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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0, 2006

이와이 슌지 (岩井後二, Shunji Iwai) 와 불꽃놀이 아래서 볼까? 옆에서 볼까? (Fireworks, Should We See It From The Side Or The Bottom?, 打ち上げ花火, 下から見るか? 橫から見るか?, 1993)


제목 그대로의 영화...

불꽃놀이를 아래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아마 둥글지 않을까? 그런가?

이와이 슌지의 최초의 작품인가?
하지만 내가 가장 최근에 본 작품이 되었다.

이와이 슌지의 감성이 항상 부러웠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항상 느꼈던 것들이다.
그 감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아마도 사물을 보는 편향되지 않은 시각일 것이다.
이 영화를 이와이 슌지의 베스트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제목만으로는 이와이 슌지의 모든 것을 말한다고 느낀다.

불꽃놀이를 제대로 본적도 별로 없지만.
이런 의문은 가져본적 조차도 없었다.

불꽃놀이는 아래에서 보면? 옆에서 보면?
그 자체의 모습이 바뀌는 걸까?
아니면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달라지는 걸까?
하는 그 의문에서 이와이 슌지의 모든 영화는 시작된다는 느낌이다.

이 영화의 감상을 적어야 할 테지만
본지도 열흘 정도 되었고
일본어 대사하나를 놓치는 바람에
그 내용을 알고 적어야지 하고는 잊어버렸었다..
이 작품은 내용이나 전개 화면 같은 것 보다.
제목자체와 그에 따른 사물을 보는 시각의 관점이란 점에서
더 기억에 남는다고 해야할것 같다.
그리고 내가 이와이 슌지에게 궁금했었던 것들 중의 하나이며
그 답이기도 할 것이다.

이와이 슌지의 작품을 가장 처음 본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러브레터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 그리고 모두가 기억하는 장면과 대사.
오겐끼 데스까? おげんきですか?
그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름대로 심금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는 멜로라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억지로 뭔가를 떠올려 본다면
그리움에 따른 환상과 현실의 괴리와 조화.
다시 말한다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앞으로의 사랑등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환상속에 버무렸다고 해야 할까?
뭐 대충의 기억에 의해 적는거라 이게 한계다.

그리고 아마도 4월이야기.
이걸 처음 봤을때는 아마도 러브레터와 비슷한 시기였을 것이다.
전작이 눈의 이미지였다면 4월이야기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벗꽃과 비의 이미지 중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러브레터 이전의 사랑의 시작과 그 발아를 보는 듯한
젊은날의 상큼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첫사랑, 짝사랑의 추억과
대학초년생의, 또 혼자서 살아가기 시작하는,
시작과 그것을 가능케하는 사랑일 것이다.
부언하자면, 4월이야기를 러브레터보다는 선호한다.
아 참 하나 더 여기에서 마츠다카코는 최고다.

언두는 내게 있어 불편한 영화였다. 가위를 눌려본 적 있는가?
가슴에 뭔가 묵직한게 앉아서 목조르는 듯한 그 느낌이었다.
그래서 언급치 않겠다.

아마 위의 두작품을 보고서 오랫동안 이와이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
이와이는 내게 멜로러브스토리 작가로써 낙인이 찍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그의 작품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된 작품이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일 것이다.
보게 된 동기는 이와이의 이름값이 아니라.
일본배우들 중 내가 선호하는 배우들 중 하나인 와타베 아츠로의 이름이
이 영화에 적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이다.
아 물론 아리타라는 잼필름의 영향도 있었다.

솔직히 별 기대를 하지 않으면서 봤는데 왠걸.
이건 대박인 거다. 여기서 부터는 이전에 적었던 감상을 조금 차용해야겠다.

[결론적으로, 아니 간단히 말한다면 "
Yen에 매여있는 상태에서의 벗어남, 탈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정체성의 혼란, 사회의 붕괴, 혼란, 빈부의 격차, 도덕의 몰락등
그 모든 걸 포괄하고 있다. 단지 강조하고 있는 것이 Yen이라고 느낄 뿐. ]
그리고 아래와 같이도 적었다.
[이와이 슌지의 감성이 현실에 제대로 묻어나는 영화이다.
러브레터 4월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없다. 그렇다고 언두의 비관적인 모호함도 없다]

위와 같이 느꼈다고 적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왠지 낯뜨거워지는 문장들이다.

스왈로우테일을 생각해보면 Chara가 부르는 my way가 떠오르며
아츠로가 내뱉는 Today is not your day란 말이 생각난다.

스왈로우테일은 가상의 암울한 근미래 인간들의 모습이다.
인간은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과
현재에 대한 부정과 비판을 그의 감성은 제대로 비틀어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옌타운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군상들, 삶의 방식. 그리고 왠지 거칠지만
내게는 더 와 닿는 화면의 질감들은 나로 하여금 이와이 슌지를 완벽하게
재인식하게끔 만들었으며,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 favorite이라고 꼽게도 만들었다.

그리고 또 뭐를 봤더라 그래. 피크닉.
제목부터 러브로맨스의 느낌이 팍팍 풍기지 않는가? 맞다.
피로 물든 광기의 소풍을 로드무비로 이렇게 억지로 이어지는 선을 통하여
하늘과 도시 그리고 벽위의 그들을 대비시키고
정신병원, 병원에서 나와서 보는 것들, 그리고 바다의 일몰? 앞에 작열하는
악마의 날개짓과 흑색으로 느껴지는 피의 이미지들.
Chara와 타다노부라는 두 사람을 부부로 만든 이 작품은 뭐랄까?
정말 암울하지만 희망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
그러면 영화를 본 직후엔 내가 뭐라 지껄였나 보자.

역시 복잡하게 끄적여서 옮기기엔 너무 길다.
i know when the world will end.
when i die.
it began when i was born so when i die, it will end
위와 같은 대사만 생각해보련다.

나는 세상이 언제 끝날지 알아.
내가 죽을때야
태어나면서 세상은 시작되고
그러니까 내가 죽으면 끝나는 거야.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자기중심적 완결형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완벽하게 동의한다는 것이
왠지 뭔가 아쉽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제 이와이 슌지는 스왈로우테일의 엔타운을
참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꿈꾼다.
다양한 방식으로 하지만
까마귀 깃털옷을 입은 코코가 마치
이카루스를 상징하는 것 처럼 일몰의 바다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살해하고 만다.
세명의 인물은 모두 사회에서 버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구원을 하기를 원하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나.
하지만 그들이 바다에서 태양을 봤을때
모든 것은 시작되어버린 걸까?
끝나버린걸까?

그리고 하나와 앨리스를 보았다.
지금까지의 이와이가 하나의 사건
여러가지 입장, 시각의 차이에 기초해서 작품을 만들었다면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이다.
두명의 절친한 사춘기 소녀의 정체성 찾기라는
기본적인 주제 속에 두 소녀의 성격과 하고 싶은 이야기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 그녀들의 아픔 바램
그 모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할까?
아마도 이와이 슌지 작품의 완성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구원과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와
두 소녀를 보고 진짜 자기가 보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멀리 있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인식햇으며
완성된 이야기 구조와 사건의 유기적인 결합들로
당위성마저 부여하면서 이 소녀들을 사랑하게 만드는
그만의 감성터치는 이제 절정이다.

그리고 그의 영화 중 가장 쉬운 그리고 많은 복선과
의미를 내가 느낄 수 있기도 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그는 이제 일본의 현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음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개인의 시각, 집단의 시각.
혼재된 시각. 언두의 꼬여 있는 줄의 이미지로
그는 회귀해버렸다. 훨씬 세련되지만 더욱 혼란스러운
이미지로 말이다. 원조교제, 이지메, 오타쿠 문화
인터넷. 이제 다시 돌아온건가. 이걸 어떻게 봐야할까?
하나와 앨리스가 감성의 완성형이라고 한다면
릴리슈슈는 이제 새로운 불꽃놀이를 보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보는 시각, 그리고 내포된 의미. 그것을 사용하는
개인과 집단들.

꼬이고 꼬인 정체성의 혼란인 언두의 밧줄과
불꽃놀이를 어떻게 볼까? 어떻게 보일까를
고민하는 시점의 문제, 그리고 잔혹한 현실의 직시라는 점에서
아마도 이와이 슌지의 새로운 시도로 볼수도 있을 것 같다.

적다 보니까 글이 이상해지고 황당해져버렸지만
아마도 이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꽤 나중의 일이 될 것이다.
조금 고치고 감상을 정리하고 사실을 확인한 후에 말이다.
2006-11-06 23:23:19

새로운 이와이 슌지의 작품 소식을 스쳐지나가는
화면에서 본 것 같다. 아주 기대가 되긴 하지만
너무 많은 기대는 항상 금물이다.

그렇지만 그의 시각과 감성
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감 마저 금할 수는 없다.

그에게 새로운 스왈로우 테일을, 하나와 앨리스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에서 그의 감성과 인식이
나에게 감흥을 줄 수 있을거라 믿고 싶을 뿐이다.

Ps. 하나만 더 말한다면 내게 있어 모호함과
불편함으로 인식되어 있는 UNDO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하기도 한다.
왜냐면, 그의 영화는 모두가 어떤 연장선상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ps2. 음 위의 기대는 불가능할 듯
새 영화 제목은 무지개 여신. 로맨스 쪽일 듯.^^


Oct 23, 2006

Ghost Soup(director's cut) 1992




각본 : 이와이 슌지
연출 : 이와이 슌지
출연 : 스즈키 란란, 미츠이시 켄, 후지타 유미코
본방송국 : 후지TV
제작년도 : 1992년
방송 일 : 1992.12.21
방송시간 : 월요일 24:30
국가 : 일본



岩井俊二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다.
그의 전작품에 흐르는 감성은 더 말 할 것 없이
이 작품에서도 흐르고 있다.

처음 들어보는 작품이었는데 이와이 슌지라는 이름만으로 보고는
초반부에는 이거 뭐야. Shit. 이건 아니잖아 하는 기분이었는데
극이 끝나가면서 역시 이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TV 영화라는 또 짧은 러닝타임이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라보는 따뜻한 이면에 대한 시각을 볼 수 있었다.

극의 초반부는 어처구니 없는 침입과 황당한 에피소드가 계속되면서
이건 뭐야 했었다. 스즈키 이치로(이름이^^)는 전에 살던 집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하여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사를 하게 되는데
이상한 소녀와 정신나간 외국인이 그를 집에서 쫓아내고 파티를 하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과거에 있었던 할아버지를 사별할때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소녀와 외국인이 하려고 했던 파티가 뭔지를 알게 된다.

그들은 파티에서 어떤 수프를 끓여서 천국에 가지 못한 유령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그 수프는 유령들에게 1년에 한번 천국에 바로
갈수 있는 기회이다. 그것을 떠올린 스즈키는 스스로 수프를 준비하여
나나(소녀), 멜(외국인)과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유령을 위한
따뜻한 수프를 제공하는 파티를 열고, 과거에 묶여서 벗어나지 목하는
유령들을 찾아다닌다. 그는 이제 또 내년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나나와 멜에게서 남은 것은 한장의 하얀 깃털의 추억이다.

따뜻하고 따뜻하고 또 따뜻하다.
아주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느낌보다는 이와이 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위에서 잠깐 말했던 세상의 이면, 즉 환상이라고 상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볼 수있다.

하늘에 가지 못한 유령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에 분명히 존재한다.
사람들의 추억으로 기억으로 말이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할때 그들이 그들을 기억할때 천국에 가는 것일까?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할아버지와의 추억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스프를
가져다주면서 기억함으로써 스즈키의 할아버지는 천국으로 갈 수
있었으리라.

우리가 모르지만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아니 잊었지만 세상에 존재했었던 가치들을 진정으로
가치있게 하는 방법은 무얼까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ps. 이제 불꽃놀이를 찾아서 봐야 할때인가 보다.

Sep 7, 2006

릴리 슈슈의 모든 것,リリイシュシュのすべて,All about lily chou chou 2001


リリイシュシュのすべて
岩井俊二

이 영화가 이렇게 어둡고 슬픈 영화인줄 모르고 봤다.
이지메, 왕따, 원조교제, 청소년이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는 줄도 몰랐다.
그냥 이와이 슌지라는 이름 하나, 위의 어둡기만 한 포스터 한장,
아오이 유가 나온다는 것 정도만 알고 접했다.
이 영화를 봄으로써 아마 이와이 슌지의 극영화는 다 본 것 같다.
tv영화였던 불꽃놀이......는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보는 이와이 슌지의 두개의 경향중 이 영화는 피크닉, 언두,
스왈로우 테일에 가깝다고도 볼수 있지만 또 다르다.
러브레터, 사월이야기, 하나와 앨리스와는 전혀 다른 것은 분명하다.

릴리슈슈라는 가수가 있다. 그녀는 에테르를 표현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우리를 대변할 수 있다....등등
난무하는 인터넷의 메시지들. 그런데 그걸 바로 화면 위에
뿌려버리다니, 적응이 쉽게 되지를 않는다.
적응이 될 때 즈음 영화는 끝이 나버린다.
처음에 자막과 타이핑 소리는 귀에 거슬리고
굉장히 영화에의 집중을 방해한다.
이해할 수 없는 정보들이 알수 없는 글로써 막 뿌려지고
흘러가버린다. 난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생각났다.
나는 위 작품을 영화보다는 이문열의 소설로서 기억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호시노의 행태와
주인공?의 모습에서 그러한 기분을 느꼈다.
이문열의 소설은 이 영화에서 처럼 소년기에 멈추진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기억들에서 변하지 않는 현재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으며
조금은 교훈적인 담론을 포함하기도 한다.(완전히 그러하진 않다)

한때 왕따였던 호시노와 이제는 가학자로서 지배자로서의 변화와
항상 그 자리에 있지만 굴복하고 마는 주인공의 끌려다닐수 밖에 없는
피수용자로서의 자기 인식은 비교될 수 밖에 없다.
츠다(야오이 유)와 쿠노의 대조적인 대처방식은 생명과 연결되어버린다.
츠다는 원조교제를 강요당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적 현실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날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쿠노는 츠다와 똑 같은 피해를 당하지만 오히려 지금까지의 자신을 버려버린다.
삭발을 통하여 어떤 경고를 하고 있다. 그녀는 아마도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주인공은 릴리슈슈의 콘서트장에서 호시노를 살해해버린다.
릴리슈슈의 에테르를 스스로 더럽힘으로써
호시노를 정화하고 자신을 정화시키려고 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릴리슈슈의 음악뿐이다.

극중 나오는 자막을 대충 본 관계로 그것을 유심히 한번 살펴봐야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지막 살인의 과정과 결과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한고로 이 이상의 글은 무리. 따라서 나중에 첨부하겠다.

역시 극중의 인터넷 댓글이라고 할까?
그 지문들은 영화에 있어서 또 다른 다양한 캐릭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일단 넷상의 글 자체는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필리아와 아오네코(青猫)의 정체부터 시작하자.
계속 보면서도 조금은 헛갈렸는데
필리아는 하스미 유이치의 분신이었고,
아오네코는 호시노였다.
이 둘은 서로의 정체를 모르지만 릴리슈슈를 통하여
깊이 교감하고 있다고 느낀다.
릴리슈슈를 통해서만이 서로의 존재를 느낄수 있고 인정할 수가 있다.

위에서 살인의 과정과 결과가 명확하지 않다고 표현했는데
결과라는 표현보다는 이후의 하스미의 행동이 모호하다고 표현하는게 나을 듯 하다.

지금 다시 보고 적는 것이라 일단 이전에 적었던 위의 글에 덧붙이라기 보다는
느낌을 다시 적어보련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릴리슈슈와 에테르라는 그들만의 용어를
이해해야만 한다.

에테르의 사전적인 의미는 (MS .Bookself 2.0)
1. 詩 하늘, 창공
2. 古 하늘을 채우는 정기
3. 빛, 열기, 전기, 자기를 전해주는 매질로 우주공간에 가득 차 있었다고 여기던 물질이다.
1. the regions of space beyond the earth's atomosphere : the heaven
2. the element believed in ancient and medieval civilization to fill all space
above the sphere of the moon and to compose the stars and planets.

(Collins Cobuild 5th ed)
Ether is a colourless liquid that burns easily. It is used in industry and in medicine as an anaesthetic.

콜린스 코빌드 사전은 별 도움이 되지를 않았다.(새로 나온 사전인데 왜 이 모양인지)

이 영화에서 에테르는 위의 의미도 포함을 하지만 거의 릴리슈슈와 동일시 된다.
릴리슈슈는 에테르를 각성한 초월적 존재이며 모든 것을 치유하고 보듬어 안는 그들의 신이다.

그들의 인터넷 투고 글에서 보듯이 에테르의 의미는 해석하기 나름이다.
릴리 슈슈 또한 그들의 주관만이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호시노와 하스미, 아오네코와 필리아.츠다와 쿠노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대답은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릴리슈슈로 연결되어져 있다.
처음엔 아닐지 몰라도 그들은 릴리를 통하고 있다.
공통분모를 찾았으니 이제는 차이점을 살펴야 할 듯 하다.

호시노와 하스미
둘은 친구였다가 지배와 피지배 형태로 관계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둘은 비슷한 소심한 성격이었다.
하스미는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그의 변화는 오직 두번이다. 살인과 염색)
호시노는 오키나와 여행계획 때부터 조금씩 변화를 거쳐
오키나와에서 죽음을 경험며 캐릭터가 완전히 바껴버린다.

하스미는 소심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는 우울한 캐릭터이다.
그것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둘은 릴리슈슈를 통하여 필리아와 아오네코라는 가면을 이용해서만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말해줄 수 있다.

필리아와 아오네코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느낀다.


츠다와 쿠노의 캐릭터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같은 처지, 다른 선택, 다른 결말을 이끌어낸다.

즉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의 슬픔이란 것이다.

쿠노의 삭발을 본 츠다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고

연날리기를 통해 날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다.

그것은 죽음의 다른 표현이다.

영 정리가 안된다. 젠장.

모두가 쓸데 없는 소리이다
.

이들에게 릴리슈슈는 무엇인가?

그들이 살아가고 싶은 모든 것이리라.

그들이 말하는 에테르는 너무나 간절하지만 가질 수 없는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는 희망이며 휴식과 치유의 촉매일 것이다.


그들이 갈구하던 에테르는 이미 없어 졌고, 현실에 절망한다.

단지 들판에서 릴리슈슈를 들을 뿐이다.

어째 글을 적을 수록 정리가 안되고 있다.

그건 아마도 필리아와 아오네코가 나누었던 게시판 대화와

릴리슈슈의 이미지에 벗어 나오지 못한 것 때문인 듯 하다.


일본에서 중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

불합리한 현실에 살아간다는 것....



이와이 슌지의 "UNDO"와 궤를 같이 하는 영화라는 느낌이 든다.

관객의 집중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 방해에 익숙해지면 영화는 끝나버린다.

화면에서 타자음과 함께 투덜대던 음악과 자막들은 종국에 가서

Undo의 풀어서 흩어져 있는 줄을 연상시킨다.

보는 내내 힘들었다. 젠장. 그것도 두번씩이나. ^^

Sep 6, 2006

하나와 앨리스 (花とアリス: Hana & Alice) 2004

岩井俊二스즈키 안아오이 유우
상큼발랄깜찍발칙앙큼한 두 소녀의 우정과 사랑이야기.
하나와 앨리스는 어릴 때 부터의 단짝 친구이다.
두 사람은 등교하는 전차속의 한 남학생을 눈여겨 보고
하나는 그(미야모토) 에게 접근한다.
미야모토의 우연한 사고에 그를 기억상실증이라고 속여서
둘이 사귀는 척 연기를 한다.
우여곡절 끝에 앨리스까지 그 연극에 동원이 되지만
왠걸, 미야모토는 마크가 되어버린다.(앨리스에게 끌리게 된다는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밝혀지고, 하나는 미야모토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종지부를 찍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입장이었고
미야모토는 자신만의 입장이 있었다. 모든 걸 알고 있으며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앨리스는 우연히 스카웃된 연예 기획사의 오디션에 번번히 떨어지지만
어떤 오디션장에서 발레를 통하여 강한 인상을 주고 잡지 커버 모델로
뽑히게 된다. 하나와 앨리스는 처음처럼 티격태격 사이좋게 그 잡지를
가지고 다시 길을 걸어간다.
무엇보다 먼저 아오이 유는 여기에서 너무 이쁘게 나온다. 거의 사기 수준이다.
아오이 유가 나오는 영화도 몇 보았는데 전혀 인상깊지 않았었다.
넷상에서 아오이 유가 귀엽고 예쁘고 어쩌구 하는 글을 보았어도
취향이 다른가 보다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 이 영화를 보고 안 보고의 차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 이쁘게 나온다. 이와이 슌지는 여자가 감성적으로 이쁘게 나오게 하는 천부적 재주가 있는 듯 하다.
아 물론 스즈키 안도 매력이 있다. 유가 없었다면 이 영화에서 정말 내 맘에 꼭 들 캐릭터이긴 하다.
아오이 덕분에 안은 이 영화에서 no2로 밀려나고 말았다.
하나와 앨리스에는 일단 아버지라는 존재의 부재와 길이 가지는 여러가지 이미지로 이루어진 듯 하다.
먼저 길이라는 이미지는 영화 전체에서 흐르고 있다. 하나와 앨리스의 접촉이 일어나는 대부분의
장소는 등교길이며 하교길이고, 어딘가를 끊임없이 걸어가면서 둘의 관계는 전개되어지고 발전되어진다.
그들이 실내에 있거나 멈추어 있으면 그것은 정체와 단절의 경우라고 느꼈었다.
만담을 하는 강당에서 둘만이 남았을 때, 앨리스는 이거 계속 해야 하냐고 묻는다. 이제 단절과 답보를
벗어나 같이 앞으로 걸어가자는 의미로 받아들였었다.
그들은 길을 통하여 중학교의 졸업을 보여주고 고등학교의 입학을 보여주고
이제 그들이 새로이 겪어나갈 인생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 억지스러울런지도 모르겠다(별로 자신은 없다는 말이다. 느낌이 그런 걸 뭐
아버지의 부재가 만들어 낸 이미지의 확장과 소녀들이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보았다.
하나나 앨리스 모두 집 내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실종이 되어있다.
하나의 정돈되고 깔끔한 소녀취향의 집은 아버지의 존재가 어떤 이유로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앨리스의 정돈되지 않은 난장판의 집은 아버지의 존재와 더불어 어머니의 존재조차 희미함을 말하고 있다.
아 물론 앨리스는 아마도 이혼한 부모때문에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 같다.
앨리스가 마크(미야모토)와 벌이는 추억 찾기 놀이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구체화이며
그 추억을 완성하고 스스로를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했었던 과거의 일들을 둘의 연애로 포장하고 위장하면서 앨리스는 마크에게서
남자가 아닌 아버지를 찾고 있다. 과거에 아버지와 보냈던 해변에서 잃어버린 하트 에이스를
마크가 찾아냄으로써 앨리스는 현실을 인식하고 아버지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마크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녀는 하나가 만들어 낸 기억놀이 속에서
불가능한 과거의 하트에이스를 찾음으로서
스스로 나아가야 할 길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 같다.
하나는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 자체가 거의 없는 듯 느꼈다.
그것을 미야모토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그녀는 미야모토를 통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냄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상상을 통한 추억만들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앨리스와의 갈등을 통하여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하나는 다시과거로 도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 꽃집귀신이라고 불리던 폐쇄적이고 고독한 시절에서 구해준 것이 바로 앨리스임을 자각하면서
그녀는 아버지라는 환상속의 추억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녀는 미야모토에게 눈물젖은 고백을 하면서
환상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사랑하는 친구를 찾게 되고,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 또한 가지게 될 듯하다.
이렇게 둘은 성장해 나간다
앨리스의 잡지 커버의 사진은 그녀들이 영화의 시작과 전혀 변하지 않은 듯 하지만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의 성숙과 발전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얼마전에도 적었지만 이와이 슌지의 감성은 정말 부럽다. 중3 고1시기의 사춘기 소녀들을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다니 말이다.
끝에 나오는 히로스에 료코의 모습 또한 흥미로왔다.
러브레터, 4월이야기 를 잇는 이와이 슌지의 감성러브판타지인 것 같다.
ps. 아오이 유는 정말 이뻤다. ^^

Jul 31, 2006

Picnic

Iwai Shunji
Asano Tadanobu
Chara
i know when the world will end.
when i die.
it began when i was born so when i die, it will end

정신병원에 수감된 세 청춘의 지구종말을 지켜보기 위한 소풍.
자신을 괴롭힌 담임을 살해한 Tsumuji는 담임의 환영에 계속 시달리고 있다.
누가 진짜인지를 증명하기 위한 목매달기를 통해 쌍둥이 동생을 살해한 Coco.

이들은 구원 받기를 원한다. 그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금지된 벽을 걷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
그러다 벗어난 한 걸음은
구원의 가능성과 세계의 종말을 알려주게 되고,
그 세계 종말을 지켜보기 위한 그들만의 Picnic을 떠난다.

끝없이 이어지는 벽들, 그리고 벽에서 내리는 순간 그들은 세계의 종말을 각각 경험하게 된다
사토루는 벽에서 떨어지는 순간 자신이 중얼거리던 lovely doll이란 말처럼,
마리오네뜨의 춤을 추며 세상의 종말을 겪는다.
코코는 츠무지를 구원해준 천사로서의 역할을 마감하고 스스로 자신의 죄를 사하고,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끝내버린다. 왜냐구 그녀가 생각하는 신은 자신을 버렸으니까 스스로를 구원해야만 한다.
츠무지는 믿었던 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구원했던 코코의 죽음을 보며 신을 저주한다.
그렇게 츠무지에게도 이 세계는 끝나버린 것이다.

까마귀 깃털옷을 입은 코코는 스스로의 정체성,
자아의 혼란으로 인한 인격분열 속에서 스스로의 한부분을 죽여버림으로써 느끼는 죄책감.
완벽했던 가족간의 유대를 끊어버림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브를 상징하는 건 아닐까?
그러한 관점에서 이들은 에덴에서의 세 캐릭터로 볼수 있지 않을까?
coco는 이브, 츠무지는 아담, 사토루는 접어두자. 그는 어차피 마리오네뜨였을 뿐이다.
츠무지가 느끼는 이지메에 의한 교사살해도 마찬가지로 그의 정신적 질환으로 본다면, 자신이 저지른 또 저지를 것 같은 어떠한 원죄의식에서 해방되지를 못하고 있는 흔들리는 남자인 아담으로 보자.

이건 현대판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인가?
그럼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뭘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벽은 그들의 세계와 그 너머의 세계의 확실한 경계이며,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괴리감일것이다.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우리는 무슨 죄를 가지고 있는가?
누가 누구를 용서할 것이며 용서받아야 하는가?
가치관의 혼재로 인한 심리적 공황에서,
이들은 자신들만의 덧없는 세계를 구축한 것이 아닐까?
비록 그것이 우리 보기에 허망한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삶은 이렇게 끝나버렸다. 하지만 그들의 소풍은 계속인 건 아닐까?
석양을 향해 총을 쏘던 코코와 츠무지,
광고판의 여자를 향해 총을 쏘던 둘의 행동은 그냥 의미없는 동작에 불가한가?
우리에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몸부림일 것이다.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런 의미를 둘 필요도 없고 헛된 사고의 잉여생산일런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들이 선택한, 또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굉장히 이해하고 싶다.
.
벽위를 걷는 여러가지 장면,
벽위에서 본 세계는 그들만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경계에서 바라본 이쪽과 저쪽은 어떤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Chara와 Tadanobu는 아마 이 영화를 통해서 만나서 결혼한 듯,
잘 어울리네. 둘의 키스 신은 아주 훌륭했다.
하여튼 난 스왈로우테일과 이 영화를 통해서 chara의 팬이 되어버렸다.
쳇 유부녀에다 나이도 많은 아줌마를 10년이 지나서 좋아하게 되다니.

이와이 슌지가 굉장히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최근에야 알게되다니, 아쉽다.

Jul 27, 2006

Undo

진정으로 우리는 어디에 속해있는가?
묶여 있는가?
묶고 있는가?
소속감?
정체성?
관계?

우리가 풀어야 할 것은 무었인가에 대한 질문?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 것?
구속하고자 하는 것은 무었인가에 대한 질문?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와 사월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는 낯선 영화.

이제 인정한다. 이와이를 나는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어디까지나 과소평가했다는 말이다.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Swallowtail Butterfly

이와이 슌지의 작품은 왠지 손이 가지를 않았다.
러브레터와 사월이야기 이후에 그의 작품을 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위 두작품이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런가? 하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라고 대답하겠다.
재미있게 봤었다. 아마 다시 본다면 그 느낌 또한 틀리겠지만.

마찬가지로 왕가위는 내가 참 좋아하는 감독이며 그의 영화 중 몇은 나의 all time favorite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타락천사 이후의 작품은 손을 몇 번 대려고는 했지만 제대로 본 기억은 없다.

근래 잼필름 이라는 단편 모음집에서 아리타라는 이와이의 작품을 보고, 흐음 그러면 이제 한번 봐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나씩 보려고 한다. 스왈로우테일은 그 시작이다.

솔직히 이 작품은 예전에 한번 보려고 하다가 손을 놓았던 적이 있는 영화이다.
초반의 장례식 장면, 그 과장되어진 난민들의 모습에 화들짝 놀래서 그 이후를 포기한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건 그 당시 나의 모든 심적, 육체적 상태가 그러한 꺼려지는 전개를 조금도 참지 못하는 극도의 피폐함 때문이긴 하지만. 하여튼 그런 과정을 거쳐서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라는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속에는 미카미 히로시와 와타베 아츠로라는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두 배우의 존재가 크게 작용했음은 당연하다.

일단 배우들이 정말 좋았다. Hiroshi Mikami, Chara, Atsuro Watabe, Eguchi Yosuke
내가 눈여겨봤던 세 남자배우외에 그리꼬 역을 맡았던 Chara가 정말 좋았다.

Yen이 지배하는 사회, Yen을 벌기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Yentown, Yen이 지배하는 사회, Yen을 구하는 사람들, 둘 다를 지칭하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아니 간단히 말한다면 "Yen에 매여있는 상태에서의 벗어남, 탈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정체성의 혼란, 사회의 붕괴, 혼란, 빈부의 격차, 도덕의 몰락등 그 모든 걸 포괄하고 있다. 단지 강조하고 있는 것이 Yen이라고 느낄 뿐.

Yentown이라는 설정하에 어머니의 죽음, 그리꼬와의 만남, 페이홍, 란과의 만남, 료양키와의 만남 이러한 다양한 만남을 매개로 하여 영화는 충분히 어슬퍼 보이게 교차하고 있다.

이런 곳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르게도 살아간다. 너무나 솔직한 삶의 이야기를 근미래라는 가상의 세계(이미 현실이긴 하지만)를 배경으로 하여 My Way라는 노래처럼 제 갈길을 가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 Way of life 이건 당신의 선택이다.

Today is not your day. 란의 대사이다. 오늘만 그런게 아니다. 우리 삶은 항상 이런 말을 듣고 살지 않는가. 뒤돌아보지 않았으면 뭔가 해볼수도 있었을텐데. 쯧.. 그게 우리네 인생이다.

이와이 슌지의 감성이 현실에 제대로 묻어나는 영화이다. 러브레터, 4월이야기의 아름다움은 더이상 없다. 그렇다고 언두의 비관적 모호함도 없다.

하루키와 류를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