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11, 2006

선택 2003 The Road Taken


보는 내내 울었던 영화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의 홍기선

나는 당신의 사상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 볼테르

영화의 시작은 위의 글로 시작해서

아래의 말로 끝난다.

1951년 10월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시작한 김선명은
1995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수감생활 43년 10개월 중 39년을 불취업으로
방안에만 갇혀 지냈고, 그 중 21년을 독방에서 지냈다.

석방된 뒤 선명을 본 90의 어머니는
2개월 뒤 돌아가셨고, 그 후에도 동생들은
선명을 만나주지 않았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고,
9월 2일, 치과기공일을 하던 선명은
다른 62명의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북송되었다.

일단 영화만 본다면 단순 나열이 주를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후반부 결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영화라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었다.

인간극장이나 다큐를 보는 듯 했다.

쉽지 않은 주제와 우리나라 근 현대사를 관통하는 40 여년 간을 다루는

소재의 무게감이 영화의 웬지모를 엉성함을 덮어버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후반부에 다가가면서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추어 간다는 느낌이 들긴 햇지만

물론 영화내에서 어떤 상징과 기호 같은 표현들을 일부러 자제한 것 같은데

은유적 표현이나 대사를 억제하고 직접적인 대사와 김선명의 시각에서만

즉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처음에 시작하면서 터널 장면을 보면서는 후샤오시엔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 영화의 구조나 형식 등 모든 것은 결국

이데올로기, 한국 근현대사, 인권, 삶, 가족을 조금씩 다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결국 이데올로기, 삶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물론 삶에 모든 것이 압축되는거 아니냐? 그렇게 물어본다면

표현을 달리 해야겠다. 양심의 가치라고 표현하면 정확할런지 모르겠지만

삶에서의 최우선 가치를 이들은 양심이라고 표현한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인정은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러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가장 먼저 남북문제.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이데올로기 문제는 내가 논하기엔 힘겨운 주제이기도 하고

옳고 그름을 논하기 보다는 현 추세에 영합되어지는 부분이

더욱 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오태식의 말처럼 동구도 소련도 붕괴되었으니 하는 식의

단순한 의미는 아니다)

대림 되는 두 이데올로기에 개인적인 여러 관점들이 혼합되어 있지만

주 되는 두가지는 오태식과 김선명의 관점일 것이다.


통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이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으면서도

김선명의 입장이 더욱 강하다(그럴 수 밖에 없다. 시점 자체가)


둘은 기본적인 배경 자체가 극과 극이다.

경찰에게 자신이 빨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가족이 죽음을 당한 김선명

공산주의자에게 가족과 자신의 다리를 잃은 오태식.


오태식은 말한다. 당신들은 잊혀졌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삶을 낭비하고 있느냐?

김선명은 말한다. 내 삶에 가치있는 일을 하나는 하고 싶다. 이건 낭비가 아니다.


오태식은 묻는다. 그럼 김일성을 존경하는 것은 뭐냐?

통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북 주도하의 통일은 원하지 않는다.

그럼 남 주도의 통일이 된다면 당신은 관계없는가?

내가 정의가 힘이 있다면 너 같은 빨갱이는 벌써 없애버렸을 것이다.


김선명의 대답은 솔직히 괘변이었다. 내가 누구를 존경하던, 김구선생을 존경하던,

매국노 이완용을 존경하던 그것은 내 자유라고. 통일을 해서 모두가 함께 잘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고 싶을 뿐이라고 한다. 여기서 괘변이라고 한 것은 매국노 이완용을

예로 들은 부적절함이었고 논리에 있어서 억지스러움을 말한 것이다.

매국노 이완용은 아무리 대비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들어서는 안되는 예이다.

이건 분명 잘 못 된 것인데(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그걸 자유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오히려 관철 하지 못할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오태식은 말한다.

진 싸움에 끼어들어서 감옥에 갇혀 있는 당신은 무었인가 하는 말이 계속 떠오른다고

그것은 자식의 성장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과거의 가치가 퇴색이 되었음 을 표현하는 것이다.


김선명은 말한다. 보통 감옥 밖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감옥내에 있는 것이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존중할 수 밖에 없다. 세월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말 중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불평등한 입장에서 이루어졌고 탄압이 가능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김선명이 출소하는 그 감옥 속에서

오태식은 오히려 갇혀 있는 듯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진정 갇혀 있었던 것은 누구일까?

하는 의문과 비난일 것이다.

그리고 오태식에게 했던 말은 출발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둘은 어떤 벽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메꿀 수 없는 상처가 그 벽을 이루고 있기에 말이다.

김선명은 당신도 용서하라고 말한다. 자신 때문에 죽은,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은 것을 자신은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그 간극을 메꾸지 못한다면 결국 증오의 악순환에 따른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계속될 수 밖에 없음을 알린다.

그렇지만 김선명이 출소하는 장면에서 입고 있는 죄수복은 그 또한 오태식 처럼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처음에 이건 뭐야? 그랬다. 감옥에서 죄수복 입고 출소하는 경우도 있냐? 라는 )

뭐 결국 실제화면에서 그들은 평상복을 입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그것은 영화적 표현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데올로기 충돌에서 비롯되어진 잘못된 증오의 결과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으며 남은 것은 상처밖에 없다는 의미이리라.


난 이데올로기가 굉장히 중요한 어떤 것이란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것이 대량학살이라던지, 어떤 탄압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때는 의미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아닌가?

어떤 이데올로기가 옳다 그르다, 더 낫다 못하다의 판단은 개인이 하는 것이며

그 개인이 모인 사회가 약속을 하는 것이리라. 거기엔 자유와 평등은 기본적인 베이스이다.

기본적인 베이스가 없는 이데올로기의 충돌과 우리의 의지가 아닌 조작되어진 열강의 파워게임이

우리나라를 이렇게 반토막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말이 굉장히 길어졌는데 여기까지가 이데올로기와 그에 따른 대칭축의 두사람을 생각해본 것이다.

위에서 길게 서술한 것은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집학적 관념과 그에 따른 개인의 선택 문제이리라.



이제는 좀 더 개인적인 인간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위의 것과 완전히 떨어질 수는 없지만)

흔히들 양심수라고 표현되어지는 비전향 장기수들의 개인적인 삶을 억지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처음에 표현했듯 보는 내내 울었다고 했는데 난 이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과 그 가족을 보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스스로의 양심과 사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러나 사람은 혼자일 수가 없기에 그들의 가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종다리라는 양심수의 딸이 면회를 처음으로 온다(물론 자발적으로가 아닌 정부부처의 강권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만 괴롭히라고 한다. 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우리가 힘들고 고생해야 하냐고?

이제 곧 결혼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에게 피해입히고 싶냐고?

종다리는 시간이 지나면 이유를 알게 될거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내가 빨갱이 딸이라고 다른 애들이 떠밀 때 당신은 어디있었냐면서?

그러고 일어나는 딸의 등은 곱추가 되어 있었다.

결국 자신의 양심이 딸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자괴감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나도 울었다. 이렇게 만든 무서운 이데올로기들이 싫어졌었다.

그들은 늘 고문을 당했고, 배고픔을 겪었고 낙이라고는 통일의 소식과

북조선이 자신을 구할 것이라는 희망이 전부이다.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그래서 그들은 갇혀 있는 것이다.

단지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말한다. 전쟁중 급조된 국방경비법 위반이라는 날조된 법으로

어떻게 자신들을 40여년이나 가두고 있을 수 있냐고?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서두의 볼테르의 말을 인용했듯이 사상이 다르다고 탄압을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글을 계속 적으려면 여기서 노선을 정해야 한다고 한다(내 친구의 충고라고나 할까? 뭐 그렇다)

그렇지만 솔직히 힘들다. 한국전쟁이라는 우리나라 최대최악의 비극으로 파생되어진

문제,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악몽 속에, 나는 어느 쪽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정해야 한다면 여기서는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볼테르의 말을 인정하고 찬성한다.


이데올로기 간의 충돌과 찬반으로 인하여 인간의 죽음이 파생되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전에도 언급했지만 종교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요즘이야 이데올로기 충돌의 냉전시대라기 보다는

새로운 종교전쟁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되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민족 갈등을 포함한)


글이 굉장히 길어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마무리는 지어야 하겠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권문제와 연관되어진 볼테르의 말에서 모든 것이 나타나 있다.

김선명은 통일이 되면 결혼하고 싶어했던 순수한 신념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겪었었던 모든 것들은 그를 70이 넘은 노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잊혀진 인물이다. 하지만 잊혀져서는 안되는 한국사의 치부를 대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의미가 있다.

남북 문제를 다루는 여러 영화를 보면서 고민이 없고 성찰이 없어 아쉽다고 말하곤 했었다.

이 영화는 제대로 그 맥락을 짚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갈등으로 시작해서 갈등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복제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

슬펐고 아쉬워진다. 물론 결론을 내라는 말은 아니다.

한국현대사가 갈등과 증오로 점철되어진 역사인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단지 주제와 소재의 깊이감에 비해 영화는 왠지 주눅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잘 못 판단하는 건 아닐까?

내가 편견때문에 잘 못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쨌던 한국 현대사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계속 되어야 한다.

이제 제대로 다루어야만 할 때이다.


생각 나는 대사가 있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를 고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대사였다.

같은 말로 볼 수도 있겠지만 왠지 후자가 가슴에 와 닿는다.

둘중에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나머지 하나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하나를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 밖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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