楢山節考, The Ballad of Narayama 1983
나라야마 부시코
이마무라 쇼헤이 - 1983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생존인가? 사회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대화를 한다고 해서 거기에 생존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짐승과 다른가?
일본중세의 생존이야기.
우리나라의 고려장과 비슷한 70세가 되면 아들이 부모를 나라야마의 신령에게 데려다 주는 의식.
생존이 가장 중요시되는 시대. 종족번식의 본능과 음식만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면서 생겨난 풍습이리라. 거기에 어떤 관습 또는 믿음으로서의 나라야마 가는 길은 일종의 인신공양이며 그들만의 결코 어길수 없는 최대의 가치일 것이다. 생존을 위한 살인이 정당화되는 시대에 그러한 수고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제사의식이며 단 하나 지켜야만 하는 유일 가치일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어떻게 보면 슬프지만 떠들석하기도 한 장례식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당시에 70세를 산다는 것은 꽤나 장수일 것이다.
제식으로서, 가치유지의 장치로써 그리고 잔치로써 나라야마 가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아버지도 살해한 타츠헤이가 어머니를 버리면서도 발길을 되돌리는 그 감정은 어떤 것일까?
결국은 나라야마를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단지 눈이 내린다는 것으로 그 의식에 어머니는 좋을꺼야, 운이 좋은거야 하고 위안할 수 밖에.
절벽에서 아버지를 버리는 친구의 모습과 나라야마에 버리고 내려가는 자신에게서 그는 어떤 차이점을 느꼈을까.
어떤 식으로던 사람은 살아간다.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선택의 갈림길에서 편하기 위해서 종교, 믿음, 이데올로기, 관습, 법, 제도 등등을 만들고, 생성되는 것은 아닐까? 살아가는 방식의 이야기이다.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인간이다. 그것을 내가 이해를 하던 못하던 말이다.
그렇다면 타츠헤이는 어떤 선택을 한건가?
제도에 순응한건가? 아니면 자신의 선택일까?
타츠헤이의 삶이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과 단 한치의 차이도 없다면 단순한 나의 과장일려나?
타츠헤이도 우리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젠장 인류는 석기시대 이후 문명만 발전해 나갈뿐, 진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멸종직전의 종인가 보다. 뭐 이것 저것 발전했고 지금 저러한 일은 없지 않느냐?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럴까? 하고 되묻고 싶다. 생활이, 제도가, 인간존중이 점점 발전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맞아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과연 인간은 발전하고 있는가? 문화, 문명,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의 종 그 자체는 발전하고 있는 가 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이 아닌 정신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건가? 그것이 인간이 우월해지고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유일한 이유인데 그것이 정체 되어있다.
진화가 멈춘 종은 반드시 쇠퇴하고 멸종하게 되지 않는가?
말이 또 엉뚱한데로 흘러가는군. 쳇 이건 나의 병인가 보다.
인간은 진화를 게속 해야만 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생존이라는 것에 대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영화가 아닐까. 여겨진다.
글을 좀 다듬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냥 떠 오르는 데로 적다 보니. 영화감상이 아니라 허튼 소리가 잘 되어버린다. 이 블로그의 영화, 음악에 관한 것들은 결코 비평도 아니며, 분석하기 위한 글들도 아니다. 내가 봤던것, 들었던 것, 느꼈던 것들을 단순히 메모하는 것이다. 절대 그 이상의 의미가 없음을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주지해야겠다. 이건 내 생각의 정리를 위한 낙서장일 뿐이다. 그래서 두서도 없고 개념도 왔다갔다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정리가 될까 하여,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정도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