게 츠무지에게도 이 세계는 끝나버린 것이다.

까마귀 깃털옷을 입은 코코는 스스로의 정체성,
자아의 혼란으로 인한 인격분열 속에서 스스로의 한부분을 죽여버림으로써 느끼는 죄책감.
완벽했던 가족간의 유대를 끊어버림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브를 상징하는 건 아닐까?
그러한 관점에서 이들은 에덴에서의 세 캐릭터로 볼수 있지 않을까?
coco는 이브, 츠무지는 아담, 사토루는 접어두자. 그는 어차피 마리오네뜨였을 뿐이다.
츠무지가 느끼는 이지메에 의한 교사살해도 마찬가지로 그의 정신적 질환으로 본다면, 자신이 저지른 또 저지를 것 같은 어떠한 원죄의식에서 해방되지를 못하고 있는 흔들리는 남자인 아담으로 보자.

이건 현대판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인가?
그럼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뭘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벽은 그들의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의 확실한 경계이며,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괴리감일것이다.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무슨 죄를 가지고 있는가?
누가 누구를 용서할 것이며 용서받아야 하는가?
가치관의 혼재로 인한 심리적 공황에서,
이들은 자신들만의 덧없는 세계를 구축한 것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우리 보기에 허망한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삶은 이렇게 끝나버렸다. 하지만 그들의 소풍은 계속인 건 아닐까?
석양을 향해 총을 쏘던 코코와 츠무지,
광고판의 여자를 향해 총을 쏘던 둘의 행동은 그냥 의미없는 동작에 불가한가?
우리에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몸부림일 것이다.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런 의미를 둘 필요도 없고 헛된 사고의 잉여생산일런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들이 선택한, 또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굉장히 이해하고 싶다.
.
벽위를 걷는 여러가지 장면,
벽위에서 본 세계는 그들만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경계에서 바라본 이쪽과 저쪽은 어떤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Chara와 Tadanobu는 아마 이 영화를 통해서 만나서 결혼한 듯,
잘 어울리네. 둘의 키스 신은 아주 훌륭했다.
하여튼 난 스왈로우테일과 이 영화를 통해서 chara의 팬이 되어버렸다.
쳇 유부녀에다 나이도 많은 아줌마를 10년이 지나서 좋아하게 되다니.

이와이 슌지가 굉장히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최근에야 알게되다니, 아쉽다.

Jul 27, 2006

Swallowtail Butterfly

이와이 슌지의 작품은 왠지 손이 가지를 않았다.
러브레터와 사월이야기 이후에 그의 작품을 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위 두작품이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런가? 하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라고 대답하겠다.
재미있게 봤었다. 아마 다시 본다면 그 느낌 또한 틀리겠지만.

마찬가지로 왕가위는 내가 참 좋아하는 감독이며 그의 영화 중 몇은 나의 all time favorite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타락천사 이후의 작품은 손을 몇 번 대려고는 했지만 제대로 본 기억은 없다.

근래 잼필름 이라는 단편 모음집에서 아리타라는 이와이의 작품을 보고, 흐음 그러면 이제 한번 봐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씩 보려고 한다. 스왈로우테일은 그 시작이다.

솔직히 이 작품은 예전에 한번 보려고 하다가 손을 놓았던 적이 있는 영화이다.
초반의 장례식 장면, 그 과장되어진 난민들의 모습에 화들짝 놀래서 그 이후를 포기한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건 그 당시 나의 모든 심적, 육체적 상태가 그러한 꺼려지는 전개를 조금도 참지 못하는 극도의 피폐함 때문이긴 하지만. 하여튼 그런 과정을 거쳐서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라는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속에는 미카미 히로시와 와타베 아츠로라는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두 배우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음은 당연하다.

일단 배우들이 정말 좋았다. Hiroshi Mikami, Chara, Atsuro Watabe, Eguchi Yosuke
내가 눈여겨봤던 세 남자배우외에 그리꼬 역을 맡았던 Chara가 정말 좋았다.

Yen이 지배하는 사회, Yen을 벌기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Yentown, Yen이 지배하는 사회, Yen을 구하는 사람들, 둘 다를 지칭하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아니 간단히 말한다면 "Yen에 매여있는 상태에서의 벗어남, 탈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정체성의 혼란, 사회의 붕괴, 혼란, 빈부의 격차, 도덕의 몰락등 그 모든 걸 포괄하고 있다. 단지 강조하고 있는 것이 Yen이라고 느낄 뿐.

Yentown이라는 설정하에 어머니의 죽음, 그리꼬와의 만남, 페이홍, 란과의 만남, 료양키와의 만남 이러한 다양한 만남을 매개로 하여 영화는 충분히 어슬퍼 보이게 교차하고 있다.

이런 곳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르게도 살아간다. 너무나 솔직한 삶의 이야기를 근미래라는 가상의 세계(이미 현실이긴 하지만)를 배경으로 하여 My Way라는 노래처럼 제 갈길을 가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 Way of life 이건 당신의 선택이다.

Today is not your day. 란의 대사이다. 오늘만 그런게 아니다. 우리 삶은 항상 이런 말을 듣고 살지 않는가. 뒤돌아보지 않았으면 뭔가 해볼수도 있었을텐데. 쯧.. 그게 우리네 인생이다.

이와이 슌지의 감성이 현실에 제대로 묻어나는 영화이다. 러브레터, 4월이야기의 아름다움은 더이상 없다. 그렇다고 언두의 비관적 모호함도 없다.

하루키와 류를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